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어느 가을 오후에
해선녀
2004. 3. 9. 04:43
신호등이 바뀌고 자동인형처럼 길을 건너면서야 방금 헤어진 그 사람의 속이 빈 야자열매
같은 외로움을 알 것 같다. 아무렇지도 안다는 듯 두 손을 반코트 주머니에 찌르고
어릴 적 혼자 가지고 놀던 카키색 작은 탱크처럼 부릉부릉 길을 밀고 가던 그 사람
비개인 마알간 하늘을 바라 보며 주머니 속의 동전을 짤랑거린다. 젖은 아기
은행잎들이 길바닥을 붙들고 있다 시를 좋아 하세요? 에이, 기껏, 그런 바보같은
질문이나 하다니.
좌판에 오종종 늘어놓은 작은 악세사리들을 만져 보다가 뜻도 없이 반짝이 머리핀을
하나 집어 들고 또 걷는다. 머리핀을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나도이걸 꽂아 주고 손잡고 갈 손녀딸 하나 잇었으면 한다. 코너를 돌며, 또 괜히
밀감 한 봉지를 산다. 한 쪽 손은 여전히 머리핀을 만지작거린다 한 집, 두 집,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골목을 들어 서면서야, 시를 좋아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