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의 참회록
살면서 괜히 아주 사소한 것에 예민해질 때가 있다. 그러고 나면 자신에 대해 한심해진다. 부끄러움이다. 예컨대, 남들이 내 눈이 어느 정도로 어떻게 나쁜지 잘 알지 못하는 것 때문에 생기는 작은 불편한 마음들이 그렇다. 아주 사소한 것이다. 길을 함께 걸으면 내가 차에 받칠까봐 차만 오면 나를 자꾸 길 바깥쪽으로 밀어 부치거나 계단이 있으면 계단, 계단, 하며 큰소리를 치거나 할 때이다. 그러고는 막상 어두운 곳에서는 나를 잊어 버리고 혼자 앞서 가버린다. 사실, 내 눈 안에 들어 와 보지 않은 그 사람이 내가 순간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못하는지를 어찌 다 알겠는가? 무작정 사고가 두려운 것이다. 대화에 열중하며 걸어 가다가도 자주 자주, 내 눈 생각을 하면서 다칠까봐 그렇게 노심초사하는 그 마음이 고맙기 그지 없다. 그러나, 갑잡스러운 그의 친절에 따르기는 하면서도 한 편으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는 것이 신경이 쓰이고 은근히 서운한 마음까지 드는 것이다. 내가 자동차가 안 보일 정도는 아닌데...하면서. 그러고는 이내, 그런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사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교정시력이 1.0, 1.2을 유지하였던 사십대 초반까지도 내가 가까운 것을 보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눈이 좋은 사람들은 아, 너는 눈이 나쁘지, 하면서 지레 이해 아닌 이해를 해 주는 일이 많아서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 갔다. 나는 더구나, 원래부터 밤눈이 나빴고, 소녀적부터 알이 빙빙 돌아가는 두꺼운 안경을 썼으니 안 그렇겠는가. 20년 가까이 운전을 해 오는 동안에도,내 차에 탄 사람중에는 항상 마음을 놓지 못하고 불안해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나는 대개, 그런 사람들은 꼭 내 눈이 나쁜 것 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다른 일에서도 대체적으로 너무 예민하고 불안증이 많아서 (그래서 운전도 안한다는 사람도 있다.) 의례히 그러려니 하고 넘어 가지만 사실 그 경우에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7, 8년 전에는, 우연한 기회에 나의 눈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 일간지에 실린 적도 있었다. 커다란 사진과 함께. 그 때도, 나는 아직 멀쩡하게 운전을 하고 다니는 상태였는데도 당장 집안 살림도 매우 힘들 정도로, 거의 실명에 가까운 상태인 것으로 앞당겨서 과장되이 쓰여졌다. 그것이 처음으로 기획기사를 맡은 그 절은 여기자의 공명심 때문이었는지,편집진의 의도에 맞춘 조정 탓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에게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던 것은 너무 했다. 아마, 그런 의식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장애인들에게 더 감동적으로 귀감이 되는 사례를 보여 주어 삶에 대한 용기를 북돋워 준다는 편집의도가 내 눈의 실제상태가 지금 어느 정도인지보다는 중요한 것 같았으므로. 어차피 언젠가는 내가 그렇게 될 것이 아닌가...덕분에 오래 격조했던 친지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위로의 전화를 받으면서 좀 씁쓸한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그헣게 매사에 너무 대범하여 남자 같다는 소리도 들어 오던 내게 소심증과 불안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난간을 잡지 않고는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기가 두려워지고 평지에서도 언제 어디서 계단이 나타날 지, 돌출물에 부딪칠 지, 머뭇거리는가 하면, 집에서도 설거지할 때나 야채를 씻을 때, 스스로도 믿지 못하여 씻고 또 씻으면서 손의 감촉으로 세세히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게 되어 가면서부터 사람들이 나에 대해 너무 잘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과민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왕이면 더 효과적이고 적절한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이 크다. 내 팔을 붙들어 주며 부축해 주는 일만 해도 그렇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도 더 긴장되고 힘이 들 뿐만 아니라, 나도,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더욱 당황하고 불안해지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그의 팔을 가볍게 붙들게 해주고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면서 힘을 빼고 천천히 걸어가 주면 나는 편안히 따라 갈 수가 있다. 계단이 있는 곳에서는 너무 큰 소리로 계단이 있다고 소리치는 것보다는 작은 소리로 말하면서 잠시 멈추었다가 천천히 움직여 주면 그의 움직임을 따라 같이 움직일 수가 있어서 좋다. 얼떨결에 그가 부축하는대로 허둥거리며 밀려 가다시피 하면서 나는 좀 챙피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줍잖은 자존심이다... 그것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자의식의 과잉이다. 그것 때문에, 자신이 진실로 필요한 것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허둥대다가 안 할 실수도 더 하게 된다. 더구나, 자신이 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을 거부하고 싶고 숨기고 싶어 하는 마음에, 그 사람 앞에서 필요 이상으로 내가 아직 이 정도는 보인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러고는 스스로 부끄럽고 슬퍼지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좀 멀쩡했을 때까지는 대범한 척하다가, 막상, 장애인이 되었음을 스스로 부인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그것을 조금이라도 부정해 보고 싶은 욕망에 붙들리는 것이다....나는 그것이 슬프다. 점점 마음의 유연성을 잃고 편협해지는 자신을 바라 보는 것이다. 안 그래도, 노인이 되면 그렇게 되기 쉬운데 눈의 장애로 인해 그것이 가중되어서야 되겠는가? 말하기 좋고 듣기 좋게, 사람들은 '육안이 어두워지면 심안이 밝아진다'고들 하지만, 그것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심안이 밝아져야 한다'일 것이다. .점술인 중에 맹인이 많았던 것은 맹인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는 노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그나마 그런 일로 밥벌어 먹고 살았겠는가? 맹인이니까, '불쌍해서' 던제 주는 복채로라면 모를까...
남을 배려한다는 것은 그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는 불가응하다.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장애를 가진 사람의 형편을 다 알겠는가? 그들이 나에 대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식으로 대하든, 그것에 너무 연연해 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나를 이해해 줄 것을 요구하지 말고, 내가 그들을 이해해 주자. 누가 나에 대해 무어라 해도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믿을 수 잇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마음의 눈을 열고 그들과 나 자신을 바라 보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나 자신을 돌보는 진짜 자의식과 자존심을 가져야 한다. 소소한 문제들을 가지고 자신을 과잉보호하려는 어줍잖은 자존심으로 나 자신을 속이지 말자. 나 자신 대신 남들에게 예민한 눈빛을 번뜩이지 말자..'너무 잘나서',작은 일에 '좁쌀영감'처럼 자존심을 내세우거나 안달하는 사람들을 답답하게 생각해 왔으면 자신이 그러지는 말아야지...그것은 몸에 병이 있음을 마음의 약으로 삼지 못하고 마음도 함께 병들어 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래도 나에게 말한다. 왜 그렇게 미리, 실명이 될 것이라고만 생각하는가? 그것이 더 큰 병이다.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라. 절망하지 말고 열심히 기도하라...그리고 실제로, 이런 저런 치료법을 권하기도 한다. 대체요법에서부터 수술까지...나도 많은 것을 해보기도 했고 언젠가는 그 병을 고칠 수 있기를 희망도 한다. 그러나,나는 이제 더 이상 그런 희망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가고 싶다. 낫게 되면 좋을 것이지만, 낫지 않아도 절망하지 않고 거기에 맞춰서 살아나갈 방법을 생각하고 연습하고 길들이는 쪽을 택했다. 낫기를 희망하되 그 마음 때문에 쪼달리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치료법의 연구도 다양하게 진전되고 있고 보장구도 많이 발전되고 있다. 며칠 전에는 모든 문서나 책을 사진으로 찍어서 음성으로 읽어 주는 디카도 나왔다. 이젠 점자도 배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도움을 받게 된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가...
누구든지, 남에게 자신을 완벽하게 소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존재는 끊임없이 그 안에서도 변화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자신의 다른 부분들을 다 따라잡지 못하고 지체되고 소외된 채 살아 간다. 노인이 되면서는 그 소통능력이 더 떨어지기 십상이다. 젊었으면서도, 그렇게 생각이 꽉 막힌 혈관처럼 흐르지 못하는 영혼들이 있다. 자기 자신과도 제대로 통화되지 못하여 분열되고 갈등하다가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고 지체되어 불안해진다. 마침내, 그런 자신이 한심해지고 우울에 빠진다. 그런 악순환의 고리부터 끊을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나서기 이전에, 그런 나 자신부터 잘 돌볼 일이다. 누가 나를 어떻게 보든, 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혼자서 모든 일을 다 추스리려고 전전긍긍하지도 말아야 한다. 한가위 보름달처럼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차분하고,유연하게, 변화하는 나 자신과 남들에게 적응해 나갈 일이다. 어느 티비 광고처럼 못보는 것이 아니라 남과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사는 효과적인 방법을 연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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