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늦은 사랑 고백

해선녀 2006. 8. 14. 07:11
 

 

 

 

지리지리하던 장마에, 푹푹 찌는 무더위, 있는 성질을 다 부리던 이 여름, 내 너를 차마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오늘, 아침부터,내 어깨를 그 더운 손으로 만지며 감겨 오는 너에게 나는 마침내 돌아 섰다. '불멸의 여인'이라고 불린다던가? 베토벤의 전원 교항곡, 저 4악장을 듣고 있다가,갑자기 너라는 존재, 위대한 자연 앞에서 나는 괜히 너무 까탈이나 부리고 입만 가지고 너에 대해 찧고 까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 우리 차나 한 잔 같이 하자. 달려 나가 너의 품에 안겨 춤을 추지는 못했어도 이 구석자리까지 나를 찾아 준 너, 너에게 이제라도 악수를 청한다. 이제 네가 떠날 날이 다 되었다고 항복해 주는 척, 화해하는 척 제스쳐를 쓰려는 건 아니야..항복이라면 진짜 항복이고 화해라면 진짜 화해인 것이지. 아니, 늦었지만, 내 못난 사랑을 지금이라도 너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지...정말이야, 이제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네가 나를  찾아 오겠는가? 더구나, 내가 너를 찾아 가겠는가? 아, 그렇게 말하고 보니 갑자기 더 숙연해지네..

 

안되겠다. 혼자서라도, 스틱 하나 짚고 뒷산으로 오른다. 조금 늦었나, 아직 아침나절인데 산엔 아무도 없다. 벌레들도 무성한 풀덤불 속에 숨어서 울고 새들도 더운지 나무가지 사이로 푸르르 푸르르 낼갯짓하는 소리만 낸다.  산자락을 조금 벗어났을까? 아직 약수터는 멀었는데, 커다란 바위 하나를 발견한다. 이미 달아 오른 너의 뜨뜻한 엉덩이에 내 엉덩이를 바짝 붙이고 나는 너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권한다. 그리고는 고백한다. 그래, 나도 너를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말이다. 사람마다 사랑하는 이유와 방식이 다르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나는 나에게  열의를 보내는 사람에게도 달려나가서 부둥켜 안지 못하였다..내가 그에게 마음이 영 없어서가 아니라,그저 쑥스러워서, 슬쩍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고 녿담이나 하거나,기껏, 뜨뜻미지근하게 웃었을 뿐. 나는 사랑하는 방법을 못배워서였을까?  그건, 나에게 못되게 군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누군가를 오래 미워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빈큼없는 공격 사이로 몇 마디 허투른 공을 날려도 보지만 이내 그 기세를 도저히 당할 수가 없음을 알고 꼬리를 내려 버리는 것이다. 속으로 냉소나 하면서... 

 

그렇지만,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언젠가, 때가 되면 다 알게 되겠지. 나란 사람은 그리 특별히 사랑스러울 것도, 미워할 것도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는 걸 곧  알게 되겠지, 이러는 것이다...아무튼, 나는 저 쪽에서 불을 지펴올릴 때 때맞춰 잘 거들지도 맞불을 놓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다. 마음 속으로만, 그 불이 잘 타오르기를, 또는 잘 사그라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러지 못하는, 그 불타오름에 대리만족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하게도 나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물론, 속상하고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래, 실컷 그래 봐라, 네가 그래 보았자,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이러면서 오히려 그것을 재미있어하며 즐기는 심정이 되는 것이다. 내가 말해 놓고 보아도 참 오만하고도 미련하고 답답한 사람이지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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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그런 바보같은 내 사랑의 방식을 고칠 수 없다. 그게 무슨 사랑이냐고? 글쎄, 나에게 사랑이 있다면 그런 사랑밖에 없네...게다가, 너는 웃기는 소리라고 할 지 모르지만, 나는 이 더디고 뜨뜻미지근한 사랑을  은근하고 한결같은 사랑이라고 자부하면서 언젠가는 너도 그것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턱도 없겠지.  나는 너를 이해해도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적어도 너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그렇게 학 달아 오를 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태워버릴 못쓸 것과 남길 만한 것, 두 가지로만 보이고,그래서 절대긍정과 절대부정의 양극으로 너는 치닫지만, 그래, 어디, 정말 그렇던가? 아니, 네 불길은 정말로 영원하던가?  이윽고, 너는 사그라들고  그 모든 판가름의 잣대들이 허물어지고 말지 않던가.. .

 

그러나, 너는 짐짓, 절대로 그럴 일 없다는 듯이, 노오랗게 물든 이파리들을 내 이마 위로 장난스레 떨어트리고는 이제 곧 멀어져 갈 것이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진다고 했던가...그래,그렇지만, 나는 안다. 너는 깊이 그늘진 얼굴을 나에게 애써 감추고 식은 이마 위 지친 머리칼을 걷어 올리면서 휘청거리며 가고 있다는 것을. 너의 그런 뒷모습은 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불멸의 여인이 있다면, 그건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우리를 이 세상에 있게 한  그 어떤 절대적 존재가 아니었을까? 너도 사실은 그걸 알고 있었다. 다만, 우리는 아직,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뿐...

 

에이 또 잘난 척...그래, 그렇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결코 너를 비난하거나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야. 너의 그 불타는 성정을 오히려 부러워도 하는 것이지. 내가 못하는 것을 네가 대신해 주는 것에 대해 고마워도 하는 것이지. 세상은 그렇게 불타오를 줄 아는 성정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무너지고 또 다시 이루어져 오지 않았던가. 물속을 기는 도룡룡에게도 나이테가 있더군. 내가 이렇게 말하지만, 내 속에도 끊임없이 작은 불꽃이 피었다 꺼졌다 해 온 것을 알아. 다만, 미미했을 뿐이지...우리, 조금 쉬었으니 이제 내려 가자. 내려 가서 함께 풍덩 탕에나 들어 갈까? 네가 떠나기 전에, 우리, 뜨거운 물에 푹 좀 삶고 나오자. 진작에 너를 얼싸 안고 춤을 추지는 못했어도 마지막 한 탕은 우리 함께 하는 거지. 하하하....

 

너는 그래도 내년이면 또 마알간 얼굴로 다시 나타날 것이지...그래, 어쨌거나, 내년에도 꼭 잊지 말고 날 찾아와 주라..칼멘보다 더 강열한 춤을 추면서 말이지... 보나 마나, 난 또 너에게 달려가지는 못하고 멀찍이 앉아서 다른 멋진 이들과 스탭을 맞추는 네 모습을 옆눈으로 바라나 보겠지. 그렇지만, 이제는 네가 내 구석자리까지 와 주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는 너에게 맑은 백포도주라도 한 잔 건네며 말하리라. 에이. 지난 번엔 좀 너무 했어. 이번엔 좀 살살 가자구....하하 그리고는 우리, 한 번은 반드시 이마 높이 잔을 들어 쨍하고 부딪치자. 천천히, 디디더디, 마시며 눈길을 비키지 말고 우리 서로 똑바로 응시하자, 아, 지금 그러자구? 알았어. 하하 또 그 성질은...가만, 가만, 우리 내려 가서 샤워나 하고 보자구....

 

 

 

 

 

 

에이, 또 잘난 척...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