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 그렇다면, 좀 말해 보게나. 자네는 “기억”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이름 뿐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에보: 설마, 누가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아우: 자네는 기억이 영혼에 속한다고 보는가, 신체에 속한다고 보는가?
에보: 그런 질문은 바보 같네. 생명이 없는 신체가 혼자서 무엇인가를 기억한다고 상상하거나 그렇게 이해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우: 자네, 밀라노 市를 기억하겠지?
에보: 물론, 기억하지.
아우: 그래, 그 말을 들은 지금, 자네는 밀라노시의 크기와 모양을 기억하는가?
에보: 틀림없이 기억하고 말고. 내게 그 기억보다 더 생생하고 완전한 기억도 없을 거야.
아우: 그러니까, 자네는 지금 그것을 눈으로 보고 있지 않으니까 마음으로 보고 있는 것이지?
에보: 그렇지.
아우: 자네는 밀라노 시가 지금 여기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지도 기억한다고 생각하겠지?
에보: 그것도 기억하지.
아무: 그렇다면, 자네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진 그 공간의 크기들까지 마음 속으로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에보: 그렇지.
아우: 그렇다면, 자네의 영혼은 지금 여기, 자네의 신체가 있는 이 곳에 있어서 그 신체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자네가 앞서 주장한 것과 같이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거지?
에보: 기억에 의해서라고 나는 생각하네. 내 영혼은 실제로 그 곳에 가 있지 않으니까.
아우: 그렇다면, 그 곳의 영상들이 그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이지.
에보: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나는 지금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는 모르고 있으니까. 내 마음이 그 곳까지 확장되어 나가서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 있다면, 나는 알 수 있을 테지.
아우: 자네 말이 옳은 것 같아. 그렇지만, 그 영상이라는 것들도 물리적 대상들이라는 건 의심할 수가 없지 않은가?
에보: 그럴 수밖에 없네. 도시나 땅 같은 것이 모두 물리적 대상들이니까.
아우: 자네는 조그만 거울이나 다른 사람의 눈동자 속에 자네의 얼굴이 비친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에보: 자주 보았지.
아우: 왜 그것들은 실제 모습보다 훨씬 작게 보이는가?
에보: 그 거울의 크기에 비례해서 그렇게 보였다는 대답 이외에, 어떤 설명을 자네는 바라는가?
아우: 물체의 영상은 그것이 비쳐진 대상이 작으면 작게 보인다는 것이지.
에보: 정말, 그렇고 말고.
아우: 그렇다면, 영혼은 신체라는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데, 예컨대, 도시라든가 넓은 구역의 공간,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만큼의 거대한 물체들의 거대한 영상들을 어떻게 그 속에 다 비출 수 있다는 것인가? 나는 자네가 우리의 기억 속에 즉, 우리 영혼 속에 담겨진 대상들의 그 거대한 크기와 수에 대해서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는 말일세. 우리는 앞에서 영혼이 우리 신체의 크기와 같은 크기라는 쪽으로 기울였었는데, 그런 것들을 다 그 속에 담을 수 있으려면 영혼은 얼마나 깊고 크고 넓어야 할 것인가, 이런 말이지!.
에보: 나는 거기에 대해서 할 말이 없네. 정말, 내가 얼마나 헷갈렸는지 말로 설명하지도 못하겠네. 영혼의 크기가 신체의 크기를 넘지 못한다고 섣부른 결론을 내렸던 나 자신이 우습기만 하네.
아우: 자네는 영혼이 바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나?
에보: 아니라네. 공기가 움직이는 것을 바람이라고 하지. 그것이 이 지구 전체를 채울 수 있다는 생각을 나도 할 수 있다네. 사실 바람과 비슷한 성질과 크기를 가진 다른 공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얼마든지 상상해 볼 수 있네. 그렇지만, 그 많은 영상들을 담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영혼 이외에 어떤 공간도 있지 않을 것 같아.
아우: 그래서 내가 전에도 말한 것처럼, 자네가 正義에 대해 동의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도 깊이, 넓이, 높이라는 것이 없다고 믿는 것이 더 옳지 않나 생각해 보게.
에보: 영혼이 그 자체의 깊이, 넓이, 높이가 없으면서도 어떻게 우주의 온갖 거대한 영상들을 그렇게 많이 그 속에 담을 수 있는가하는 것이 지금 하도 놀라워서, 당장 그 말에 동의하고 어쩌고 할 엄두조차 안 나네.
1)아우: 영혼의 미덕 중에서 善 만큼 완벽하게 균형이 잡힌 것은 없다네. 평면도형 중에서는 圓만큼 완전한 것이 없듯이 말일세. 원이 그렇다는 것은, 그것의 실제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균형성 때문에 다른 어떤 도형보다 우수하다고 하는 마당이니, 善이야말로 그런 점에서 얼마나 더 가치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게. 善은 물리적으로 다른 것보다 더 큰 延張을 가져서가 아니라, 이성을 바탕으로 한 그 균형과 조화가 영혼의 다른 어떤 특질보다도 뛰어나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이지. 예를 들면, 한 아이가 만족스러운 성장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아이가 선이라는 기준에서 성장하고 있다고 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안 그런가?
에보: 그건 분명하네.
아우: 그러니까, 영혼은 신체처럼 그 크기가 커지면서 성장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네. 우리가 함께 동의했던 것처럼, 아름답고 완전한 영혼이라는 것은 그 물리적 연장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역동적인 힘 때문에 선을 향해 나아가면서 성장하는 것이지. 영혼에 관한 한, “더 큰 것”과 “더 훌륭한 것”이 같지 않으며 (자네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나이가 듦에 따라 영혼이 성장하고 이성을 사용하는 능력이 커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크기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더 훌륭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네. 만약 사람의 四肢가 자라나는 것이 영혼이 성장하게 되는 원인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키가 크고 힘이 세어질수록 더 현명해져야 하네.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 분명하며, 나는 자네도 그에 동의할 것을 확신하네.
에보: 그야, 누가 부정할 수 있겠나? 그렇지만, 자네도 해가 갈수록 영혼이 성장한다는 데는 동의하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네만, 크기라는 것도 없는 영혼의 성장이 어째서, 그 사지의 성장과는 무관하면서도 시간이 흐른다는 것에는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네....
2)에보디우스: 내가 늘 관심을 가져 온 것들에 대해 이제 다 검토해 본 셈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잘 기억하지 못해서 몇 가지 포인트를 놓친 것이 있을 것 같네. 아무튼, 지금 막 떠오른 생각인데, 어린 아이들이 처음에는 말을 할 줄 모르다가, 점점 자라나면서 어떻게 말을 할 줄 알게 되는지, 그 문제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세.
아우구스티누스: 그 대답은 간단하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난 곳의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자네는 알겠지.
에보: 그건 누구나 알지.
아우: 그렇다면, 말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몸짓으로 자기의 생각을 다 표현하는 곳에서 태어나서 그 곳에서 자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에보: 불가능한 사태에 대해서는 질문을 하지 않아 주면 좋겠네. 내가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나 그 사람들이 키우는 자식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겠나?
아우: 자네는 그러면, 밀라노에 살고 있는, 인물이 잘 생기고 매너도 훌륭한데, 말을 하지 못하고 귀도 들리지 않아서 몸짓으로밖에 의사가 통하지 않는 그 청년을 본 적이 없는 모양이지. 그 젊은이는 매우 유명하다네. 나는 또 시골에 살고 있는, 말도 잘 하고, 역시 말을 할 수 있는 부인과의 사이에,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너 댓 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 한 남자도 알고 있네. 그 아이들 중에는 사내아이도 있고 여자아이도 있었는데, 모두 말을 하지 못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 신호도 이해하지 못하던 것으로 봐서, 귀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었지.
에보: 그래, 나도 그 젊은이를 잘 알고 있고, 그 시골 납자에 대한 이야기도 이해하겠네. 그런데, 자네는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가?
아우: 자네가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태어난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없다고 했으니까 그러지.
에보: 그 말은 다시 해도 마찬가지일세. 내가 자네 말을 바로 알아들은 거라면, 자네는 그 아이들이 말을 할 수 있는 부모 밑에서 자라났다고 했지..
아우: 그랬지.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제 우리 둘이 다 인정하는 모양이니, 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는 거지. 두 사람이 다 귀도 안들리고 말도 못하는 부부가 함께 어떤 황무지에 격리되어 살고 있으면서, 귀로 들을 수는 있는 자식을 낳았다고 하면, 그 어린 아이는 어떤 방법으로 부모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일세.
에보: 그 부모가 그 아이에게 하듯이, 그 아이는 오로지 부모에게 몸짓으로만 신호를 보내야 되겠지. 그렇지만, 갓난 아기는 그것마저도 할 수 없을 테니까, 내가 한 말은 그대로 유효하네. 그 아이가 자라나면서 말하기와 몸짓하기 중에 어느 것을 배우는가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어느 것이나 다 영혼의 작용이며, 영혼은 양적으로 성장하는 그런 것은 아니라는데 동의한다면 말이지.
1) 「영혼의 위대성」, 27-28.
2)「영혼의 위대성」 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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