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길 1
나는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늘어선 길을 걷기 좋아한다. 가을이 오면 그 화려한 터널을 지나갈 땐
자동차들도 흐느적거리고 사람들은 그림 같은 자태로 거닐고 멈춰 서고 벤치에 앉는다. 그
길에서 이야기를 하면 거짓말일 수가 없고 미움일 수가 없고. 우울일 수가 없고, 절망일 수가
없다. 아무리 그러지 못할 일이 있어도 그 밝고 밝은 노란색으로 은행잎들이 마음을 가득 채워
버리니까 은행잎이 다 떨어져 가지마다 눈 쌓이는 겨울에도, 가지마다 새 순 내미는 봄에도,
은행나무 길은 언제나 좋다. 은행나무가 고목이 되어 하늘이 보이지 않게 되는 날도 기다려진다.
나도 곧 노인이 되어 그 벤치에 앉아 젊은 날의 추억에 잠겨 있으리라. 지나가는 차들과
젊은이들을 따뜻한 미소로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한 가슴이 그 때도 내게 충분히 남아 있기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에도 나는 그 길로 가기를 좋아한다. 우산을 쓰고 젖은 낙엽을 밟으며
걸을 때엔 좀 우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자꾸 갈아 앉는 마음을 추스리려고 애쓸 것도 없다.
눈물이 나도 내버려 두라. 지나는 사람이 가까이 오면 우산으로 슬쩍 가리면 된다. 물을 가르며
지나가는 차 소리도 듣기 좋다. 가슴을 싸아하게 건너지르는 그 소리가. 빗속에서 더욱 찬란하게
타오르는 은행잎 색깔에 가슴이 환해지지 않는가..
오늘도 나는 일부러 그 길에서 차를 내렸다. 색이 좀 덜 든 나무 몇 그루가 안되어 보였다. 다
같은 길에 다 같은 햇빛을 받으며 서 있었는데 유독 퍼렇게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쓸쓸해졌다. 어디 병이라도 난 것일까? 무슨 사연에 갇혀 아직도 저렇게 퍼러둥둥 우수에 젖어
있는 것일까? 아직도 은행 알이 있는지, 등을 구부리고 살피며 오던 노인 한 분이 먼저 지나
가라고 옆으로 비켰다. 도중에 공원에 들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뽑아들었다. 싸늘해진 저녁
공기에 벤치의 냉기를 이기지 못하고 몸이 떨려 올 때까지 앉아 있었다. 내일부터는 내복에
두꺼운 오버 코트까지 챙겨 입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