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나, 여기 있소 / 自由하는 自有

해선녀 2004. 7. 16. 10:26

 

 

 

정말이지, 그리움이고 외로움이고, 슬픔이고 고통이고, 그런 것들이 이젠 지겨운 육자배기 흥타령 같고, 외롭다고 밥먹듯 소리치며 어허둥둥 떠내려 가는 거, 이젠 나도 다 그만 두고 싶을 때가 있다.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한 페이지만 넘어가면 내가 뭐라고 소리쳤던가, 내 스스로 다 잊어버리고 말 걸, 무엇하러 그렇게 끝도 없이 주절대고 궁시렁거리고 난리를 쳤는가, 한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럴 시간 있으면 밭에 나가 풀이나 뽑지....

 

그럴 때, 나는 이런 생각으로라도 내 마음을 돌려 본다. 그렇게 가없이 주절거리고 있는 순간엔 가물가물 수면 아래로 희미하던 내 의식이 봉긋하니,수면 위로 떠올라 오지 않았던가. 존재감, 그렇다, 잡념을 뽑아재끼듯 풀을 뽑아재낄 때의, 내 의식이 마알갛게 비워져 가는 느낌과는 반대로, 어떤 봉긋한 봉오리같은 자의식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것 같지 않던가. 그렇게 새삼스럽게 모두어진 나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혹은 잊어버리고 있었던 나를.

 

어느 시인은 너무 많이 설움과 입을 맞추어서 가을 햇볕에 타버린 거미등같이 되어버렸다고 했지만, 나는, 때로는 그것이 슬픔이어도, 그렇게 봉긋하니 만져지는 내 의식이 따뜻한 봄볕에 수면 위에 떠다니는 나무토막 위로 줄줄이 기어 올라와 엎드리고 있는 어린 거북이들의 등어리처럼 눈물나게 귀엽기도 하다..

 

슬픔은 나에게 무엇인가? 여기 이렇게 있소' 소리치며 다니는 인터넷 칼럼 쓰기를 이제  그만 두고 싶다는 소리로도 들린다. 그러나 그는 돋 다시 일어선다. 또 다른 자신을 만나러 떠난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나는 自由하는가, 自有하는가? 그 둘을 우선은, 존재함으로서  저절로 존재가 증명되는 것과, 증명을 위해서 존재함의 차이라고 하자, 보잘 것도 없는 자신의 有를 증명하기 위해 안달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기가 차마 애처럽다, 그 안깐힘, 남루한 깃발, 목이 쇠어가는 아우성이...어떤 때는 그래서 생각하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더 많아지는 자신이 부끄럽고, 또 어떤 때는 그래서 실종을 꿈꾸고,.. 

 

공책. 아무리 무엇이든 써 넣어도 여전히 빈 책, 空冊..

 

언젠가 샀던 nothing book이라는 제목의 공책을 지금도 가끔 들여다 본다.  서랍을 열다가 어쩌다 만날 때 외에는 문자 그대로 빈책, 그  공책에 나는 아무 것도 써 넣은 적이 없다.. 나는 게을렀다.  일기장을 덮은 지 오래. 있는 의식을 그냥 혼자 흐르게 내버려 두고 이렇게 글로 건져올리는 일을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최근에 와서, . 굳이 이렇게  칼럼까지 써올려서 타인들의 관심을 모으고 반응을 기다리게 된 건 정말, 무슨 연유에서일까?

 

아무리 써넣어도 빈 책, 공책...그런 칼럼을 써 놓고 나면 때로는 손님을 기다리는 가게 주인처럼 초조해지기도 했다. 손님들은 이 물건을 보고 무어라고 할까..그러나, 무엇보다도,.내가 진실로 두려운 것은 그렇게 존재를 드러내 놓고 있으면, 나는 정말 저 광대한 허무 속으로 사라져 가는 나를 끝까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군중 속으로 갑자기 사라진 내 아이를 잃듯이 나 자신을 그냥 잃어버리는 것이 두렵다. 아, 없다, 하면서 공책을 덮어버리듯 칼럼의 페이지를 넘겨 버릴 때처럼, 진실로 내가 그 사유의 우주 속으로 용해되어 無化되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바다에 버려진 쓰레기처럼, 저승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는 혼처럼 존재의 앙금으로 떠돌 것이. 그것은 내가 사라지는 이 아니라 상실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빼았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나를 달랜다. 내가 그렇게 안달하면서라도, 그렇게  존재했다는 것을 내가 우선 확인하고 손님들과 교신을 시도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깊어지고 뭉쳐지고 엷어지면서 비로소 원래의 내가 아닌 다른 어떤 나로 변화되어가는지, 더 큰 나 안으로 어떻게 녹아들어가는지를 보기 위함이다. 그것은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null)과 있는 것이 無化(nullify)된 것은 다르다. 무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있는 것, 有가 다른 有로 변화되는 것이다. 

 

스스로 변화되어 가는 自由는 언제나 어떤 自有로부터 시작된다. 아무 것도 없는 무, 진공에서 무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허공에서 꽃 한 송이 피지 않듯이.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증명하려고 하는 나 자신도 존재함 그 자체와 구별되지 않는다. 自由는 동사적이라면 自有는 상태적이다. 나는 그렇게 존재했고 거기에서부터 自由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거기에서부터가 아니라 그 안에서 自由한다. 누에가 고치를 뚫고 나가 나비가 되어도 누에의 바깥으로 나간 것은 아니다. 탈골쇄신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有를 완전히 벗어던질 수가 없다. 

 

누에의 상태나 나비의 상태는 그 자체로서 自由가 아니라 그렇게 변화해가는 그 동사적인 과정이 自由이다. 어떤 有의 상태에서든 나는  상태적인 나와 동사적인 나를 동시에 사랑한다..수많은 여행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남루한 형색으로 나, 여기 있소, 옷소매를 붙들며 소리치며 떠다니고 있을지언정. 차이가 있다면  오직, 自由하늕 自有와 自由하지 않는 自有이다. 그러면서도, 변한 나는 그 전의 나가 아니고 언제나 변하는 중의 나는 어디에고 머물지 않는다. '나 여기 있소' 하는 순간의 드러난 나는 이미 그냥 그렇게 있는 나와는 다르다.

 

존재는 물처럼 음악처럼 흐른다. 내가 나라고 하는 순간 나는 바다와 같은 나로부터 건져 올린 물 한 컵이다. 그것조차도 이미 내가 아니다. 흐르고 있으니까. 아니, 흐르는 것도 아니고 무변한 안개처럼 그렇게 거기 있다. 그러면서도,어디에고 없다. 그러므로 존재는 증명하려 한다고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존재할 분이다. 어떻게? 내가 드러내면 비로소 그렇게,.비로소 꽃처럼 피어난다. 어느 시인은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 내가 꽃이 된다고 했듯이, 내가 내 이름을 불러 비로소 내가 꽃이 되는 것이다.

 

오늘 아침 나는 저 연보라색의 꿈결 같은 썬빔(sun beam)꽃으로 피어난다. 어제 양평에서 돌아오는 길, 안개같은 빗속에서 문득 햇살 한 줄기처럼 '나, 여기 있소'하며 비치어 우리를 기쁘게 했던 야생화이다. 언제쯤일까, 내가 내 보잘 것 없는,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무엇인가, 잔뜩 씌어진 공책을 들여다 보며 미소하며, 어수룩하지만 내가 만나고 사랑했던 만큼의 많은 꽃들처럼 피고졌던 아름다운 내 존재에 감사하며, 비로소 무화하며,  nothing book이라는 제목을  다시 쓸 수 있을 날은? 

 

 

 

 

나그네새님의 칼럼 글에서의 自有라는 용어 참조 바람

 

묘사, 여기까지 온 여행에 대하여/ 

나그네새, 달빛으로 삽화쓰다/ 나그네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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