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인 사랑에 대하여
몇 년전, 한 친구가 고명하신 스님 한 분을 모셔 왔으니 자기 집에 잠시 와 보라고 했다. 그 분이 말씀하신 것 중에서 다른 것은 다 그만 두고, 특히 마음에 남은 한 가지는 바로, 나는 남의 말을 잘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그 분은 내가 남의 말을 '함부로' 믿지 않는다는 듯인가, 내가 남의 말을 '도무지' 믿지 않는 뜻인가가 잠시 궁금하기도 하였지만, 하여튼, 나는 그 말이 기막히게 내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친구는 당황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그 분을 오랫동안 신뢰하면서 온집안의 대소사에 대해 꼭 상담을 드리고 기도를 부탁해 왔고 그 절에 지장보살님까지 앉혔던 터이니 왜 안그랬겠는가. 하여튼, 그 분이 어떤 뜻으로 그 말을 했거나 간에, 나는 그 분에 대해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호기심과 기대를 가지고 자기 앞에 앉은 사람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는 신기하였다. 어떤 무당은 기독교인이 들어가면 당신, 나가시오, 한다더니.
아닌게 아니라, 나는 언젠가부터, 남의 말을 잘 믿지 않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단적인 예로, 전에는 누군가에게 길을 물었을 때, 의심없이 가르쳐 준대로만 곧장 갔다. 그러나 지금은 가다가 조금만 이상하면 곧바로 다시 길을 묻곤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잘못 알았거나 잘못 말했거나 내가 잘못 알아들었을 수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특히, 눈이 밚이 나빠진 이후로는 나는 나 자신을 더욱 믿지 않게 되었다. 시력에 관계된 것은 물론이고, 그에 따른 판단에 대해서도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닌가, 자꾸만 재확인하게 된다..
언젠가 건축감리 일을 하시는 어느 분이, 건축 설계가 제대로 되었는지, 그것이 제대로 시공되었는지를 감리하는 일을 오래 해오다 보니, 매사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지고 부정적인 사고부터 하는 습관이 생겼다며, 그 점 때문에, 그 일을 그만 두고 싶고 아들에게는 그런 일을 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글을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감리뿐이겠는가, 형사나 검사나 감사나, 모든 인간행위에 대해 엄격한 판정을 내리고 시정을 요구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감리란 말하자면, 건축 행위를 자초지종 감시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건축과학적으로 설계와 시공이 얼마나 합리적으로 계획되고 진행되고 있는가를 검토하는 일에서부터, 건축미학적으로 그 환경과 문화에 얼마나 조화롭게 잘 어울리는가를 꼼꼼히 '의심의 눈'을 가지고 검토할 것이다. 그야말로 종합적이고 예술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 고도의 비판적인 사고를 요하는 일일 것이다.
비판적인 사고'는 그러나, '부정적 사고'와는 아주 다르다. 후자는 전자를 하기 위해 임의로 선택된 수단이거나 전자에 의해 도달된 결론일 수는 있어도 전자와는 판연히 다르다. 전자의 수단으로는 긍적적인 사고도 동원될 수 있고, 긍정과 부정뿐만이 아닌 다양한 답이 가능한 질문형식으로 제시될 수 있다. 아무튼, 후자는 그 자체로서 비판적 사고는 아니며 그 목적도 아니다. 바판적 사고의 목적은 비판 그 자체일 뿐이다.
비판적 사고는 열린 사고이다. 그 결과가 어떤 명제를 긍정하게 되든 부정하게 되든지 간에, 현재 자신이 가진 비판의 준거에 비추어 그것을 검토하되, 자신의 지적 파라다임만을 과신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통찰을 바탕으로 가설을 세우지만, 엄격한 과학적 검증의 절차와 치밀한 논증의 과정 그 자체에만 집중하며, 그 가설이나 결론에 집착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결론은 언제나 잠정적인 결론으로서, 언제라도 다른 지적 파라다임에 의해 '반증가능한 무엇'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비판적 사고는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항상 비판적이다. 그런 뜻에서 열린 생각인 것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열린 생각' 또는 '열린 마음'에 대해서 전혀 다르게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요약하면, 우리는 모든 주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모름지기 세상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시비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시비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시비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꽃처럼, 풀잎처럼 유순하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겸허히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상대의 결점까지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열린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곧잘, 사랑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풀잎 같은 사랑, 아니, 고슴도치 사랑이라고 해도 좋다, 모름지기, 사랑이라는 것은 그것에 대하여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판은 부젇적인 사고는 아니라고 해도, 애초부터 애정이 없거나 무관심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비판은, 차가운 논리의 칼, 심하게 말하면, ''괜히 쑤시고 파내어 깐죽거리고 생각없이 염장을 지르는' 일로 경원시한다.. 무슨 일에서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소위, 철학을 하려드는 사람은 골치 아프다. 말이 무슨 소용인가...무엇이든 의심없이, 유순하게, '그가 가진 그대로 ' 다 받아들여라... 무조건적인 사랑... 아, 숭고한 사랑이여....
아닌게 아니라, 때로, 이런 상반된 삶의 자세 사이에서 나도 갈등을 일으키곤 한다. 예리한 비판의 칼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겸허한 마음, 둘 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인데, 나는 엉거주춤 기로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가히, 지성이냐, 감성이냐의 갈림길이라고나 할까? 그 둘은 영영 서로 만날 수 없는 관계란 말인가? 비판이라는 이름의 사랑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며칠 전에 우연히, 친구들의 아들과 딸 사이를 소개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중매'를 서게 된 셈인데, 결론을 말하자면 두 사람이 서로 상대가 '이상형'이 아님을 첫눈에 확인하고 저녁도 먹지 않고 차만 한 잔씩 마시고 헤어졌다는 것이다. 일단은 그렇게 되었다. 그 이유를 각각 들어 보니, 참 간단하다. 하나는 너무 '부유한 티'가 나서 그랬고, 다른 하나는 너무 '깐깐한 티'가 나서 그랬다는 것이다. 참내...나는 '선보는 상황'이야말로 가장 비판적일 수 있도록 설정된 만남의 상황인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가장 비판적이기 어려운 상황의 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비판'이라는 말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 한다.
선보는 상황은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행위를 '있는 그대로', '가슴을 열고' 받아 들이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참, 그러고 보니 그 두 사람은 바로 그 두 가지 다른 길의 전형적인 예에 해당하는 듯한. 하나는 예술학,다른 하나는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각각 그 방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촌평도 거의 그렇지 않은가...그들은 첫눈에 서로를 정확히 꿰뚫은 것일까? 좀더 시간을 두고 가까이 들여다 보며 자신이 가진 모든 지력과 가슴으로 서로를 관찰하었다면, 좀더 다른 면면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선을 보아서 서로를 제대로 아는(비판하는) 경우는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처럼 어렵고, '연대'가 맞기를 기대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비판'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이 두 가지 대립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비판하려면 우선,그것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 관심이 없다면 그것이 어떻거나 신경쓸 일이 없을 것이다. 그가 가진 비판적인 사고는 우선 맨먼저 자신을 들여다 본다. 혹시라도, 어떤 것에 대한 관심 대신에 그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이 내 안에 감지된다면, 나는 맨 먼저 그것부터 제가해야 할 것이다.그것은 가설에서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추론의 과정도, 거친다고 해도 그야말로 폐쇄회로적인 사고로서, 그것은 열린 사고가 아니다. 하기야, 무조건적인 거부도 관심의 일종이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그런 상태에서는 사랑이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비판을 할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결점'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그와 꼭 반대의, 비판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예컨대, 거짓말을 잘 하는 결점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도 '나는 융통성이 있고 창의적인 그 사람이 좋다'는 식의 평가(비판)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한다는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긍정적인 평가만 한다면, 그것은 선한 의지에 의한 아름다운 비판은 될 수 있을지언정, 열린 사고라고 할 수는 없다. 열린 사고는 말 그대로 사고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것에도 붙들리지 않고 자유롭다는 것이지, 항상 긍정적이기만 한 사고는 아니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거부가 열린 사고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약,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어떤 것이 그 사람의 '결점'이라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그래도 그런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미라면 그는 이미 그 사람에 대해 내심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 때의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은 앞에서의 무조건적인 사랑, 또는 무조건적인 긍정과는 의미가 달라진다. 이 경우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은 비판적 사고와 구별된다고 말할 수가 없다.그것은 말하자면, 부정적 사고를 그 안에 포함한 긍정적 사고라고 할까,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비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것은 '남들이 보기에는 그것이 결점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결점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그의 장점으로 살릴 수 있다'는 식의, 더 넓은 의미에서의 긍정적 사고인 것이다.
비판은 반드시 무엇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정만이 아니라, 긍정과 부정을 떠나서, 첫인상이나 선입견을 떠나서, 그것의 가치를 제대로 드러내는 일이다. '제대로 드러낸다'라는 말은 그것의 지향하는 가치를 모두 살려낸다는 말이다. 무엇엔가에 붙들려서 떠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열린 사고가 아니다. 우리가 무슨 첫눈에 모든 걸 알아 버리는 도사인가? 열린 마음이란 모든 것에 대해서 일단 가능태로 대한다. 지금 현재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언제나 다시 의심을 해보는 마음이다. 자신의 평가에 대해서도 요지부동의 '확고한 신념' 대신에 언제든지 달라질 수도 있는 잠정적인 결론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비판적 사고가 마치,사랑이라는 만고청청의 길에 걸림돌이라도 되는 것으로 경원시 되곤 한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면서, 비판이라는 것을 애초에 차단하는, 진실을 덮고 얼버무리는 철학 아닌 처세의 '철학'이 원만한 인격이나 중용이니 하는 이름들을 업고 행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철학'이 얼마나 많은 경우에 같은 것을 다르다고 하고 다른 것을 같다고 하며 우리들의 마음을 붙들고 흐리게 하는가. 진짜 사랑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첫인상을 받아들이고 난 그 이후부터이다. 열린 마음으로 이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되, 더욱 가까이 들여다 보면서 그 보이는 것의 내면에 있는 가치를 제대로 살려내고자 하는 것.이것이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비판이다.
모든 비판 또는 평가는 현재까지의 성취에 대한 판정이 아니라 미래의 성장을 위한 피드백의 자료를 구성하는 일이다.그것은 곧 사랑이다. 비판은 사실상, '관심' 이상으로, 그가 그 '결점'까지도 사랑의 마음으로 들여다 보는 일이다. 깊히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똑 같이 보일 수 있었던 것도 사랑의 마음으로 더 생각을 하면 다른 것이 될 수도 있고, 사랑의 마음으로 생각을 더해 보면, 다른 것도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비판이다. 생각을 더 하면 같은 '부유한 티'나 '깐깐한 티'도 전혀 다른 의미룰 구성하는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늘 '그러므로'의 사랑이기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일 수 있어야 한다.
얼마 전에 '부부싸움에서는 무조건 이겨라'라는 글 제목을 보고 기득권자는 무조건 자기 권리를 옹호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무조건 그들을 공격하고 끌어 내리라는 소리이겠지, 제목이 주는 선입견에 갇혀 그냥 지나치려다가 좀더 유심히 보았다.그게 아니었다. 이긴다는 것은 부부가 서로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끝까지 도와야 한다는, 말하자면 건전한 윈윈식 부부싸움에 관한 것이었다. 그 방법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은 곧이곧대로, 즉석에서 시비를 가리라는 것도 아니고, 한 사람이 화를 내면 다른 사람이 참아주고, 그러나 언젠가는 두 사람의 진의가 서로 전달 되도록 오래 참고 바라보면서 결국 부부가 함께 바른 길로 승리해 나가는 길을 택하라는 것이었다.
무엇인가를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여, 끝까지 애정을 가지고 그것과 치열하게 싸우자. 나는 그 감리자가, 세상을 보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진실로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럴 때가 있듯이, 때로, 지치고 남루해져서 그렇게 투정하고 푸념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그 일을 기어이 그만 두게 되는 날도 오겠지. 그러나, 나는 그가 적어도 자신의 비판적인 사고 그 자체 때문에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가 그것 때문에 떠난다고 한다면 그는 더 이상 비판적인 사고를 하지 않기로 작정을 하는 것이며, 열린 사고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떠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