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학습자의 심리 - 13
그러나, 내 육체의 모든 통로를 다 살펴 보아도, 그것이 어디로 들어 올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내 눈은 “실체에 색깔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 색깔을 규정했을 것이다” 라고 한다. 내 귀는 “그것이 소리를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가 그것을 규정했을 것이다” 라고 하고, 콧구멍은 또한, “냄새를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를 통해서 그 냄새가 들어 왔을 것이다”, 미각은 “맛을 갖지 않은 것이라면, 우리한테는 그에 대해 물어 볼 것도 없지” 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실체라는 것은 어디에서 와서, 어떤 길로 해서 우리의 기억 속으로 들어오는 것일까?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그것을 배웠을 때, 나는 어느 누구의 마음에도 의지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나 자신의 마음 속에서만 그 실체를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판정하고 내 마음에 그것을 갖다 맡긴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였다. 마치, 내가 원하면 어느 때고 꺼내 올 수 있도록 내가 그 장소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그렇게 어떤 장소에 갖다 쌓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내가 배우기도 전부터 내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내 기억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내 마음 속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들이 내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해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그래요. 그것이 맞아요” 라고 그것을 알아 보고 그렇게 말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들은 마치 깊은 동굴 속 같은 곳에, 하도 멀리 감추어져 있어서, 어떤 교사가 꺼내주지 않고서는 나 스스로 그에 대한 생각조차 해내지 못할 그런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것은 감각을 통해서 그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대신, 이미지 없이,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우리 내면에서 직접 보게 되는, 그런 종류의 학습행위이다. 그것은, 기억 속에 이미 들어 있었지만 여기 저기 멀리 흩어져 있어서 조합이 안되어 있는 그런 것들을 생각 속에서 가까이 끌어다 모으는, 그런 일이다. 이런 종류의 지식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면, 그것은 말하자면, 기억 속에서 멀리 흩어진 채 소홀히 다루어져 왔던 것들을 좀 더 가까이 불러 와서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게 해 준다. 그러고 보면, 이전에 발견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다시 꺼내어 쓸 수 있도록 넣어 둔 것들이, 이전에도 말했듯이 기억에 얼마나 많이 담겨 있겠는가! 그런 것들이 다 소위, 우리가 배워서 알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지식인 것이다. 생각 속에서 회상해내는 일을 잠시라도 멈추면, 그것들은 다시 그 먼, 원래 있던 곳으로 달아나 버려서, 언제든지,다시 그 곳으로부터 새롭게 불려져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갈 데라고는 원래 있던 곳, 거기밖에 없다. 그것들이 궁금하면 언제나 그것들이 흩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그 곳으로부터 다시 끌어모아야 한다..
기억은 또한, 무수히 많은 數와 量에 대한 원리와 법칙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색깔, 소리, 냄새, 맛 또는 촉감이 아니기 때문에, 신체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나는 이 원리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의 말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그 소리들은 그것이 상징하고 있는 실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같은 소리라 해도 그리스어에서의 의미와 라틴어에서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 반면에,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실체는 그리스어도 아니고 라틴어도 아니며, 다른 어떤 언어의 속성도 아니다. 나는 어떤 기예가가 그려 놓은 최대한으로 가느다란 선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거미줄 만큼이나 가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의 실체라고 하는 것은 전혀 그와는 다른 것이다. 선의 실체는 나의 육안이 나에게 보여 준 선의 이미지가 아니다 체는 물질적 대상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도 내면으로 그것을 깨닫는 사람에 의해서 인식된다. 나는 또한, 우리가 셈을 할 때 사용하는 數를 나의 모든 감각으로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렇게 셈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는 數 그 자체는 그런 경혐과 무관하다. 그것은 물질적인 數의 이미지도 아니고, 그야말로, “실제로 존재하는 그것”(실체)인 것이다. ....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내 기억 속에 담고 있으며, 그 속에는 또한 그런 것들을 배우는 방법까지도 들어 있다. 나는 또한 내가 그런 방법에 대항해 오는 많은 사이비 논쟁들을 나의 방법과 구별할 수 있었던 것도 기억한다. 그렇지만, 지금 현재 내가 그런 것들을 구별하고 있음을 아는 것과 내가 과거에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다르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이런 것들을 이해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또한 현재 이런 것을 구별하고 문제의 포인트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내 기억 속에 지금 저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함으로써, 언젠가 다음에, 내가 지금 현재 이것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에 내가 기억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훗날 지금 현재 이런 것들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을 회상하게 된다면, 그것은 순전히 기억의 힘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항상 그 자체로서 동일한 것인(selfsame) 기억이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의 정서를 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마음이 그것을 경험하고 있던 그 순간의 정서 그대로가 아니라, 기억의 특이한 힘으로 인해 다른 상태의 정서를 담을 수도 있다. 나는 당장 행복하지 않으면서도, 과거에 행복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슬프지 않을 때에도, 나는 옛날의 슬픔을 기억할 수 있다. 나는 무서웠던 일을 회상하지만, 지금 공포를 경험하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내가 실제로 어떤 욕망을 느끼지 않을 때 과거의 욕망을 상기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때때로 나는 기쁨의 순간에 과거의 슬픔을, 슬픔의 순간에 과거의 기쁨을 상기하기도 한다. 몸과 마음을 별개라고 보고, 이것을 몸에 적용할 때도 놀랄 일은 없을 것이다. 즉 기쁨의 순간에 과거의 어떤 신체적인 고통을 기억했다고 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마음과 기억은 한 가지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기억하라고 할 때, “당신은 이걸 꼭 마음에 두도록 하시오” 라고 한다. 그리고 건망증이 있을 때에는, 기억을 “마음”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은 내 마음 속에 있지 않았다”거나, “그것은 내 마음으로부터 빠져 나가버렸다” 라고도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기쁨의 순간에 과거의 슬픔을 회상하고 있는 사람은 어째서 그의 기억은 슬픈데 마음은 기쁠 수 있는가? 마음은 그 속에 있는 기쁨 때문에 기뻐질 수도 있는 반면에, 기억은 그 속의 슬픔 때문에 슬퍼지지 않을 것이다. 기억은 마음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은 마음의 胃腸과도 같다. 기쁨과 슬픔은 달고 쓴 음식과도 같다. 그것들이 기억에 맡겨질 때에는, 이미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위장 속으로 음식이 들어가듯이 그렇게 거기에 저장된다. 그런 비유가 좀 우습기는 하지만, 그 두 가지의 상황이 완전히 닮지 않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마음에는 네 가지의 정서 -욕망, 공포, 기쁨, 슬픔- 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면, 나는 지금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들을 어떻게, 그 속과 종을 구분해서, 정의를 내릴 수 있는지를 기억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서들을 회상하면서도, 나는 그 각각의 정서에 휘말려 들어가지는 않는다. 내가 그것들을 회상해내기 전에도, 그것들은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회상행위를 통해서 되살려질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들을 회상할 때에는, 마치 음식물이 되삭임을 통해 위장으로부터 꺼내어지듯이, 그렇게 기억으로부터 꺼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 기쁨의 달콤함과 슬픔의 쓴 맛을 회상할 때에는, 내가 그것을 경험하고 있었던 때와 똑같은 정서가 재현되지 않는가? 그 비유는 거기까지는 성립되지 않는 것일까?
사실, 우리가 슬픔이나 공포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 슬픔과 공포를 느껴야 한다면, 누가 그런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겠는가? 그러나 신체감각에 찍혀진 그 이미지들의 이름만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 대한 생각, 즉 신체적 감각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닌, 생각 그 자체를 기억 속에서 찾아낼 수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정서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직접 경험한 것에 대한 생각을 기억 창고에 갖다 맡겨 놓는다. 아니면, 마음이 그 생각들을 기억에 맡긴 것이 아니라면, 기억 자체가 그 생각들을 붙들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2)등불을 비추어가면서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 있는 여인이 있다고 하자.3) 그녀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지 않고서는 그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만일, 잊어버리고 있었다면, 그녀가 그것을 찾았다 해도, 그것이 자기가 잃어버렸던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나는 많은 물건들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찾아 다녀 보았으며, 찾아낸 적도 있었다. 그것들 중에서, 어떤 것을 찾고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이게 그것 아닌가? 아니면, 이건가?” 하고 내게 물었다면, 내가 찾고 있는 그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니, 그게 아니야” 라고 말했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이 내 눈 앞에 놓여졌어도 알아보지 못하였을 것이므로, 내가 그것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것을 찾아다니고 그것을 찾아낸다는 것은 항상 그런 식이다. 어떤 것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어도, 어떤 물체든지 다 그렇듯이, 그것이 우리의 기억으로부터도 사라지지 않는 한, 그 이미지는 우리 내면에 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물체가 시야에 다시 나타날 때까지 계속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았을 때, 그것인 줄 알아 볼 수 있는 것도, 그 이미지가 우리 마음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아 보지 못한다면, 잃어버렸던 것을 찾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알아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물체가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어도, 기억 속에는 그것이 확실히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것을 잊어버려서 그것을 생각해내려고 애쓸 때 그렇듯이, 기억 자체가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기억 그 자체 속에서밖에, 다른 어디에서 그것을 찾겠는가? 찾고 있는 것이 아닌 다른 무엇이 어쩌다가 그 자리에 놓여지게 되어도, 그 찾고 있었던 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타났을 때라야, “아, 여기 있었구나” 하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그렇게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에도, 물론, 그 전체를 다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한 부분을 찾아다니면서도 다른 부분은 여전히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부분을 찾아다니게 되는 것은 바로 현재 가지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결국, 기억은 원래 하나의 전체로서 가지고 있었던 것에서 빠진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기억은 그 결여된 부분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다시 회복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절름발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잘 알고 있던 어떤 사람을 보거나 그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의 이름을 잊어버려서 그것을 찾아내려고 한다면, 다른 아무 이름이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어도 그 사람과 연결될 수가 없다. 바로 그 이름, 즉 평소에 그 사람과 연결되어서 잘 어울리던 그 이름이 나올 때가지, 다른 이름들은 모조리 거부되는 것이다. 이 이름은, 기억에서부터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다른 어떤 것에서 힌트를 얻어서 그것이 생각날 때, 우리는 그것을 새로이 알게 된 어떤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맞다는 승인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이 완전히 우리 마음으로부터 씻겨져 나가버렸을 경우에는, 그것이 우리 앞에 제시되어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사실인즉, 우리는 무엇인가를 잊어버렸다고 기억하고 있는 한,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완전히 잊어버렸다면, 그것을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할 수가 없는 것이다.
1) *: 선의 “실체”란, 즉 길이는 있고 넓이는 없는 것이라는 개념 또는 원리를 말한다. 특정한 선은 “외적으로”, 즉 감각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선의 원리는 “내적으로”, 즉 순수이성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2) 「참회록」, ⅹ, 18-19.
3): 「누가복음」, 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