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말(馬)도 있다 - 2
시부모님 모신 이야기를 저리 장황하게 늘어 놓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고 나니 원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김이 빠져 버렸으나 그냥 다음 글로 넘어가기도 좀 그렇다. 저 이야기는 앞에서 잠깐 언급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산들바람이 불어들 틈이 있어야 한다는 칼릴 지브란을 인용한 joanne님의 글 때문이었는데...(나성 이야기http://blog.daum.net/joannelim'의 '사람과 사람 사이 2006. 02..) .다른 한편으로,순례자님이 번역해 올리셨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담장 고치기'라는 시 때문이기도 하였다. 지금부터는 그 시와 관련해서 이 글을 마무리 하려고 한다..(순례자님 의 황혼의 연가 http://blog.daum.net/pilgrims'의 '담장 고치기'/로버트 프로스트. 2006. 02. 21)
프로스트는 담장을 고치다 말고,불쑥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애초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담장이라는 것이 왜 필요햇는가?' 그는 반문한다. '담장이 좋아야 서로 좋은 이웃이 된다'는 말은 가두고 지켜야 할 소(牛)라도 키우는 사람들 사이에나 해당하는 말이다. 너는 소나무, 나는 사과나무, 내 사과가 너의 밭으로 굴러 가서 네 솔방울을 잡아 먹을 일도 없는 그런 우리 사이에, 도대체 왜 담장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내 안에 담장을 싫어하는 요정 같은 어떤 것이 부풀어 올라 그 담장을 당장 밀어 올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래 보았자, 담장의 돌맹이들만 떨어져 내려 우리 둘 사이에 온통 흩어져서 우리가 가까이 걷는 것을 더욱 어렵게만 할,것이니 어쩌겠는가...."
사실적으로는 '담장'과 '간격'은 다른 것이다. 그러나, joanne님의 글에서나, 프로스트의 시에서나, 그 둘은 똑같이, '둘 사이가 딱 붙어 있지 않고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음' 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담장을 경계로 해서 양측 사이에 간격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담장, 또는 간격, 틈(이하, 담장으로 통칭함) 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은 서로 반대되는 것 같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그 담장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고... 여기에서,나는 잠시, 그것이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도대체, 왜, 두 사람은 같은 담장에 대해서 정반대의 생각을 하는 것일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담장은 있어야 하는가, 없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담장' )이라는 것을 어떤 의미로 해석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 그것을 알아 보기 전에, 그 대답부터 먼저 해버린다. '좋은 담장'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로, 각자 자기 방식대로만 '좋은 '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요즘은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하던가? 그것은 우선, 같은 코드, 암호(code)를 각자 다르게 해석한다는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낱낱의 어구 해석보다 각자가 종국적으로 '의도하는 바', 바로 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본질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는 소리일 것이다.우리는 그런 코드(cord)_생각의 줄거리가 같고 다르고 간에,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떤 대화도 함께 할 수가 없다.마치, 조율되지 않은 악기들끼리 합주를 할 수가 없는 것처럼....
대화를 하려면 우선 먼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언어의 의미를 다른 의미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그 다른 해석들의 틈을 메꾸는 일이다. 메꾼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다른 해석들의 사이를 연결하고 매개한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그 말의 의미를 얼버무리고 합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해석들과의 관계를 분명히 드러내는 일이다. 매개되지 않은 언어는 맹목이다. 매개되지 않고, 지금 당장의 상황에서는 어물쩡, 얼버무리고 넘어 가더라도 그 애매모호한 의미가 중구난방, 각자의 길로 내달아서, 다른 상황으로까지 번졌을 때, 그 틈은 더 크게 헤벌어져서 언젠가는 목련꽃잎처럼 제각각 땅에 떨어져 버리고 말아, 더 이상, 얼버무릴 수조차 없게 서로 헤어져 수습조차 할 수 없어져 버리기도 한다.
언어의 의미는 각자 서로 닮았으면서도 어딘가 조금씩 다른, 가족관계 유사성(Family Resemblence)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저 생태계 속에서 뛰어 노는 물고기들과도 같아서 순간마다 그 위치와 조건이 파악되지 않으면 그것을 잡아낼 수가 없고, 따라서 대화는 오리무중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담장'이라는 말도 그런 것이어서 그 말이 사용되고 있는 그 순간의 의미가 잡히지 않고는 담장'의 필오성 여부를 논하는 것은 '마치 놏친 물고기를 어떻게 요리할 것인지를 논하고 있는 것처럼 '사이비 논쟁'에 불과하다. 우리는, 상대방의 '담장'이라는 말의 의미와 동시에 그 사용법을 파악해햐 한다. 그것은 그 물고기의 생태계, 또는 그 물고기가 살고 있는 물 전체 속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이 곧,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본질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언어철학자들은 문화는 저마다 다른 언어게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한 개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생각을 실은 다른 언어게임을 하며 살고 있다. 잘 해야, 나는장기를 두고 있고 당신은 바둑을 두고 있는 것만큼이나 비슷한 것일까? 그런데, 우리는 도무지 상대방이 무슨 게임을 두자는 것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내 판을 펼치고 덤빈다. '담장',이라는 말에 대한 자신의 개념이 다른 사람의 게임판에서도 그대로 움직이는 말(馬)이 되어 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똑같은 말(言)도 심지어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리는 말(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나는 지금 저 칼릴 지브란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틈이 있어야 한다'는 밀이 프로스트의 '담장을 없애고 싶은 마음'과 '코드'(cord)가 맞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대화란 서로 다른 언어게임들의 구조와 메카니즘을 파악하고 그 사이을 메꾸는 상호 작용의 힘든 작업이다. 도대체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혼자서 천방지축 뛰어 오르는 물고기처럼, 대화를 하자는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제3자는 양쪽 게임의 카드와 그 룰들의 차이를 명백히 드러내어 주지 못할 바에는, 그 자신의 말(言)과 그 말을 쓰는 범- 말 (馬) 때문에 대화가 더욱 어렵게 되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차라리 묵언해야 될지 모른다. 제대로 '끼어 들려면, 양쪽의 '말귀'-말(言)과 말(馬)를 잘 맞추어서 그 틈을 메꾸어 주어야 한다. 그것은 먼저, 그 자신과 양자의 말(言)과 말 쓰는 법(馬)를 다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점에 대해서 프로스트는 그의 시에서 '사냥꾼들'의 비유로 더 극명하게 보여 준다. 사냥꾼들은 그 담장을 쑤시고 헤집어 (신비한)토끼들을 잡아냄으로서 왕왕 짖어대는 호기심 많은 사냥개들이나 기쁘게 해줄 지는 몰라도, 우리 사이에 어느 돌 하나도 이가 맞지 않게 다 흐트러 놓기만 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표현인가, 나는 실소를 머금는다. 그 사냥꾼이 꼭 나 같아서...
그의 글이 더욱 재미있어지는 것은, 같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도, 저 쪽에서는 제발 나에게 좀 가까이 오지 말아 달라는 단절와 배제의 의미로 그 담장을 철통같이 더 높이 쌓아 올리고 있는데, 이 쪽에서는 '아름다운 기다림과 배려와 관조의 의미'를 그 담장에 부여하면서 그야말로 저 '산들바람을 꿈꾸고 있는 장면울 상상헐 때이다. 양측은 같은 말(言)을 다른 말(馬)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산들바람을 꿈꾸고 있는 쪽이라면, 우리는 진실로 저 다른 쪽, '꿈꾸지 않는 담장에 상처를 받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 쪽에서는 그리움이라는 커튼 사이로 그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쪽에서는 외면과 단절과 배제의 장막을 내리고 있을 때.게다가, 이 쪽이 약자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그리고 아무리 강자의 생각이 바뀌어지기를 기다려도 그 빗장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프로스트는 아예, 담장을 없애고 싶은 마음 속 '요정'이 상대방에게도 생겨 주기를 바라지만, '턱도 없는 일', 그 ''원시인' 같이 완고한' 건너편 주인은 어두운 그늘 속에서 우직한 몸짓으로 계속해서 '좋은 담장'을 다시 쌓는 일에만 열중한다, 그 모습을 바라 보면서, 자신은 야외 스포츠나 하는 심정이 되어 동글동글한 돌들을 자기가 돌아설 때까지만이라도 제발 떨어지지 말고 있어 달라고 주문이나 외우면서 쌓아 올린다는 것이다. '나는 사과나무, 그대는 소나무...'우리 사이에 무슨 경계와 결리와 배제가 필요하랴..그래도 그대, 그 담장이 꼭 필요하다면, 그래, 우리 서로 지긋이 바라 보며 진심으로 서로 배려하고 믿으며 너머다 볼 수 있는 여유와 거리..우리, 그런 담장이라고 생각하자... 진실로 '좋은 답장'은 그런 담장이 아니겠는가....' 그는 그렇게 기도했을지 모른다.,,,.
프로스트에게 담장이 있다는 것은 그러므로, 오히려, '서로 건너다 볼 여유와 틈도 없이 딱 붙어 있음'의 의미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때의 거리와 틈은 숨을 쉴 수 있는 여유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단절과 배체의 대치상황일 수도 있고, 반대로, 서로 밀착상태일 수도 있다. 그것은 어느 경우이든지 결국, 저 산들바람이 불어들 틈도 없는 관계인 것이다. 한 사람은 사람 사이에 간격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그것이 없어야 하지만, 그 뜻)은 결국 똑 같이, 사람과 사람, 또는 내 안의 마음과 마음 의 관계는 단절과 소외, 또는 밀착 이 아닌, 바로 저 믿음과 배려, 기다림과 여유의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말(言)-code을 서로 반대의 방향으로 가는 말(馬)로 쓰고 있지만 결국, 지향하고 있는 바, 마음의 줄기- 의도- cord는 맞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담장이 있어서든, 없어서든,' 딱 붙어 있음'은 다분히, 편집적, 또는 자폐적인 마음의 상태이다. 그것은 특정 code에 대한 중독이기도 하다. 빨간색 장미는 진정한 사랑, 노란 손수건은 이별, 담장, 틈은 단절, 이런 식이다. 특히, '어떤 것을 지극히 싫어하면서도 그것을 끊지 못하는 관계 - 그런 중독성은 누구에게나 조금씩 있지 않던가-가 그렇다. 서로 다른 방을 쓰든 쓰지 않든, 서로 잠시 헤어져 있든 아니든, '마음의 여유와 거리를 가지지 못하고 거기에 스스로 침몰되거나 함몰 당해 있는 상태,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에서의 거리와 공간의 평수에 갇힌 상태...이것은 자신의 삶을 관조하지 못하는 마음의 장애상태이다..그런 것들로부터터 자아가 분리되어 '그 사이에 산들바람'이 불 여유와 틈을 두고 바라 볼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나는 나 자신과의 대화도 가능해진다.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을 쓴 마음도 그랬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블로그의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과 <프로스트의 한숨과 너털웃음, 그리고 벽난로>, 2006. 02. 참조) 우리가 사실적으로는 어떤 길을 갔든지 간에, 마음이 그 길에만 딱 붙어 있는 동안에는 다른 길을 바라 볼 여유를 가지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말(馬)과는 다른 방식으로 달리는 말(馬), 또는 아예, 거꾸로 가는 말(馬)도 있다는 것을 알 도리가 없다. 어느 살의 길도 그 길 자체에 의미가 들어 있지 않고 삶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 의미는 비로소 떠오른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더라도, 나는 그대와 나 사이의 그런 여유와 간격 너머로 그대를 바라보고 싶다. 우리 사이에 그래도 담장이 꼭 있어야 한다면, 때로는 그 뒤에서 그대를 의심도 좀 하고,,실종도 될지언정,어느 날 다시 그대가 그리워져서 배시시 웃으며 나올 수 있는, 싸리나무나 탱자나무 담장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