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못믿을 손, 존재여...

해선녀 2005. 5. 12. 23:41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별장 같은 집이다. 수시로 드나들며 잠시 머무는 그런 집이다. 우리는 얼뜻 얼뜻 비치는 그 주인의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을까, 그것을 궁금히 여긴다. 우리는 그가 곧 다른 곳으로 떠날 수도 있고 갔다가도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 또한 다른 별장으로 언제고 떠나려고 분주히 보따리를 풀었다 쌌다 하고 있다. 서로가 그런 입장이라는 것을 너무 잘 잘아서 우리는 혹은 초라한, 혹은 번드르한 서로의 지금 집의 모습을 그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별장은 그러나, 여관과는 다르다. 그 집은 결코 타의에 의해 거기 있지 않다. 그 집은 어쨌거나 우리 자신이  원하는대로 지어졌고 우리 자신이 허물기도 하며 우리가 떠난 후에  빈집으로 남기도 하는 그런 집이다.. 주인이 떠난 빈집은 그가 벗어 놓고 간 허물과도 같다. 언제 다시 돌아올 수도 있지만 영영 버려진 채 사그라지기 십상인 그런 허물.  우리는 그러나 그가, 멀리 가지 못하고 그 주변에 퍼져 있는 대기처럼 그의 체취를 가까이 느낀다. 그의 체취는 우리의 들숨에 몰려 들어와 폐부를 찌르기도 하고 배어들기도 하며, 다시 날숨이 되어 우리로부터 흔적없이 빠져 나가기도 한다. 

 

언어는 항상 존재 간의 경계에 관여한다. .크고 작은 씨줄과 날줄을 힘이 닿는 만큼 휙 던져 잠시 하늘에 의식의 금을 그어 놓는 존재. 여기까지가 내 존재의 영역이요, 하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 결계는 곧 무너지고 흐트러져 대기 중으로 사라져 들어 간다, 제트기의 뒷꽁무니에 매달린 하얀 구름처럼. 그렇게 언어는 뱉어지면서 공간을 확보하고 나누고 배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재로 삼아 지붕도 그리고 창문도 내며 집을 짓는다. 그러나 그렇게 지어진 집만 가지고 그 존재의 모든 것이 포착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평생 동안 집만 짓다가 볼 일 다 보는 사람처럼집을 짓고 또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집은 물론이고 존재 그 자체도 믿을 것이 못된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영원하다 하겠는가?.영원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존재가 돌아가야 할 본집이리라. 그것은 존재의 고향이요 근원이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우리가 존재를 논하기 위한 논리적 요청이자 당위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현재 집의 한계 속에서만 거주한다. 그리고, 그 별장 속에서 내다 본 세상은  다른 집에서 내다 본 세상과 다를 수 밖에 없다. 다른 집에서 본 세상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 하면서도 그 짐에 들어가 보았자 잠시 머물 뿐,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의 한계 속으로 돌아 오곤 한다. 그 누가 있어서, 모든 존재의 집들에 무시로 드나들며 모든 집의 전망을 다 즐길 수 있으랴.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그림도 음악도 존재의 집이다. 조건부 무작위성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다. 존재의 한계성 안에서 세상을 무작위로 포획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는 어쩌면, 독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 문제에 대해 실제로 조건부 무작위 통계를 내어서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어떤 조건 하에서 짙고 옅은 색상표 같은 것으로 배열된다.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세상은 조건부 시각의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언제나 순서지워지는 것이다. 사진이 빛을 조절함으로서 새로운 색의 배열을 얻는 것처럼. 조금만 조건을 달리하면 곧 흐트러져 다시 배열되는 자력에의 이끌림 같은 존재, 존재들의 위상이여...

 

음악은 그렇게 잠시라도 차려져 보여질 화판조차 없다. 소리는 언어보다도, 그림보다도, 더 허망하다. 다양한 주파수의 감각요소를 동원하여 존재가 염원하는 존재의 근원, 이데야의 세계를 향한 노정에 존재의 집을 지어 보지만, 그 재료로 사용되는 어느 소리 요소도 우리는 잡는 순간 다시 놓아 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천상의 악기가 아닌 이상, 그 하나의 소리요소에 모든 진실이 영원히 들어 있다고 단언할 자는 아무도 없다. 

 

언어는 그러나, 그림이나 음악 못지않은 풍부한 감성적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말의 울림이자 존재의 여운이다. 말은 지속성이다. 그냥 소리가 아닌, 말은 결코 정지해 있는 매마른 로고스적 구조물이 아니라, 우리의 감성의 아킬레스 건을 지속적으로 건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뱉은 말이 어떤 다른 존재에게 어떤 로고스적 제시와 감성적 울림으로 다가 가서 부딪쳐서 메아리로 돌아 오는지, 보른 채로 집을 떠나기도 한다. 존재가 그 집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조차도, 우리는 그 메아리는 커녕, 자기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도 한다.

 

나는 지금 또 이렇게 주절주절 뱉어놓은 집에 얼마나 오래 머물어 있을까, 오늘밤 당장, 아니면 이미 지금, 어디로 떠나고 있는 것일까?  그건 나도 모른다. 혹시, 이 집에 누가 잠시 들리거든, 내 존재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그 느낌이나,낙서처럼 바람벽에 적어 놓아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