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아, 없다....

해선녀 2004. 5. 19. 08:59


 

 

 


칼럼들이 문을 닫는 것을 종종 봅니다. 나는 그런 방들을 나오면서, '아, 없다'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나는 어디서고, 그런 소리를 참 자주 합니다. 그렇지요. 그 방문을 닫으면서, 도리질하면서, 나는, 그의 방 안에 그 사람이 없는, 그런 일은 없는 것으로 치겠다고 그렇게 소리칩니다. 착각하는 건 아닙니다. 자신을 속이는 것도 아니고 현실도피도 아니고, 오히려 온마음으로 그 방주인과 나의 삶을 받아 안게 된다고 할까...


그가 돌아 오지 않을 때에도, 그가 거기 있는 양, 나는 그렇게 치면서,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 안에 그가 없는 일, 그런 일은 없다고요.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꿈처럼, 그가 그렇게, 그의 텅 빈 방에 돌아와 있곤 하지요. 그가 그의 안에 말이지요. 여전히 없는 그를 있다고 이제는 정말로, 환상을 보는 거라구요? 아닙니다.


시각장애인들의 연극을 보신 적 있으세요? 이영호씨라고, 이장호 감독의 동생인데, 나와 같은 병으로 아주 시력을 잃은 상태지요. 배우이기도 했던 그가 그런 연극에 빠져 있었을 때, 나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왜 하필이면 대상물도, 그 배경까지도 보이지도 않는데, 연극, 그 자신에게는 없는 그것들을 있는 것으로, 외로운 가정법을  계속 고집할까? 그냥, 배운 도둑질의 습관을 계속 하는 것일까?

 

물론 가정법은 아니지요. 거기 실제로 대상들이 있으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꿉놀이 하던 때처럼 그 '현실 그리기'로 그는 그의 텅 빈 방에 비로소 불을 켜고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연극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비로소 그의 현실에 닿아 있고 그의 현실을 만들어 내면서 그의 존재가 충만해졌던 것이지요. 

 

나도 그 텅 빈 방에서의 연기를 계속하려 합니다. 다만, 아직도 어설픈 연기 때문에 고민은 할 지언정. 누구의 눈에 보이고 안보이고 간에, 나는 그렇게 존재하려고 합니다. 눈으로 뻔히 보이는, 현실과는 맞지 않는 나의 몸짓 때문에, 또는 서툰 연기 때문에, 또는 보이는 것과는 상관없이,  내 진지한 마음 속의 의미를 잘못 전달받은 것 때문에, 또 다른 '현실'이 만들어지는 일은 늘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잠시 머리를 어지렵히는 일이 있어도, 나는 여전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없다' 고요. 진정으로, 그들의 안에 그들이 없고, 내 안에 내가 없는, 그런 일은 없다고요.

 

안과 안이 만나는 것, 그것은 언제나 너무나 쉬운 일이기도 하고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현실적으로는 어떤 무엇이 나를 묶고 내가 나 아닌 다른 나로 처리되어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롯한 그 모든 왜곡과 오해들이 우리가 계속 만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풀릴 수 있는, 잠시 잘못 엉긴 실타래일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누구나, 어차피, 텅 빈 방에서 각자의 연기를 완성해 나가는 배우들일 뿐입니다. 결국, 그 연기는 명상의 몸짓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시각장애인들이 자신에게는 보이지는 않지만 거기 그렇게, 그 대상들이 틀림없이 있다고 믿는 것과 근본적으로 똑같은, 모든 존재에 대한 기본 신뢰를 버리지 않는 한, 우리 모두가 언제 어디서고 계속할 수 있는 그런 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사람들과 대사를 주고 받고 몸을 부딪치며 산다고 해도, 자신의 존재의 실타래는 자기 자신이 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지요. 금방 그 고리가 보였다가도 다시 사라지곤 하는  그런 것이 삶이기에, 나는 그저, 때로는 좀 더디게 때로는 좀 빠르게, 이 텅 빈 방에서, 내가 풀 수 있는데까지, 내 실타래를 풀고 앉아 있을 것입니다. 칼럼의 분이 열려 있고 닫혀 있고 간에, 내가 내 안에 없는 일, 그런 일은 '아, 절대로 없다', 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