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노이 대학의 사람들을 만난 후, 학교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루만 자고 시카고로
갔습니다. 오천 평이나 된다는 잔디정원에 백년이 넘는 나무들 사이로 온갖 꽃들을
피우면서 사는 19세기 영미소설들에 나오는 집 같은 남편 친구의 대저택에서
묵었지요.
911 이후로, 둔중한 바리케이트들을 쳐놓은 백 층이 넘는 건물들이 빽빽한,
그 중에서도,
세상에서 제일 높다는 시어즈 빌딩의 금속탐지기를 지나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우리
한반도보다 더 크다는, 물안개가 자욱한 미시간 호수에 노을이 지는 장관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오묘 한 조명들로 수많은 빌딩들과 거리의 불빛이 낮보다 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면서 세상이 찬란해지기 시작할 무렵에 내려온 곳, 시카고 다운타운,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낮에 돌아다니며 행복한 얼굴로 만나던 박물관과 예술극장들의
사람들보다도, 그 아름다운 저택의 사람들보다도,더 깊게 내 가슴을 울리는 사람 들은
바로, 낮에 보았던 피카소의 '기타를 치는 노인'처럼 깡마르고 음울한 모습으로 검은
코트와 모자에 지팡 이를 들고 앉아서 깊고 어두운 음성으로 "도와주세요" 라
고 말하는, 어두운 눈빛의 거지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미술관의 거지 그림들에 '철학자'라는 제목들이 붙어 있었는데,
차를 세워 둔 주차장을 잊어버려 헤매다 보니 꼭 그런 모습으로 걷고 있는 그를 또 만
났습니다. 잠시, 이 사람이 진짜 거지인가, 철학하는 사람인가, 행위예술하는 사람인가,
생각하다가 그게 도대 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혼자 대답했습니다.
꼬부라진 낮은 허리로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묘한 웃음을 웃는 백인 노파도 만났습니다.
미안해 할 것이 없는데도 "이런 모습 보여줘서 미안하다"는 표정에 "이렇게라도 사 는
것이 축복이지요?" 하는 질문과, "그래도 오늘 저녁은 먹을 것이 좀 많네요" 하는
행복감과, "험한 도시지만 잘 구경하고 가세요" 하는 따스한 情과, "보고 또 보아봤자,
다 거기서 거기,그렇고 그렇답니다" 하는 관조어린 대답까지 실린, 그런 복잡 한
웃음을 흘리는 그녀.
종종 걸음으로 쓰레기통을 빠짐없이 뒤지면서 오는 그녀와 하릴없이 걷는 우리들은
보조가 맞았지요. 높은 곳과 낮은 곳, 부자와 가난한 자, 흑과 백, 예술이라는 인간의
꿈과 생존이라는 인간의 현실이 너무도 극명하게 대조되면서도 한데 어울어져 있는 그
도시의 모습이 내 가슴을 너무 힘들게 했던 것이었을까요?
별렀던 아들 녀석의 바이얼린 활은 너무 비싸서 다음 기회로 미루고, 시카고 심포니의
DVD 몇 개와 고흐와 고강의 그림 화첩을 전리품처럼 사들고, 북서쪽으로 더 가 보려고
했던 여행은 포기하고, 지친 허리와 아픈 목만 붙든 채로, "당신은 오늘도,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라고 외치는 사람을 뒤로 하고
오하이오로 돌아왔습니다.
이번 여행은 짧았지만, 연일 봄 같이 따뜻하여 오하이오에서 인디애나, 일리노이
시카고까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음식도 먹고 좋은 구경도 하고, 특히, 창문을
열어 놓고 바람을 만져 가면서사방으로 끝없이 지평선만 보이는 들판을 달리는 것이
좋았습니다.그러나, 내 머리를 계속해서 떠나지 않고 있는 그 그림자들...그 자리의
높낮음 말고, 그 갖춘 형색 말고, 그 城 같은 대저택에도 미술관에도, 시카고의
거리에도 걸려 있는 내 그림자들 말고, 내 진짜 모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왜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일까요...
말없이 밤운전하는 남편 곁에서 졸고 있는 동안에도, 차의 불빛들이 모두 검은 하늘에
붕붕 떠서 지상인지 천국인지 모를 강물이 되어디론가 흘러가고, 동경의 긴자 거리의
쓰레게통을 뒤지고 다니던 그 창백하던 남자, 시카고의 그 어두운 얼국빛의 걸인,
그리고 그 헤살거리며 웃던 노파가 자꾸만 내 눈앞에서 키카소의 기타를 치는 노
인과 교대로 오버랩 되면서 나타타나곤 했습니다.
늘 개 한 마리를 데리고 고속도로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그 결인은 너무 늦은 밤이라선지
어디로 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이드 파크 공원을 배회하며 깊은 눈으로 우리를
응시하던 그 남자도 지금쯤 이 도시 어딘가에서 잠이 들었겠지. 아파트 불빛이 보일 때까지,
나는 내내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2002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