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영혼의 고난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으며,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게 될 때까지 평안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참회록」, ⅰ, 1.) 이 章은 대부분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에서 발췌되었으며, 그가 유아기에서부터 기독교에 귀의한 시기까지 학생을 거쳐 교사로 성장해 나가는 동안에 직접 겪었던 경험들을 적은 것이다. 이 글들은 학습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의 기본교육원리의 예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으며, 결국, 고통 속에서 계속되었던 그의 自己省察을 기록해 놓은 것이라 할 것이다. 그에 의하면, 진리는 오로지, 신의 은총을 받은 한 인간의 열성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교사 개인으로부터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이 章, 「참회록」은 따라서, 제2인칭으로 대상화되는 神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형식을 취한다.
유아기와 소년시절
1)저는 유아시절에, 젖을 빠는 방법, 기분 좋을 때에는 편안히 누워 있고 몸이 불편할 때에는 우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자면서도 웃고, 나중에는 낮에 깨어 있을 때에도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랬다는 것은 나중에 들은 이야기도 있었지만, 나중에 다른 아이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서 저도 그랬었다는 것을 믿게 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것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점차로 제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게 되었고, 저의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표현할 수도 있게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저의 욕구는 제 마음 속에 있고, 그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항상 제 바깥에 있어서 제 마음 속으로 들어올 수 없는 이상, 어떻게 해도 저의 욕구는 결코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팔다리를 내젓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려고 애썼지만, 그래 보았자, 그것은 제 욕구를 제대로 표현해내지도 못하는, 겨우 몇 안되는 보잘 것 없는 몸짓으로 끝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그것이 저에게 해로운 것이어서 그랬는지, 하여튼, 어른들은 제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았으며 저는 그럴 때마다, 그들이 제 노예가 되어 주지는 않고 오히려 자기들 마음대로 하고 있다는데 데 대해,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에게 앙탈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더 자라나면서, 저도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어린 아이들은 다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을저도 알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관찰함으로써,보모들이 제가 어릴 때 행동이 어떠했는지를 말해 준 것보다 더 잘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2)저는 유아기에서 소년기로 넘어갔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소년기가 닥쳐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유아기가 저에게서 완전히 떠나 버린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아니면, 그것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이었을까요? 어쨌든, 저에게서 이제 그것이 안 보였습니다. 이제 말을 할 줄 모르는 어린 아기가 아닌, 말을 할 줄 아는 소년이 된 것입니다. 그 때를 기억할 수 있으며 그 후에 말을 어떻게 배워 나갔던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그 뒤 저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었을 때처럼, 조직적인 교수방법으로 말하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온갖 소리를 내면서 팔다리를 휘저어 제 마음 속의 느낌을 표현하고 제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을 알리고 싶은 그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다 알릴 수 있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제게 준 마음의 능력으로, 제가 들은 적이 있는 소리들을 기억해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이 말하려고 소리를 내면서 자기 몸을 한 쪽으로 돌리는 것은, 그들이 저의 주의를 그 쪽으로 끌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고 그 때, 그들이 내고 있는 바로 그 소리로 그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그들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임을, 그들의 얼굴표정, 눈짓, 팔다리 동작 등,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자연언어를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자연언어는 저희들이 어떤 것을 찾아냈을 때, 차지했을 때, 집어던질 때, 또는 그것을 마주 대할 때의 저희들의 느낌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온갖 상황에서 적절하게 쓰여진 같은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듣다 보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차차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소리를 내려고 입을 움직여 보았고, 제가 바라는 것을 표현하는 데 그 소리를 써 보았습니다. 누구든지 저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자연언어들과 함께 그런 소리들을 내면서 저의 의도를 전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직은 보모의 그늘 아래 있는 상태였지만, 여러 어른들의 지시대로 움직여 가고 있는 사이에 인간생활이라고 하는 이 풍진 세상 속으로 저도 깊숙이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오, 하나님, 저는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비극과 허튼 짓들을 겪어 봤는지 모릅니다. 무릇,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행실이 바르고 말솜씨도 남을 능가해야만, 이 세상에서 명예를 얻고 삿된 재물들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불쌍하게도, 저는 그런 것들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갔으면서도, 도대체 왜 그런 것을 배워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배우는 속도가 느려지고 매를 맞게 되었습니다. 체벌은 조상 대대로 정당화되어 온 것이었고, 그것을 해온 사람들에 의해 저희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비극을 계속해 왔으니, 날이 갈수록 이 아담의 후예들은 더욱 큰 슬픔과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그러나 저희들은 당신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 때문에, 저희들 눈에는 보이시지 않으나 저희의 말을 들어주시고 도와주시는 당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나름대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저 역시 소년시절부터 구원자이자 안식처이신 당신에게 기도를 해 온 사람입니다. 어린 저는, 제발 학교에서 매맞지 않게 해 달라고 온 정성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당신이 저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아 회초리 자국이 난 채로 집에 돌아올 때마다, 그것은 제게 무겁고 지독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아니, 평소에 제가 어디에서 조금이라도 다쳐서 오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던 저의 부모님까지도, 저를 놀려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세상에 어떤 영혼이 있어, 세상 만사에 대한 애착을 모두 끊고(그 결과는 다 같이 헛된 것이기 때문에), 당신에게만 마음 바칠 수 있을 만큼 존귀할 수 있으며, 온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애써 기도하는 고통의 질곡들을 그렇게 쉽게 웃어넘길 수 있겠습니까?
그처럼 쓰디쓴 고난의 공포 속에 갇힌 사람들에 대해, 마치 어린 시절 저희들이 선생님들의 손에서 겪던 고통들을 부모님들이 웃어 넘겼던 그 때처럼, 그렇게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이 정말로 있는 것입니까? 선생님의 벌을 받지 않게 해 주시기를 누구 못지 않은 고통과 공포 속에서 기도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희는 그 때 일기쓰기나 생각하기 같은 그 때의 숙제들을 실제로 해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기도만 하고 있는, 그런 잘못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저희들의 기억력이나 재능이 모자랐던 탓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저희들 나이에 해당하는 저마다의 능력들을 나누어 주셨으니까요. 저희는 그저 노는 데만 빠져 있었고, 그 때문에, 저희들의 놀이와 별 다를 것도 없는 놀이에 역시 빠져 있었던, 어른들로부터 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닌 어른들의 놀이에는 사업이라고 하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 놓으면서, 아이들의 놀이에는, 알고 보면 그와 다를 것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벌을 주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어린이들에게나 어른들에게나, 어느 쪽에도 저는 동정심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판단이 있는 사람이라면, 제가 그 때 그나마 공놀이에라도 그렇게 열중했던 덕분으로, 나중에 그보다 더 가증스러운 어른들의 놀이를 하기 위한 글공부라는 것을 좀더 미리 하지 않아도 된 셈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어른들이 동료들과의 논쟁에서 졌을 때, 제가 어릴 때 공놀이를 하다가 저를 때린 친구에게 화가 났던 것보다 더 심하게 화가 나고 샘이 난다면, 그들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3)소년시절의 저는 유아시절보다 공포심은 덜해졌지만, 여전히, 시키지 않으면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善行도 역시, 자발적이 아니라, 억지로 하는 것만 배웠습니다. 누구든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면 잘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저더러 억지로 공부하게 한 그들도 잘 해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 善은 오직 당신에게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실은 빈곤이자 치욕에 불과한 부귀와 명예라는 것을 향해, 끝없는 욕망을 추구해야 된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들이 억지로 가르쳐 준 것들을 제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여, 저희들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알고 계시는 당신은, 그들의 그러한 실수를 저에게 유익한 공부가 되도록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제 자신의 잘못은 저를 벌하시는 데에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게 어린 소년이었지만 또한 큰 죄인이었던 저에게 그 벌은 매우 적절한 벌이었습니다. 당신은 善을 행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빼앗아 저에게 주시면서, 제가 저지르고 있는 죄악에 대해서는 그에 응당한 벌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이셨으며, 세상 또한 그런 것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다스려지지 못한 영혼은 그 자체로서 벌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제가 소년기에 희랍문학을 왜 그렇게 싫어했던가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등학교에서 배웠던 라틴문학은 제가 매우 좋아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교사에게는 읽기, 쓰기, 셈하기를 배웠는데, 그것은 정말, 그 당시 배웠던 희랍문법 못지 않게, 그야말로 지루하고 견디기 힘든 형벌이었습니다. 그것 역시, 저의 죄악과 허영심 때문이었고, 제가 육체를 가진, “한 번 지나갈 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바람”(시편, 77, 39)이었기 때문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그나마, 초등교육의 효과가 더 뚜렷했다는 점만은 확실합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저는 눈에 띄는 글씨는 모두 다 읽을 수 있었고, 쓰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쓸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후의 중등학교 교육부터는, 말하자면, 그와는 대조적으로, 아네이드(Aeneas)4)**의 유랑시를 강제로 외우게는 되엇지만, 제 자신의 유랑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그런 것이었습니다.5)* 사랑을 위해서 자살하는 디도(Dido)6)**를 위해 우는 것을 배웠으면서도, 오, 하나님, 불쌍하게도, 제 생명이신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와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제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도 않은 채로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 하나님, 제 인생이야말로...
7)소년시절에 좀더 유익한 일에 애정을 쏟지 못하고 그런 헛된 공부에 쏟았던 것은 정말 잘못이었습니다. 저는 진실로 그런 헛된 공부를 싫어하고 유익한 공부를 하기 원했습니다. 저에게는, 1+1=2, 2+2=4, 이런 것이 정말로 지긋지긋한 노래로 여겨졌습니다. 반면에, 병사들로 가득 태운 목마, 화염에 휩싸인 트로이, 그리고 크로이사(Creusa)8)**의 유령들이 나타나는 광경, 이런 것들을 저는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희랍문학도 역시, 대부분이 그런 비슷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데도 저는 왜 그렇게 그것을 싫었을까요? 호우머만 해도, 그런 종류의 이야기들을 꾸며내는 데는 비상한 솜씨가 있었으며 환상적인 비현실성을 타고 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는데, 저는 그 사람이 싫었습니다. 희랍의 소년들에게는 아마, 버어질(Vergil)9)**이, 저한테 호오머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외국어를 완전하게 마스터해야 한다는 부담에 눌려서, 희랍문학이 가지고 있는 매력까지도 그 독소들에 섞여서 뒤범벅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희랍어를 하나도 모르고 있다가, 그 야만적인 협박과 체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배우도록 강요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라틴어에 관한 한, 제가 어렸을 적에는 원래 한마디도 할 줄 몰랐던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전혀 아무런 공포심이나 고통이 없이 그것을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오직, 어린 저를 얼러주는 보모들의 말소리와 웃으면서 농담하는 주위 사람들이 하는 말소리, 함께 놀아주는 사람들의 즐거운 유머들을 귀기울여 듣는 동안에 그것을 배운 것입니다. 주위에서 벌을 주면서 저에게 압박을 가하는 사람이 없는 자유로운 가운데서 저는 모국어를 배운 것이며, 그것은 제 마음 속에서 제 자신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교사가 아닌, 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를 들음으로써 말을 배우도록 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또한 제 마음 속의 느낌들을 그들의 귀에 들려 줄 수 있게도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공포 분위기의 강압보다도 더 큰 학습효과가 있는 것은 자유로운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강압은 결국, 당신이 정하신 법칙 그대로, 무절제한 호기심의 발동을 억제하기도 합니다. 교사들의 敎鞭에서부터 순교자의 고난에 이르기까지의 온갖 종류의 고통들이 저희들로 하여금 다시 당신 앞으로 나아가도록, 애초에 저희들의 영혼을 파괴하여 당신에게서 등을 돌리게 했던 저 쾌락들을 이제 버릴 수 있는 힘이 생기도록, 쓰디쓴 신약이 되어 줄 수도 있습니다.
10)한참 많이 먹어댈 나이였을 때, 저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플 때나 좋아하는 장난감을 저에게 판 친구에게 그 값으로 무엇인가를 갖다주기 위해서, 집의 창고나 부모님의 책상서랍에서 물건을 훔쳐내기도 하였습니다. 친구들과 놀이를 할 때에도, 저는 제가 꼭 이겨야 한다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서, 속임수를 써서라도 이겨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지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우선 속임수를 써 보려고 애를 썼으면서도, 어쩌다 다른 아이들이 저에게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저는 다른 어떤 때보다도 더 맹렬하게 그것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다가 제 자신의 속임수가 발각이 나면, 저는 그것을 인정하기보다는 화를 버럭 내는 것이 일쑤였습니다.
이런 것을 소년시절의 천진난만함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여, 그렇지 않습니다. 오, 하나님,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어른이 되어 가면서, 이제 모든 행동이 가정교사와 학교선생님들의 회초리로부터 벗어나서 제독과 제왕들의 감독 밑으로 들어가고 벌이 더욱 혹독해져 갔을 즈음에는, 저희는 이제 호도나 공을 차지한다든가, 참새를 잡는다든가 하는 그런 것에서 관심이 머무르지 않고, 황금과 재물, 그리고 노예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그런 것으로 관심이 변해 갔습니다. 그러니까, 오, 왕이신 주여, 당신께서 “천국이 바로 어린아이들과 같은 것이니라”(마태, 19장 14절)라고 하셨던 것만 해도, 당신은 저희들, 어린이이들에게서 겸양의 미덕을 보고 계셨는데 말입니다.
그러하오나, 주여, 만약 당신이 저를 소년기까지밖에 살지 못하게 하셨더라도, 저는 가장 위대하고 선하시며, 우주의 창조주이자 지배자이시며, 우리들의 아버지이신 당신에게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저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저의 존재를 이 세상에 있게 한 저 신비의 힘이 제게 닿았던 흔적이었습니다. 저는 제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 힘을 감지하였으며, 그렇기에, 하잘 데 없는 일들 속에 묻혀 있거나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에도, 저는 진리 가운데에서 기쁨을 얻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 잘못된 길로 인도되는 것을 싫어하였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말하는 법을 배우고, 친구들과의 사귐을 좋아하고, 고통이나 야비함, 그리고 무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항상 노력하였습니다.
1) 「참회록」, I, 6. 2) 「참회록」, ⅰ, 8-9 3) 「참회록」, ⅰ, 12. 4)**역주 5)* "first teacher"(primus magister)는 초등학교교사였으며, ludi magister 또는 litterator라고 하기도 하고, “the teacher of letter"라고도 하였다. "grammarian"(grammaticus)는 중등학교교사, "rhetorician"(rhetor)은 고등교육을 맡은 교사였다. 6) **역주 7) 「참회록」, ⅰ, 13-14 8)**역주 9) **역주 10) 「참회록」, ⅰ, 19-20
사춘기, 또래 악동시절
11)사춘기 시절, 저는 말썽이나 실컷 좀 부려보고 싶다는, 천방지축으로 끓어오르는 그런 욕망을 즐기곤 하였습니다. 저의 “미덕은 다 탕진되어서”(시편 38: 12), 당신의 눈앞에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것을 끝없이 즐기고 싶었으며, 또래 아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데만 관심을 썼습니다.
저에게 소중한 것은 단지,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뿐이었습니다. 저는 빛나는 우정의 자락에서 마음과 마음이 만나도록 해주는 절제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도무지 알 재간이 없었습니다. 오직 육체의 질탕한 욕망과 뜨겁게 끓어오르는 사춘기의 열정에만 휩싸여서, 제 가슴 속에 피어 오른 안개의 저 바깥쪽에 밝은 사랑의 빛이 비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과 욕망이 제 마음 속에서 함께 소용돌이치다가 나약한 젊음을 뚫고 나와서, 울퉁불퉁한 욕망의 끄트머리까지 저를 밀어붙여서 악의에 가득 찬 죄악의 소용돌이 속으로 저를 던져 넣어 버렸습니다. 당신의 노여움은 나날이 더해 가고 있는데도, 저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절그럭거리는 육신의 쇠사슬에 패퇴 당하고, 제 영혼의 마지막 자부심까지 천벌을 받았습니다. 저는 점점 더 당신으로부터 멀어져 갔고, 당신은 제가 멀어져 가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완전히 내던져지고 쏟아내어져서, 방탕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당신은 제게 아직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저의 기쁨이신 당신께서는, 그렇게, 너무도 늦게, 저에게로 오셨던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침묵뿐이셨으며, 저는 아직도 자만심 어린 우울과 들뜬 권태 속에서, 당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와서, 슬픔 외에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이 뻔한 씨앗을 조금이라도 더 뿌려 보겠다고,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습니다. 12)저 16세의 육욕의 시절, 욕정의 광기에 휘둘려 완전히 항복해버렸을 때, 수치심을 모르는 저희 인간들로부터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당신의 법으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던 저는, 도대체, 당신의 집으로부터 얼마나 먼 곳까지 도망쳐 나와 방황했던 것일까요? 저의 가족들은 제가 그렇게 곤두박질쳐 들어가고 있는 파멸로부터 저를 구원해내기 위해 하다 못해, 결혼 같은 것이라도 염두에 두는 대신, 오로지, 제가 훌륭한 웅변을 하루 빨리 배워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을 갖추도록, 저의 혓바닥을 훈련시킬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공부는 중단되고 있었습니다. 문법과 수사학을 배우기 위해 가까운 마두라13)*로 가기는 했지만, 더 먼 곳, 카르타고까지 여행할 돈을 모으기 위해 되돌아오고 말았던 것입니다.
저의 부친은 타가스티에서 겨우 조그만 재산을 가진 소시민이었으니, 제가 거기까지라도 가게 된 것은 그의 재력 덕분이었다기보다는, 그의 결심이 그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하고 있을까요? 하나님, 그것은 당신에게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당신 앞에서, 저와 같은 모든 인간에게, 아니, 저의 글을 읽게 되는 몇 사람에게라도, 저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요? 진실로, 그것은 저 자신이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저희들의 울음이 얼마만큼. 깊어져야 그 소리가 당신에게 다다를 수 있게 되는지를 깨닫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참회하면서 신앙을 바탕으로 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당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지 않습니까?
그 당시, 저의 부친은 모든 사람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는 훨씬 더 부유한 사람들조차 엄두를 내지 못했던, 얼마 되지도 않는 자신의 재산을 줄여서까지, 아들이 공부를 위해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데 필요한 돈을 대어 주는 일을 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제가 당신에게로 얼마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지, 저의 인생의 순수성이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는지, 오히려, 당신의 가르침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나가버린 것은 아닌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저의 웅변이 얼마나 나아지고 있는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의 들판, 저의 마음의 밭을 갈아 주시는, 유일하고 진실로 선한 주인이신 당신의 가르침으로부터 저는 멀어져 가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제 나이 열 여섯 살이 되었을 무렵, 저의 가족에게 닥친 가난은, 차라리 저에게는, 학교라는 곳으로부터의 완전한 방학을 즐길 수 있도록, 부모님 곁에서 나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당시, 제 욕망의 가시덤불은 한창 뻗어나가서 제 머리 꼭대기까지 덮고 있었으며, 그것을 걷어내어 줄 어떤 사람의 손도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14)악덕이라는 것보다 더 철저하게 저주받아 마땅한 것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회피해 보려는 욕망에서, 저는 더욱 더 완전한 악덕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그러나, 저에게는 범죄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그 당시 내던져지다시피 키워졌던 다른 또래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제가 하지도 않은 일을 제가 했다고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순진하게만 보이면 더 깔보일 것 같았고, 그럴수록 더 쓸모 없는 녀석으로 취급당할 것 같았습니다 바빌론15)*의 거리를, 마치 시나몬 가루에 연고를 뒤범벅해 놓은 듯했던 진흙탕 속을 허우적거리고 돌아다녔던 그 악동들의 마음은 다 그랬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저를 엄습해 와서 그 도시의 한 가운데로 자꾸만 끌고 들어갔습니다. 그 적은 유혹 앞에 무방비하게 열려 있는 인간들을 거리로 끌어내고 있었습니다.
16)주여, 당신의 법은 틀림없이, 도둑을 벌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법은 인간들의 마음 속에 속속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어서, 어떠한 악행도 그것을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도둑이라도, 다른 도둑이 자기의 것을 훔쳐간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훔치는 도둑이 부유해서, 그로부터 가난이라는 것을 몽땅 훔쳐간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일부러 도둑질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물질적인 가난 때문에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제가 궁지에 몰렸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정의감이 부족했거나 진실을 외면하려 했기 때문이었으며, 제 영혼이 죄악으로 넘쳐 흘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게 아쉽지도 않았던 물건을 훔쳤으며, 사실 제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들이 훔친 것들보다 훨씬 나았었습니다. 저는 훔친 물건 그 자체를 즐긴 것이 아니라, 훔치는 행위 그 자에와 범죄라는 것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희 집 포도밭 가까이에는 별로 볼품 없고 맛도 없는 열매가 가득 매달린 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못된 버릇대로, 밤늦게까지 길거리에서 놀고 있던 악동들은 그것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실제로, 그저 맛이나 볼 뿐, 먹지도 않았습니다― 돼지들한테 던져버리기 위해서, 그 배들을 한 무더기씩 따내곤 했습니다. 그런 짓들은 금지된 행동이라는 것, 그것 때문에 저희들은 더 재미있어 했습니다. 오, 하나님, 저의 마음은 그런 상태였으며,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가엽게 여기셨던, 깊은 지옥의 구렁텅이 속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왜 아무 이유 없이, 그야말로 죄를 저지른다는 것 그 자체 이외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죄를 저지르고 다녔던 것인지 그 이유를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비열한 짓인 줄 알면서도, 저는 그것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제가 사랑했던 그 물건들 때문이 아니라, 제 자신의 파멸과 타락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 영혼은 부패하여 당신과 함께 하던 그 안식으로부터 달아나 나와서, 자기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오로지 수치심에서, 수치심 그 자체만을 추구하면서 말입니다.
17)오, 가련한 내 모습, 열 여섯 살 적의 그 도둑질,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였단 말인가? 네가 도둑질인 이상, 사랑스러울 리가 없을 텐데, 너에게 말을 건네고 싶을 만한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 하기는, 그 과일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만물의 창조주, 선한 하나님, 최상의 진리이신 당신이 만드셨던 그 배들만큼은, 아름다웠던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보다 더 좋은 것들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물건들은 결코 불쌍한 제 영혼이 갖고 싶어 했던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훔치는 즉시 도로 내던져버리면서, 훔친다는 것 그 자체만을, 자신의 범죄욕구 자체만을 충족시키면서 희열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그 배들 중에서 제 입으로 들어간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단지 저의 그런 짓거리에 양념을 더 치겠다는 범죄욕 때문이었습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진실로 아름다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던 도둑질의 그 무엇이 제게 그토록 기쁨을 주었던지 저는 알고 싶습니다. 그 도둑질에는 정의로움과 분별심에 들어있는 아름다움, 인간의 마음과 기억들에 들어있는 아름다움, 인간적인 감성, 심지어, 동물적인 생명이 가진 그런 아름다움조차도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늘을 운행하고 있는 별들을 그토록 사랑스럽게 빛나게 해주는 아름다움, 천국의 아름다움, 사라져 가는 생명에 또 다른 생명으로 그 대를 이어가는, 저 바다와 육지에 충만한 생명들의 아름다움, 그런 어떤 아름다움도 거기에는 없습니다. 인간을 방황으로 인도하는 저 죄악들이 그나마 내세울 만한, 불완전한 가짜 아름다움조차도, 그 속에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18)그렇다면, 지금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그런 짓거리들―아, 불쌍한 그 모습!―에서, 도대체, 저는 무엇을 얻었으며, 특히, 훔친다는 것 그 자체밖에 아무 것도 사랑할 것이 없었던 그 도둑질에서, 저는 무엇을 취했습니까? 도둑질이라는 것 자체도 허무한 것이었지만, 도둑질의 결과 역시, 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하기는, 당시의 제 마음상태를 돌이켜 볼 때, 저는 배를 훔치겠다는 그런 생각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확실히, 그런 일을 저 혼자서는 하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는 다른 무엇, 말하자면, 도둑질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그 친구들과 어울린다는 것, 그것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도둑질 이외의 다른 이득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지요, 그렇게 어울린다는 것 역시, 허무한 것이었으므로, 결국,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맞을까? ‘내 마음 속을 비추면서 그 어둡고 그늘진 곳을 다 뒤집어 보실 수 있는 그 분 이외에, 누가 그 답을 내게 줄 수 있겠는가?’ 제 마음이 지금 이렇게, 묻고 토론하고 생각해보고 싶어하는, 그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당시, 그 배를 제가 좋아하고 그것을 즐기고자 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면, 저는 혼자서도 그 행동을 할 수 있었어야 합니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제 욕망에 불을 당기려고 그렇게 애쓰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어야 합니다. 제 기쁨은, 그 배가 아닌, 악행 자체에 있었기 때문에, 저와 똑같은 악행을 함께 하고 다니는 아이들과 어울려야만 그것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습니까? 저는 분명히, 너무나도 수치스러웠습니다. 제가 그런 수치를 겪었다는 것이 너무도 비통합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 속으로 느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악행을 이해하는 사람 여기 누구 있습니까?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가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 그런 일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속여먹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뻐서, 저희들은 마치, 심장에 간지럼을 탄 사람들처럼 저희들끼리 킬킬대며 웃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그 짓을 혼자서는 못하면서, 그런 기쁨을 느꼈을까요? 누구나 혼자 있을 때에는 웃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었습니까? 정말, 누구나 쉽게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 때로는 혼자 가만히 있을 때도 웃음이 덮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우스꽝스러운 어떤 일이 감각이나 마음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일만은, 혼자서 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일은 제게 도대체 불가능했습니다.
오, 하나님, 여기 당신 앞에서, 제 영혼의 생생한 기억을 더듬어낼 것입니다. 저는 그 도둑질을 혼자서 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기쁨은 제가 훔친 물건에 있지 않고, 제가 그것을 훔쳤다는, 단지, 그 사실에 있었습니다. 분명히 저는 그것을 혼자서 하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아아, 가장 우정이 모자랐던 그런 우정,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의 유혹, 순전히 장난과 재미 때문에 남을 해치는 탐욕스러운 욕망,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따라오지도 않고, 복수하겠다는 동기조차도 가지지 않았는데도 남에게 손해를 입히려고 하는 그 욕망! 누군가가 “자, 가자구!” 하는 소리만 질러대면, 저희들은 수치를 모르는 사람으로 돌변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결코 부끄러워 할 줄 몰랐습니다.
19)카르타고로 온 후부터는 수치스러운 사랑의 마음이 끓어오르면서 제 욕망은 아우성을 쳤습니다. 아직 누구를 사랑하게 된 것도 아니면서, 저는 사랑한다는 것 자체를 사랑하였습니다. 제 마음 속 어디엔가에 사랑이 숨어 있을 법한데도 그것이 결핍되어 있는 것 같아서, 저는 그런 저 자신을 싫어했습니다. 저는 사랑이라는 것을 사랑하였기에, 유혹에 빠질 염려가 없는 안정된 삶의 길이라는 것을 증오하면서, 끝없이 무엇인가 사랑할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 속 깊은 곳은, 하나님, 바로 당신의 진리이신, 내면의 양식이 부족하여 속이 텅텅 비어 있는데도, 저는 배고픔조차 느낄 줄 몰랐습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양식에 대한 그런 욕구가 제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양식에 대한 갈구를 완전히 외면한 채, 오히려 그 공복이 심해질수록, 그런 양식 같은 것은 제게 더욱 맛이 없는 것으로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병들고 비참한 상태인데도, 제 영혼은 그 따가운 피부를 드러낸 채로 모든 감각 있는 것들에다 비비대면서, 자신을 긁어대고 싶은 욕망에 가득 차서 언제나 툭 불거져 나와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한 감각적 대상들은 도처에 있었습니다.
사실, 그런 것들 속에도 영혼이 들어있지 않았다면, 그것들이 제게서 어떤 사랑도 불러 일으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사랑을 주고 받는다는 것은 순수한 아름다움이라고 여겼으며, 더구나, 제게 사랑을 주는 어떤 사람의 육체를 향유할 수 있게만 된다면 그것은 더욱 더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너저분한 욕정으로 우정의 샘물을 오염시켰으며, 무법천지의 지옥 같은 욕망으로 그 맑은 물을 구름으로 뒤덮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수치스럽고 볼썽사나운 그 모습에 허영심을 더하여, 멋드러지고 세련된 외모를 동경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게다가, 스스로 그 속에 갇히게 되기를 바라면서, 사랑이라는 것에 덩신없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오, 자비로우신 하나님, 당신의 善을 이루기 위하여, 당신은 그 모든 단맛 속에 얼마나 많은 쓴맛을 섞어서 뿌려 놓으셨습니까! 저는 결국, 사랑을 받았으며, 노예와도 같은 결박의 순간까지 맞이하였습니다. 이제 저는 기쁨에 가득 차서 고난의 쇠사슬에 묶여가면서, 질투, 의심, 공포, 성화, 그리고 싸움질까지, 말하자면 불타는 쇠막대기로 스스로 두들겨 맞는 그런 지경까지도 마다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자업자득인 불행으로 가득 찬, 불길 속에 스스로 기름을 쏟아 넣는 형국인 그 광대극에 넋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은 겪고 싶지 않은 비애와 비극적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거기에서 슬픔을 느끼기를 좋아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정말, 그런 연극에서 비애를 경험하고 싶어하고 또 거기에서 쾌감을 느낍니다. 이것은 정말 야비한 광기 같은 것으로, 그런 비애를 많이 느낄수록 그 때문에 더욱 감동을 받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 그것을 겪을 때에는 그것은 불행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공감(sympathy)을 함으로써 그것을 경험할 때에는 그것을 동정(pity)이라고 하지요.
무대 위에서 제시된 허구적 사건들을 보면서 일어나는 이 동정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관객은 어떤 다른 도움도 요구받지 않고 단지 자기의 슬픔만 보여 주면 됩니다. 그리고 그 배우가 그러한 묘사를 잘 해내었을 때에는, 관객으로부터 슬픔을 유발시킨 그 정도만큼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 비극적 사건이 실제로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든지 허구이든지 간에, 관객들이 감동하여 슬픔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연기를 훌륭하게 해 내지 못하면, 관객들은 싫증을 내면서 금방 극장을 떠나버리면서 비판을 합니다. 반대로, 관객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되면, 그들은 거기에 푹 빠져서 그것을 즐기면서 극장 안에 머무릅니다. 사람들은 그런 쾌락을 누리고 싶어서, 눈물과 슬픔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아무도 불행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동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 그것에서 기쁨을 찾는다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해도, 동정심은 슬픔과 떨어져서는 있을 수가 없으므로, 그것은 슬픔을 사랑하는 유일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어찌 되었거나, 그 당시 저는 비애를 사랑하였고, 저를 슬프게 만드는 일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무대 위에서만 상연되고 제 마음 속에 그려지기만 했던 것이었지만, 저의 눈물을 짜내는 배우의 솜씨가 좋으면 좋을수록, 더욱 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양떼들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헤매고 다니면서, 당신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몹쓸 병마로 인해 흉측하게 말라버린 저와 같은 불쌍한 양에게,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제가 슬픔을 사랑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슬픔으로 인해 너무 깊숙이 찔려버리는 것은.바라지 않았으며, 사실인즉,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무대 위에서 전개되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것이 저의 피부만 긁어주기를 바랐습니다. 제가 구경하고 있는 그 사건들로 인해 저까지 고통을 받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긁히기만 하는 것으로도, 저는 마치 쇠못으로라도 긁힌 것처럼 지독한 염증이 생기고 퉁퉁 붓고, 고름까지 줄줄 흘렸습니다. 제 인생은 하나님, 그것을 인생이라고 한다면, 고작 그런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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