St. Augustine의 교육론(번역)

제 5 장 교사와 학생의 만남 - 3 - 1 언어와 사물: 커뮤니케이션의 문제

해선녀 2009. 3. 6. 21:49

 

 

 

언어와 사물 : 커뮤니케이션의 문제

 

 

18)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있을 때 이해하게 되는 그것은 사실상 우리 내면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빛을 발하고 또한 내면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때 외부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일까? 내가 말을 하고 있을 때,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단지 당신의 귀에 말소리를 집어넣고 있을 뿐이다. 그의 내부에 있는 신이 그에게 현현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실제로 그에게 어떻게 말을 했다고 하겠는가? 나무를 키우는 사람들은 그 나무 바깥에 있지만, 그 나무를 만든 신은 그 내면에 있다. 나무를 심고 물을 주는 사람은 그 나무 바깥에서 일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 나는 사람이니까. 나는 누구를 가르치는가? 나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인 내가 나의 말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을 가르친다면, 신도 역시 신의 말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을 가르치고 있다.

 

다음에 나오는 대화는「교사(The Magistro)」라는 대화편의 거의 절반을 가져온 것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친아들 아데오다투스 사이의 대화이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19) 아우구스티누스: 너는 우리가 말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데오다투스: 제 생각에는, 그것은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거나, 아니면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아우: 나는 첫 번째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말을 할 때에는 무엇인가를 상대방에게 가르쳐주려고 그런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우리가 배우기 위해서도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아데: 우리가 질문을 할 때에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아우: 그럴 경우에도, 나는 우리가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생각해 보아라. 우리가 상대방에게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아데: 그러고 보니 그렇습니다.

 

아우: 그러면 이제 우리는 항상 가르치기 위해서만 말을 한다고 보아야 하는가?

 

아데: 저는 아직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말을 한다는 것이 그저 단어를 내뱉는 일이라면, 노래를 할 때도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무도 우리에게서 무엇을 배울 사람이 옆에 있지 않아도 노래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누구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우: 그건 그렇지만, 가르친다는 것 중에는 무엇인가를 상기시켜 주는 것으로 된 것도 있어. 그건 우리가 차차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어. 그런데 네가,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해내는 것이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누군가가 네가 무엇인가를 다시 기억해내도록 해 준다고 해서 너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나도 굳이 반대하지는 않아. 그래서 이제, 사람이 말을 하는 이유 두 가지를 정리한다면,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는 것, 그리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엇을 기억하게 하는 것, 그리고 후자는 또한 노래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되는 건가?

 

아데: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반드시 무엇인가를 상기하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저 즐거워지기 위해 노래를 부릅니다.

 

아우: 네 말을 알아듣겠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면서 너를 즐겁게 만드는 것은 그 노래의 멜로디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겠지. 반드시 가사와 연결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은 플루우트를 불고 하아프도 키고, 새들은 노래를 한다. 우리도 가사 없이 곡조만 노래할 때도 있다. 그런 것들이 모두 다 노래라고는 할 수 있지만, 말하는 것이라고 하지도 못할 것이다. 너는 이 말에 반대할 것이 있느냐?

 

아데: 별로 없습니다...

 

 

20)우구스티누스: 우리는 또한 입으로 소리를 내고 있지는 않으면서도, 그 단어를 생각하면서 마음 속으로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상기하고 있을 때 그렇게 되는데, 그것은 기억이 언어를 그 속에 깔고 있으면서 그 언어의 속을 뒤집어서 그 안에 있는 사물 자체를, 즉 언어가 기호화하고 있는 그 대상 자체를 마음 속에 떠올려주기 때문이다.

 

아데오다투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아우: 그러면, 우리는 언어가 기호라는데 대해 동의하고 있는 건가?

 

아데: 예.

 

아우: 그리고 기호라고 하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 아닌 한, 그것을 기호라고 할 수 없겠지?

 

아데: 그렇습니다.

 

아우: 이 싯귀에 몇 개의 단어가 있는지 말해 보아라. “Si nihil ex tanta superis placet urbe relinqui."[이 위대한 도시에 아무 것도 살아남지 않게 될 때 신들이 기뻐한다면,]21) * 

 

아데: 여덟 개입니다.

 

아우: 여덟 개의 기호가 있다는 말이지?

 

아데: 예.

 

아우: 너는 그 시를 이해하겠지?

 

아데: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우: 그 각각의 단어들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말해 봐.

 

아데: “Si” [“if”]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아우: 그렇다면 적어도 “Si”라는 단어가 나타내는 대상을 어디에서 찾을 건지는 알겠구나.

 

아데: “Si”는 의심을 나타내고, 의심은 분명히 우리 마음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우: 일단 그 정도로 해 두자. 그 다음의 단어들로 넘어가 봐.

 

아데: “Nihil” [“無”],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그 외에 다른 무엇을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아우: 그렇겠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무엇인가를 나타내고 있지 않으면 그것을 기호라고 할 수 없다고 한 그 말에 얼른 동의할 수가 없게 되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이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이 시의 두 번째 단어는 어떤 대상을 나타내고 있지 않으므로, 그것은 기호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돼.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언어는 기호이다 라든지, 모든 기호는 무엇인가를 나타내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잘못된 결론으로 가버린 거지.

 

아데: 저를 너무 밀어붙이십니다. 일단, 어떤 단어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이 그것을 입으로 소리내어 말한다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것뿐입니다. 아버님이 저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저는 아버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가 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기호들로서, 제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무슨 뜻을 가지고 있지 않고는 아버님이 ni-hil이라는 두 개의 음절을 소리내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 반대로, 그 단어가 어떤 뜻을 전달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시고, 또한 그것들이 귀에 전달되었을 때에는 무언인가가 가르쳐지거나 상기되는 것이라고 믿으신다면,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아버님은 그것을 이해하고 계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우: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결론은 무엇인가? 그 단어는 그러면, 존재하지 않는 어떤 사물이 아니라, 정신적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나? 그 정신적 상태라는 것을, 말하자면 마음이 어떤 것을 볼 수도 없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상태,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렇게 표현해야 될까?

 

아데: 그게 바로 제가 설명하려고 했던 그것 같습니다.

 

아우: 어쨌거나 간에, 이러다가 우리가 너무 엉터리 같은 소리나 하게 되기 전에, 이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자.

 

아데: 엉터리가 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우: 우리는 바로 그 “無”라는 것, “아무 것도 없는 것”에 막혀서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상태 아닌가?

 

아데: 예, 정말 그렇습니다. 이건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어 버릴 것도 같고, 정말,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아우: 이런 종류의 모순에 대해서도 언젠가 신이 우리에게 기꺼이 허락할 때가 오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겠지. 그렇게 될 때까지 다시 그 시로 돌아가서 네 능력이 닿는 대로 그 다음의 단어들이 무슨 뜻인가를 설명해 보거라.

 

아데: 세 번째 단어는 전치사 “ex” [“out of”]인데, 저는 그것 대신에 “de” [“from”]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우: 나는 네가 잘 알려진 한 가지 단어 대신, 아무리 그와 똑같은 뜻을 가진 것이라 해도, 잘 알려진 또 다른 단어로 그것을 바꾸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란다. 그렇지만, 우선 그 뜻은 알겠다. 만약 그 시인이, “ 이 위대한 도시에서부터(out of such a great city)” 대신에 “이 위대한 도시로부터(from such a great city)”라고 했어도, 내가 너에게 “로부터”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면, 너는 그 두 기호가 같은 의미라는 뜻에서 “에서부터”라고 대답하겠지만, 나는 그 두 단어가, 즉 그 두 기호가 나타내고 있는 같은 의미, 그 동일한 것,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는 것이다.

 

아데: 제 생각으로는, 그것은 어떤 것이 원래 그것이 속해 있던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그 어떤 것을 우리는 그것이 속해 있던 다른 어떤 것“에서부터” 나온다는 말을 합니다. 그 다른 어떤 것은, 마치 그 싯귀에서 그런 도시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는데도 트로이 사람들이 그 도시“에서부터” 온다고 말하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가 아프리카의 사업가들이 로마“에서부터” 왔다고 말할 때처럼, 항상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우: 네 말에 나도 동의한다. 그런데, 거기에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너는 네가 거기에서 어떤 단어들을 단지 다른 단어들로, 그리고 기호들을 다른 기호들로, 다시 말하면 네가 잘 알고 있는 단어와 기호들을 역시 잘 알고 있는 다른 단어와 기호들로 바꾸어 설명했을 뿐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네가, 할 수만 있으면, 그런 언어들이 기호화하고 있는 그 대상 자체가 무엇인지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아데: 저는 아버님이 진심으로 그러시는지 일부러 그러는 척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서 제게 그럴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신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언어를 가지고서만 대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은, 그것이 무엇인지는 제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언어가 아닌 어떤 것을 찾고 계시며, 저의 언어를 통해서 그것을 얻어내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님부터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 질문을 해주실 수 있어야 저도 똑같은 식으로 그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우: 네 말이 맞다. 그렇지만, 내가 “paries”[“벽”]이라는, 세 음절로 된 단어의 뜻을 묻는다면, 너는 틀림없이 그 세 음절로 기호화되고 있는 대상인 물체 그 자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그것을 내게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너는 아무런 언어를 쓰지 않고도 내게 그 사물 자체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아데: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그건 물질적 대상을 표시하는 경우에만 해당하고, 그 나마 그 대상들이 현장에 실제로 있어야만 됩니다.

 

아우: 우리는 색깔을 물체라고 해야 되느냐, 물체의 성질이라고 해야 되느냐?

 

아데: 물체의 성질입니다.

 

아우: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색깔을 손으로 가리킬 수도 있다는 것은 무엇이냐? 너는, 물질적 대상 뿐 아니라 거기에 물체의 성질까지 포함시켜서, 그런 것들이 현장에 있기만 하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아데: 제가 물질적 대상이라고 했을 때에는 모든 물질적인 것, 즉 물체 속에서 파악되는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한 것입니다.

 

아우: 그렇지만 거기에도 예외가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라.

 

아데: 아버님이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저는 “모든” 물질적 대상이라고 하지말고, “모든” 가시적 대상이라고 했어야 합니다. 물론, 소리, 냄새, 맛, 무게, 열처럼, 시각 이외의 감각과 관계되는 것들은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도 없습니다. 단지 그것들은 모두 물질적 대상과 분리된 채로는 볼 수가 없다는 점에서, 역시 물질적인 것이라고 하겠지만 말입니다.

 

아우: 너는 사람들이 귀가 안 들리는 사람들과 몸짓으로 일종의 대화를 할 수 있고, 그 귀 어두운 사람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질문과 대답을 해 내는 것을 본 적이 있겠지? 그런 식으로 그 사람들은 자기가 바라는 모든 것, 적어도 그 대부분을 표현할 수 있다. 그 경우, 분명히 언어가 필요 없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물체뿐 아니라, 소리, 맛 같은 것까지 다 포함되는 것이다.

 

아데: 그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단지 말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out of"라는 표현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저 뿐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아무리 대단한 무용가라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우: 네 말이 맞겠다. 그렇지만, 그런 무용가라면 그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고 해도, 그 사람이 단어로 표현되어 있는 어떤 물체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어떠한 동작을 한다고 해도, 너는 그것이 그 물체가 아니고 단지 그 물체를 나타내는 신호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무용가는 언어로 언어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신호로써 신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이다. 즉 “ex”(“out of”)라는 단음절이나, 그가 만들어낸 몸짓이나, 모두 동일한 어떤 것을 나타내는 신호라는 것이다. 내가 기호를 사용하지 않고 보여 달라는 것은 바로 그 동일한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아데: 그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우: 벽이 그것을 해내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데: 우리의 이성으로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벽까지도 신호 없이는 보여줄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 역시 그것이 벽 그 자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사실 벽이 보이도록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신호라는 것 없이 보여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우: 그렇다면, 좋다. 내가 만일, “걷다”가 무엇인가 하고 너에게 물었는데 네가 일어서서 걷는다고 하면, 너는 내게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언어나 다른 어떤 것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그 자체를 사용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아데: 그렇다고 인정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도 분명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이제 신호를 거치지 않고 바로 보여질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앉는 것, 서는 것, 소리지르는 것, 그 외에도 얼마든지 있겠지요.

 

아우: 자, 그러면, 내가 “걷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네가 마침 걷고 있는 그 순간에 너에게 다가가서 “걷다”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너는 그것을 어떻게 가르쳐 줄 수 있겠느냐?

 

아데: 저는 걷는 동작을 조금 더 빨리 하면서 아버님이 질문하신 후에 상황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 드려서 아시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보여 드려야 할 것 이외의 어떤 일도 동시에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되겠지요.

 

아우: 너는 걷는다는 것과 서두른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겠지? 걷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서두르지 않을 수도 있고, 서두르는 것이 모두 걷고 있을 때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글을 읽거나 쓰고 있을 때, 그 밖의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서두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질문하고 나서 네가 더 빠르게 걷는다면, 나는 아마도 “걷는다”는 것은 “서두르는 것”을 의미하는 줄로 알 것이다. 그것이 새로 보태어진 요소이고, 그 때문에 나는 잘못 알게 될 것이다.

 

아데: 우리가 질문을 받고 있는 그 순간에 마침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 중일 때에는, 신호를 쓰지 않고 그것을 보여 줄 도리가 없다는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그 일에 더 이상 아무 것도 보태지 못하니까, 그 질문자는 우리가 그것을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도 않은 채, 하고 있던 일만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 것입니다. 제가 마침 말을 하고 있는 중인데, 누군가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고, 그것을 해 보일 수 있는 일에 대해서 묻는 경우에는 당장 그것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신호 없이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가르치기 위해 무엇이든지 말을 하려고 하면,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말로써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질문자가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그 행동을 계속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알고 싶어하는 그것을 명백하게 알아 차릴 수 있게 될 때가지 저는 계속 말로서 그를 가르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가르쳐 줄 다른 어떤 신호를 찾아내려 하지 않고, 다만 그것 그 자체(말)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22)아우구스티누스: 그러니까, 너는 우리가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즉시 해 보일 수 있는 행동들은 신호 없이 그 자체를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라는 말이지? 거기에 예외가 있을까?

 

아데오다투스: 그 정의에 들어 올 모든 행동들에 대해서 지금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묻는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 이 두 가지 이외에는, 신호 없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의 질문에 대해서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해 보여 봤자, 그 사람은 보여지고 있는 그 행동만으로는 직접 배울 수 없습니다. 앞의 예를 다시 들자면, 제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누가 “걷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서, 제가 신호 없이, 즉 걸어 보이기만 함으로써 그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가르쳐 주려 해도, 그 사람이 “걷는 것”이란 제가 걸어 보인 바로 그 거리만큼만 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잘못 알게 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후에 그는 잘못 될 것입니다. 제가 걸어 보였던 그 거리보다 더 길거나 짧은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은 그것이 걷는 것이 아닌 줄로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한 가지 단어에 대해 말씀드린 내용은 사실상 지금까지 나왔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다 해당됩니다. 말씀드린 그 두 가지를 제외하면, 신호 없이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우: 그래, 나도 그건 인정한다. 그렇지만 너는 말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겠지?

 

아데: 정말 그렇습니다. 그 두 가지가 똑 같은 것이라면 말을 하지 않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야 되지요. 언어 이외의 신호로도 우리는 가르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우: 그러면 가르치는 것과 신호를 보내는 것 사이에는 다른 점이 있는가? 그건 똑같은가?

 

아데: 저는 똑같다고 말하겠습니다.

 

아우: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옳게 말한 것일까?

 

아데: 분명히 옳게 말한 것입니다.

 

아우: 좋아. 그러면,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방금 우리가 말한 것을 가지고 쉽게 반박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겠지?

 

아데: 예, 그렇습니다.

 

아우: 그렇다면, 우리는 가르치기 위해 신호를 보내는 것이지, 신호를 보내기 위해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가르치는 것과 신호를 보내는 것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일이다.

 

아데: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 것을, 둘 다 똑같다고 했으니 제가 틀렸습니다.

 

아우: 그러면 이 말에 대해서 대답해 보아라. 어떤 사람이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고 하면, 그는 그것을 신호를 보냄으로써 하느냐,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이냐?

 

아데: 신호를 보내지 않고 어떻게 그것을 가르칠 수 있을 지,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아우: 그러니까, 네가 조금 전에 한 말, 즉 어떤 사람이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23)**

신호 없이 직접 가르칠 수 있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 되지 않느냐? 네가 신호를 보내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데 동의를 하면서 우리는 이것도 신호 없이는 할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 이제 실제로 그런 것 같지만, 만약, 그 두 가지가 서로 다르고 가르치는 일은 신호를 보내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 원래 네가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그것은 가르치는 것은 직접적인 방법으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른 것에 대해 신호를 보내는 일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신호를 보내는 일, 즉 말하기라는 것만 빼고는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사실은 말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서 신호를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신호 없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완전한 근거가 된다고는 할 수가 없다.

 

아데: 그 말씀을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아우: 그러므로 우리는 신호 없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신호 자체보다는 신호를 수단으로 해서 얻게 되는 지식이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호로 표시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신호 그 자체보다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전제를 해 두고 있다. 24*

 

아데: 저도 동의합니다.

 

아우: 이제 묻겠는데, 우리가 이 조그만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 온 그 긴 우여곡절을 다 기억하겠느냐? 이제까지 꽤 오랫동안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이야기해 오는 동안에, 우리는 세 가지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내려고 했다. 첫째는, 신호 없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사실인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신호 중에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그 대상 자체보다도 더 좋은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며, 셋째로는, 사물에 대한 지식이 그 사물의 신호에 대한 지식보다 더 나은가 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너에게 몇 마디 더 듣고 싶은 네 번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도달한 결론들에 대해 의심스러운 것이 더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데: 정말로 이렇게까지 빙빙 돌리면서 어려운 길을 거쳐 온 바에야, 좀 더 결정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질문을 하시니까, 왜 그런지 걱정이 앞서서 선뜻 동의를 못하겠습니다. 아버님이 마음 속에 무엇인가 하실 말씀이 있지 않으시고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셨을 것 같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문제의 본질적인 난점 때문에, 저는 도저히 그 전체를 파악할 수도 없고 절대적인 확신이 서는 대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무언지도 모르게, 거기에는 복잡한 어떤 것이 둘러쳐져 있는 듯이 보이기는 하면서도, 제가 그것을 뚫어 볼 수가 없습니다.

 

아우: 네가 망설이는 것을 보니, 나는 오히려 기쁘다. 이제 너는 신중한 자세를 가지게 되었으니, 쉽사리 평정을 잃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기가 평소에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것이 반론에 부딪쳐서 승복 당하거나 왜곡 당하게 될 때, 마음을 상하지 않게 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사려 깊고 치밀하게 검토된 논의에 굴복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아는 것처럼 받아들여버릴 위험이 우리에게 항상 있는 것이다. 우리가 늘 영원히 변치 않은 것이라고 확실하게 믿어 오던 것이 무너져버리고 말 때에는, 이제는 어떠한 것이라도, 그것이 아무리 명백하게 논증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믿지 말아야겠다고 생각될 정도로, 우리는 이제 이성이라는 것에 대한 증오와 불신에 빠져버릴 가능성조차 있다.

 

그러니까, 네가 정말로 지금 어떤 결론을 내리기를 망설이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그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함께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런 상황을 한 번 가정해 보아라. 예컨대, 나뭇가지와 끈을 가지고 새를 잡는 방법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그런 도구를 가지고 있는 어떤 새잡이꾼을 만났다고 하자. 이 새잡이는 지금 새를 잡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그 옆을 지나가고 있다. 당연히 그럴 수도 있듯이, 그 사람은 그 새잡이의 뒤를 따라 가는 동안, 도대체 그 도구가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를 알아내려고 궁리를 해 볼 것이다. 새잡이는 그 사람의 궁금증을 알아채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낚싯줄을 막대기와 고리에 매달아서 지나가는 작은 새를 잡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쯤 되면, 그 새잡이는 신호를 보내지 않고도 직접 행위를 해 보임으로써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데: 저는 그런 경우가 “걷다”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사람의 경우와 유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그가 새 잡는 방법의 전체를 여기서 보여줄 수 없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우: 그런 걱정이라면 간단히 없애버릴 수가 있다. 그 사람은 하도 머리가 좋아서 그 한 가지 시범만 보고도 새 잡는 기술의 전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신호 없이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아데: 저도 거기에 이런 말까지 덧붙일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매우 좋은 머리를 타고났다면, 그 사람은, 겨우 몇 발짝만 걸어 보여도, 걷는다는 것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다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우: 나도 그 말에 동감일 뿐 아니라, 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너는 이제 모든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우리는 각자 신호 없이도 가르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그 전에 생각했던, 신호 없이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없다는 말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예들로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한 두 가지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수 천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신호를 보내지 않고도 직접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것을 의심하는지를 나는 정말 묻고 싶다. 신호 없이 직접 온갖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배우들의 수 없이 많은 연기들은 고사하고라도, 우리는 적어도 신과 자연은 만물을 투과하고 뒤덮을 수 있는 태양과 그 빛을, 그리고 달과 수많은 천체들, 바다와 육지, 그리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체들을 직접 우리 눈앞에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점들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하다 보면, 너는 어쩌면, 아무리 적절한 신호라 할 지라도, 실제로 우리가 신호로부터 배우게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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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성 요한 복음론」, 26, 7-8.

 19) 「교사」, 1.

20) 교사」, 2-8.

21)*  Vergil, 「Aeneid」, ⅱ, 659.

22) 「교사」 , 29-36 

23)** 역주: 조금 전에 아데오다투스가 한 말은, “말하는 것”, 그리고 그것(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묻는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것” 이 두 가지만 신호 없이 보여줄 수 있는 두 가지 예외라고 한 것이었음.

 

24)* 이 책에 번역되어 있지 않은 27-28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물에 대한 지식은 항상 그것을 나타내는 신호에 대한 지식보다 더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대상을 나타내는 신호가 그 나타내어지는 대상보다도 더 훌륭한 경우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예는 “더러움”과 “악덕”, 두 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