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면서 만나기
우린, 오늘, 마음이 아프다는 말과 충분히 이해한다는 말, 그리고 위로와 약간의 사과에 아쉬운 작별의 몸짓까지 나누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데, 왜 이리 허전할까? 입밖으로 밀어 낸 말들의 자리가 가슴 밑에 빈 나무 등걸처럼 남겨져 있는 것은 왜일까? 집으로 돌아 오니 호팻지가 반기며 달려 들어 눈을 반짝이며 그 등걸 속을 졸랑졸랑 들랑거린다. 귀여운 녀석, 도토리를 물고 나무등걸 아래를 들랑거리는 청솔모 한 마리 같다. 그래, 우리들의 수많은 말들이 네 도토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밥을 주니 아작아작 다 먹고 옆에 와서 발로 싱크대를 자꾸 차고 오른다. 아, 이런, 물을 안 줬구나. 물을 마시고는 설거지가 끝날 때까지 내 뒤에 기다리고 앉았다.
녀석이 말을 한다면 나에게 무어라고 했을까? 말이란 마음의 증상이기도 하고 치료약이기도 하다고 할까? 말을 함으로써,병주고 약주는 격이 되더라도. 약은 받되 병은 받지 말라고 할까? 그랬다. 우리의 오늘 만남은 지나가는 바람에 서로 마주 바라 보며 나무 가지도 아니고 이파리나 몇 개 살랑거린 것에 불과하였다. 너는 네 말을, 나는 내 말을, 서로의 병을 도지게 할까 두려워 하며 예의를 갖추어서 할 말과 안 할 말을 잘 가려서 해 냈다. 말하는 자유와 듣는 자유를 서로 최대한 존중하면서 그렇게 살랑거린 것이다.. 그런데, 그래 놓고도, 왜 이리 가슴 한 구석에 서늘한 바람이 스며드는 것인가?
'너는 오늘 그렇게 떠났다.' 그건 조금 전까지도 예기치 못한 말이다.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말이 불현듯 그렇게 들려 온 것이다. 남편이 잘 부르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그 노래가 생각난다. 가슴이 아리도록 슬픔에 젖게 하는 그 노래. 네가 떠난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그래, 우린 그렇게 떠난다...그건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할 말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어도, 실제로, 그렇게 말했어도, 어디선가 말이 들려 온다. 너는 지금 할 말이 네 안에 그득한 거라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다고. 내 안에서. 엉뚱한 말이 그렇게 들려 오는 것이다. . 귀신도 아니다. 네 말도 아니고 내 말도 아니다. 어쩌면 태어나지도 않은 두 말이 빚어낸 돌연변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만남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 . 나는 늘 우리가 생긴대로 논다고 말해 왓지만, 안 생긴대로도 놀게 만드는 것. 그러나,그 안 생긴 것을 잘 추적해 보면, 그게 다 결국 어디서 왔겠는가? 너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지배받고 거느려 온 그 거대한 의식과 무의식의 인프라, 거기에서 온 것이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다 분석해낼 수가 없다는 것일 뿐. 그러니까, 결국, 그것은 우리가 생긴대로이다. 우리는 그렇게도 생긴 것이다. 다만, 지금은 보이지 않게... 너를'다 이해한다고 한 것도 나이고, 도무지 이해할 수없는 것도 나이다. '무슨 말을 하거나, 또는 하지 않거나, 본의 아니게'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다만 그것이 현재 의식의 한가운데가 아니라는 것뿐...믿거나 말거나, 전생을 분석해낸다는 최면술사가 있지만, 그것도 결국 그런 것이다. 언제적부터인지 모르게 우리 안에 고여 온 의식과 무위식의 깊고 깊은 수렁, 또는 바다를 잠수해 들어가는 일이다.
너와 나의 오늘 만남은 그러므로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모든 기억과 모든 망각, 우리가 가져 온 모든 역사의 구비마다 흐르고 고이며 이어졌던 물의 성분들 중의 어떤 것이 오늘 하필이면 그 길목에서 그렇게 솟구치다가 맞닥뜨린 것이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빙산의 일각이다. 너와 내가 낙동강과 섬진강이 바다에서 만나듯 그렇게 반가이 애틋하게 만났음에도,.서로 엉기고 뒤채이며 꿈틀거리다 보니 하필이면 바로 그 성분이 바로 그 순간에 그렇게 만난 것이다. 그것은 결코 너와 나의 전부가 아니었다.그런 만남으로 인해 우리가 잠시 더 낯설어지고 아쉽고 허전하여 다시 격조하게 된다 하여도, 바다는 우리를 그렇게 미아로 영영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오래 흘러 와 만난 역사가 그렇게 우리를 부둥켜 안고 바다가 되었음에랴. 인터넷 바다에서처럼, 우리는 누가 어디에 있고 없고 간에 한 바다에서 늘 만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만나면서 떠나고 떠나면서 만난다. 서로 비키면 비킨 곳 그 겨드랑이 밑 빈 가슴으로 새 물이 스르륵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흘러 든다. 호팻지 녀석은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집에 가서 자', 소리치니 잠결에 뒤뚱뒤뚱 집으로 들어가서 꼬부리고 줍는다. '그래, 잘 자, 자야지,'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꼬리를 흔들며 졸린 눈을 부릅떴다가 스르르 감는다. 기다란 속눈썹이 커튼처럼 내려진다. 잠이 깨면 또 내 침대 아래에 와서 엉거주춤 앉아 내가 깨기를 기다릴 것이다. 너는 지금 나를 떠나고 있지만, 새로운 만남을 네 안에 이미 잉태하고 있음을 나는 안다. 그래, 잘 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