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슬픔부터 껴안기
하얀 철쭉이 져 가는 계절,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서 하얀 꽃을 보면 내가 일곱 살 적에 돌아가신 하얀 얼굴의 엄마가 어렴 풋이 생각나곤 한다. 요즘 부쩍 여윈 내 얼굴 탓일까? 엄마가 이렇게 생겼던가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방문 밖에서 몰래 바라본, 어느 어른이 세숫대야에 한가득, 엄마의 다리 밑에서 닦아낸 붉은 핏물을 행궈내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엄마는 그 때 겨우 마흔 두 살이셨다. 그 하얀 순수를 향해 누구보다도 절절한 마음으로 달려가는 것 같은 친구가 있다. 그녀는 가끔씩, 내가 보기에는 별것도 아닌 돌부리에 덜커덕 걸려 넘어지곤 하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좀 의아해 하기도 한다. 왜 그렇게 쉽게 무너져 내리는 것일까? 나는 너무 감성이 무디어져서 그녀처럼 파릇한 슬픔의 미감을 잃어버린 것인가...
그래서, 내 슬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나도, 내 슬픔의 안으로 들어가 머무르면서 돌뿌리에 걸려 제대로 넘어졌다가 제대로 딛고 일어서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늘, 슬픔 따윈 이미 모두 넘어선 사람인 척, 나와 남들의 슬픔을 건성으로 대하지 않았던가? '슬픔은 슬픔이고', 그러면서, 나는 구조대원처럼 속히 그 슬픔을 수습하는 일에만 너무 급급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어쩌면 불감증이 아니었을까? 그녀 못지 않게, 내 안에도 슬픔의 뿌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녀는 그녀의 엄마에 대한 회한이 그 뿌리일 거라고 했다. 딴살림을 차린 아버지를 제대로 원망 한 번 하지 못하고 살아간 엄마와 함께 살면서 그녀의 슬픔의 옹이가 배겼다는 것이다. 그 비슷한 슾픔의 뿌리가 내게도 있지 않았을까?
나는 생모가 그립다는 생각을 별로 해본 적이 없다. '계모'라고 말하면서 한 걸음 떨어져서 엄마를 대하던 올캐들이 마냥 섭섭할 정도로, 나는 일곱 자식들을 위해 희생만 해온 지금의 엄마에게만 정을 붙이고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려서 죽은 그 엄마의 슾픔 같은 건 알아차릴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엄마의 슬픔도 희미하게나마 내게도 이어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만주로, 일본으로, 바람처럼 다니셨다던 조금은 좌익성향이셨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찾아 다니느라 엄마는 미치는 지경에까지 갔다고 하지 않는가. 열녀라고 소문이 났던 그 엄마의 회한과 죽음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의 슬픔의 뿌리가 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그 하얀 얼굴과 광대뼈를 언니보다 내가 더 닮았다고 하지 않는가...
나를 길러 준 엄마의 한도 내게 이어져 있다. 아버지와 재혼하기 전의 젊은 시절의 고난과 두고 온 두 딸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최근에야 들었고 그녀들을 만나도 보았다. 엄마는 전처의 다섯 자식을 포함한 일곱 자식들을 위해 억척으로 일만 하며 사셨지만 나는 그런 엄마에게 야단을 맞은 기억이 두어 번 뿐이다. 소위, ''배운 것이 없고' 고생만 하면서 살아온 엄마지만, 엄마는 오히려 엄마가 낳은 두 동생들에게만 모질게 야단을 치기도 하고 매도 들었다, '너무 잘난' 나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그 때는 전혀 몰랐다, 엄마는 단호한 성격이고 '시시하게' 누구를 차별할 양반도 못된다. 지금도, 누구랄 것도 없이, 자식들 앞에서 꽁치 한 토막 먼저 잡숫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눈치없는' 나였지만, 내게도 왜 슬픔이 없었겠는가? 내 슬픔의 가장 큰 근원은 무엇보다도,내가 그렇게 철부지로 엄마를 잃었다는 것 자체일 것이다. 아무리 엄마가 잘 해 주었다고 해도, 제 잘난 줄만 알고 밝게 자랐다고 해도, 내게도 슾픔이 있었다. 나는 최근까지도 주변 사람들에게 엄마가 친엄마가 아닌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그 만큼 그 슬픔을 의식하고 그것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 문제에 대해 민감했다. 내 아이들에게도 외할머니가 나의 계모였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미국에 사는, 근 오십 년 동안을 엄마를 그리워해 온 그 '다른 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던, 막내가 대학생이었던 그 때까지. 나는 '계모'의 '계'자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걸 굳이 말할 필요도 기회도 없었지만, 나는 쓸데없이 그런 개념을 아이들에게 심어 줄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계모의 '계'자만 들어도 팥쥐 엄마로 받아 들이지 않겟는가? . 나는 될수록 엄마를 우리집 곁에 사시게 하고, 걸레를 손에서 놓치 않으시며 내겐 설거지도 잘 안시키던 어릴 때 그대로, 우리집에만 오시면 일꺼리를 찾아서 하시려는 엄마가 습관이 되어서 실제로 엄마가 얼마나 힘드신지 제대로 알지 못햇다. 일은 엄마의 삶 그 자체였다. 언제나 여왕님처럼 모셔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시어머니와는 정반대로... 자연히, 아이들은 물론이고 남편도 장모를 더 편안해 하고 늘 존경스럽다고 말한다. . 미국에서 산 몇 년 외엔 늘 엄마가 담은 장과 김치를 갖다 먹으면서 살아 온 건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내 슬픔에 대해 잘 말하지 않는다. '그까짓 것이 무에 중요하다고..' 죽은 엄마도 그랬을 것 같지만, 그런 점은 지금의 엄마를 많이 닮았다.엄마는 감정표현이 심한 사람을 '흥감시럽다'고 하시고, 울고 불고 그러다가 헤헤 또 웃어 제끼고 하는, 감정노출이 심한 연속극들을 그래서 잘 안보시는데, 내가 꼭 그렇다. 뿜만 아니라, 내가 위로받는 장면을 불편해 한다. 심지어, 그런 '애정요구형의 심리적 인간형'을 한심하게까지 생각한다. 문화적 유전이랄까? 내가 내 어려움을 누구에게 하소연을 하는 일이 있어도, 나는 늘 그 하소연의 바깥에 서있었다. 그것은 나를 객관화하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는데 도움을 받기 위한 것이라는 의식이 너무 강하다.
그런 내가 최근에 와서 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내 감정을 잘 다스려왔다고 믿고 싶지만, 이제부터라도, 적어도,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을 방치하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다스리는 것과 방치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특히, 갈수록,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생각되는 대상에게 아무 말도 안하고 덮어 두기만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전에는, 사람 사이에 이렇게까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사람들 간에, 소위, '코드'가 맞지 않는 일 때문에 조그만 정보 전달에서부터 특히, 마음의 전달에는 너무도 많은 장애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옛날의 나는 도대체, 그렇게 눈치가 없었던 것일까? 사람 간의 '코드' 같은 것을 의식한 일이 거의 없었다. 나는 거의 언제나 나로 전달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사람을, 삶을 너무 잘 몰랐다.
좀 까다롭고 귀찮더라도, 신경이 더 예민해지는 일이 있더라도, 불편한 마음을 서로 확실하게 전달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삶이 너무 복잡하고 다양해져서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가기만 하는 것은 결국 서로의 거리를 더 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딴에는, 텔리파시로 통하고, 끌어 안고 포용하며 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랑, 그것이 위험지수를 넘고 있는지, 그것을 잘 '눈치있게' 감지해야 할 것 같다. 넘어가다 보면 오해도 저절로 풀리고 자신의 마음도 변하는 일도 많지만, 그러나, 마음의 상처를 뒤에서 혼자서만 꿍꿍 앓는 것보다는 제대로 잘 정리해서 전달하는 일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지 못하고 있는 동안의 우회하거나 왜곡된 행동이 자신도 모르게 상대에게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 상처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지기 전에. 대화는 이루어져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바로 옆에서 죽어가도 잘 모르는 것이 이 세상 아닌가...
그러고 보면, 나는 애정욕구가 강한 사람이다. 그것이 결국은, 나도 어릴 적부터 사랑을 못받고 컸다는 반증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내 슬픔 따윈 아무 것도 아니라고, 지나치게 나 자신의 애정욕구를 억제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의 애정을 바라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면, 나는 먼저 화를 내는 일이 잘 없지만, 맞불로 화를 내게 되더라도,곧 먼저 풀어져서 화해를 청한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애정을 빨리 회복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화를 내고 토라지는 사람도 그 동기는 마찬가지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나는 어떤 이유로든, 말을 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을 그냥 볼 수가 없고, 화를 내는 사람을 돌려 놓지 않고는 못배긴다.
그런 나이므로, 나는 이제 내 안의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 보고, 내 슬픔을 내가 껴안아 주고 다독거려 주고, 그것을 제대로 전달하고, 그리고 나서야, 그것을 수습하는 순서로 가기로 한다. 그러지 않고, 내 욕구를 억제하고 슬픔을 방치하기만 하면서 그냥 그 사람에게만 먼저 달려가는 것은 언젠가, 나도 눌린 슬픔이 폭발하고 말게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내가 무슨 도사라고', 내 욕구는 접어 두고 상대방의 말만 들어 주면서 내 슬픔은 천날만날 내 안에서만 해소하고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나도 좀더 '인간적으로' 내 슬픔부터 먼저 어루만지자. 나부터 사랑하자. 얼마나 갈 지 모르지만, 나도, 화도 먼저 내고, 토라져 있어도 보고, 저쪽에서 먼저 사과해 올 때까지 말도 안하고...그렇게라도 하면서...그런데, 글쎄, 그건 하얀 꽃을 빨간 꽃으로 만드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지도, 아니, 어쩌면,무지 간단하고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