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둥지를 떠난 막내에게 / 꽃피는 4월에
떠나기 며칠전, 막내의 첫 운전으로 간 백운 호수에서...
저녁 준비를 해놓고, 어제 담은 열무김치 간을 다시 보고 김치냉장고에 넣었다. 갓 자란 봄 솎음 열무...보드랍다. 시장에서 사 온 뻥튀기를 먹어 본다. 네가 있었으면 잘 먹을텐데..아빠는 오늘 금요 세미나, 열 시는 넘어야 오실 것이다. 여기 저기 글칸들을 기웃거려 본다. .삶의 곤고함에 뒤늦은 회한에 젖는 사람도, 새로운 배움의 희열에 가득 찬 사람도, 그 모든 것들의 허무함에 절망하는 사람도, 그 허무를 오히려 즐기려는 사람도, 오늘 저녁엔 모두 다 자유로워 보인다.어쨌거나, 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으므로...
네가 간 지 꼭 한 달, 새끼들을 다 떠나 보낸 둥지에 남은 부모의 심정이 이런 것이구나 실감하며 3월이 다 지나가고 이제는 4월이다. 내내 네가 아직도 여기 있는 듯 착각하거나, 지금쯤 무얼 할까, 그 생각을 떨치지 못하면서 지냈다...형네 식구들과 좁은 공간에서 복닥이며 지내는 모습이 눈에 자꾸 밟히더니 지금은 썰렁한 빈 집에 혼자 덜렁 있겟구나. 그런 생각에 또 전화기를 들곤 하지만, 끊고 나면 또 금방 가슴이 아릿해진다. .
식당에서 음식 포장일을 하고 있다고 했을 땐 빨리 써빙 일을 시작하기를 기다렸는데, 어제는 막상, 다음 주부터는 풀타임으로 사무실 청소일을 진짜로 시작할 거라는 말을 듣고 나니 반가우면서도 또 걱정이 된다. 아무 일이나 하면서 일단 언어와 문화를 배워야 한다고 우리 모두 의기투합했고, 너는 지금 일시간에 비해 보수가 넉넉한 일자리를 그렇게 빨리 얻은 것을 기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내가 그러면 안되지. 마음을 다시 추스린다. 27년 전, 꼭 이맘 때, 내가 처음 미국이라는 곳에 가서 중국식당에서 풀타임으로 주방일부터 시작했을 때 나도 얼마나 기뻤던가.
이것 저것, 학교 게시판에 붙은 시간당 3불 50전짜리 파트타임 일만 하다가 하루 5시간씩 내내 일하고 600불이나 받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도 정말 기뻤었다. 그건 그 때 내가 그만 두고 간 중학교 교사 월급의 두 배 반이나 되는데다가 수업이 없는 날엔 웨이트리스 일을 서너 시간씩 더 하면 또 삼사백북을 더 벌 수 있었다. 그것으로 등록금은 면테 받았지만 우리 생활비를 모두 댈 수 있었고 마지막에는 헤드 웨이트리스를 거쳐 그 식당의 호스테스 일도 하면서 좀더 일이 수월해졌다.
나는 아직도 네가 영어연수를 간 셈으로 얼마간 있다가 돌아와서 대학을 여기서 마저 끝내게 될 수도 있고, 거기서 다시 대학에 들어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좀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너의 미래를 탐색해 봐야겠지. 나는 무조건, 네가 지금 일을 재미있어 하고, 처음으로 원배드룸의 넉넉한 공간을 혼자 쓰면서 독립생활을 시작한 것이 마음 든든하고, 청소 일과 식당 일 두 가지 다를 해보겠다는 생각도 참 대견하다. 그래, 우선은 그렇게 도전해 볼 만하지....
그렇지만, 나는 네가 너무 무리하게 일에만 매달리지 말기를 바란다. 그래, 앞으로는 수영장과 피트니스 센터가 있는 아파트로 가서, 일 끝내고 돌아 오면 몸도 풀고 여기 저기 다니면서 더 많은 사람들도 사귀고, 주말엔 야구와 싸이클링 동호회 같은 곳에도 가면서 살면 좋겠구나.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고 생각하면서 네 길을 찾으려면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니까..그렇게 자유롭게 달려 가다 보면 시야가 트이게 되지. 어쨌거나, 밝고 건강하게 시작하는 네 모습이 참 자랑스럽다.
아까 초저녁에 여기까지 쓰고 지금 일어났다. 새벽 네시 반. 아빠가 커피를 올려 놓으셨네. 네가 쓰던 방에서 오디오를 켜 놓고 노트북으로 뭘 쓰고 계신다. 요즘은 일보다는 공부가 더 재미있으신가 봐. 골프는 많이 줄이고 교수협의회 분들과 산에 열심히 가신다. 이번 여름엔 히말라야 K2에 도전하신단다...
그래, 우리 그렇게, 각자 제 레인을 열심히 달리자. 형네는 형네대로, 너는 너대로, 그리고 우린 우리대로, 모두 자유롭게...오로지, 그 자유함에 의해 우린 아름다울 수 있는 거야. 각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어도, 자유로운 영혼, 그런 영혼들이 우리들이어야 해, 우리가 처한 모든 것에 붙들리지 않고 그것을 소유하지도 않으면서도 거기에 원하는만큼 몰입할 수 있는 것, 또한 그러한 자기 자신까지도 관조하면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그것이 자유가 아닐까?
나는 오직 몸만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을 존중한다. 우리는 모두 자유롭기 위해 태어났지. 꽃피는 봄 4월은 특히 그 쉽지 않은, 자유를 위해 있는 달이다. 자유롭지도 못하면서 피어나는 꽃이 있다면 그 4월은 잔인한 달일 것이다. 조그만 여유공간의 자유에서부터 영혼의 자유에까지,모든 것을 동시에 다 누리지는 못해도, 우리,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가자. .다만, 우리는 언제나, 각자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을 먼저 생각하자.
시시때때로, 영어로 말하는 말소리들 틈에서, 너도 자신이 하고 있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을 믿는다. 네 인생의 주인은 너 자신이고 네 말을 가장 잘 알아듣는 사람도 너이니까. 나도, 내가 어떤 제약과 한계 속에 갇히게 되더라도 내 영혼만은 언제까지나 자유이고 싶다. 나는 나, 내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정성을 기울여 둘여다 보고 찾아 나설 것이다.
네가 밥을 어떻게 해먹는지, 반찬을 어떻게 해서 먹는지, 생각하면 참 아찔하기도 하다. 식당에서 한 끼는 해결한다지만, 매일 매일, 네가 무엇을 만들어 먹을 수 있을까,궁금하면서도 제대로 묻지도 못하였구나. 너는 조심성이 있고 깔끔하니까 잘 해내겠지, 막연히 그렇게만 믿고 싶은 마음이다...실수도 연발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삶의 지혜를 터득해 나가겠지? 형은 미주리 갔던 건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고 해서 또 전화기를 들려다가 만다. 거기도 잘 하고 있겠지들...
꽃피는 4월에, 네 시작하는 모든 일에 행운을 빈다. 그래, 정윤아, 이제 아침이 밝아 오는구나. 아자, 아자, Go,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