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자유인
참자유인. 누가 옆에 없다고 외롭고, 모여든다고 외롭지 않은 게 아니라는 김훈. 끝없이 열려 있는 자기성찰의 노정. 나도 감히, 인생의 목표가 그것이라고 늘 믿어 왔지만, 그 목표를 언제까지 놓치지 않고 갈 수가 있을까?
친외가 다해서 집안에서 아직살아계시는 유일한 윗대 어른, 시이모님. 만92세. 내게 늘 전화하셔서,그 동안 어렵게 살아 오시면서 켜켜이 쌓여 온원망과 서러움과 회한의말씀을 쏟아내신다. 말 그대로, 백번도 더 듣는 옛이야기들을계속 반복하시는 것을 들으면 그 굳어버린 사고와 감성의 쳇바퀴를 못벗어나는 모습이 정말, 연민스럽다. 그옛날, 어머니도 그러셨다. 그래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당장 그 문을 열고 나와서 새로운 행복, 누구에게도 더 이상, 매달리지도 끄달리지도않는자유로운 영혼을 회복하실 것 같다가도 또 금새, 오오, 정말, 내가 왜 안 죽는지 모르겠어.오래 사는 게 정말, 정말, 욕이다. 그래도, 이렇게 하소연이라도 들어 줄 니가 있는 것만 해도 너무 고맙다...를 반복하신다. 마치, 존재이유가 지금까지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것에만 있다는 듯이.
근데, 20년 후, 내가 살아 있다면, 나도 저렇지 않을 자신이 없다. 이미, 기억력이 떨어진 건 물론이고, 인지가 더뎌지고 논리가 흔들리고 판단이 흐려지는 일이 자주 자주 생긴다. 눈탓만 아니게. 마지막까지, 명징한 영혼으로 갈 수 있기를 바라지는 못해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아침에도,며칠 전 새로 사 온 라면 한 봉지를 내가 어디다 둘 수 있었을까? 이 맛있는 빵 이름이 뭐더라 이번 마트 주문은 언제, 뭐로 하지? 내가 오늘 전화해야 할 곳들은? 이런 소소한 생각들로 한참 머리를 분주하게 돌렸지만, 저녁이 다 된 지금도 그 빵 이름은 아직도 모르겠다.
너무나도 친숙하던 이름들이내 머리카락처럼 하애지고 빠져 도망간다. 택시기사에게 예술의 전당을 전설의 고향으로 말해도 알아 듣고 데려
다 준다더니, 어쩌면 내가 나이답지 않게 그런 것들로 똑똑함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오만일지도 모른다노인답게, 좀은 바보처럼, 길가다가 열 번도 더 길을 묻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살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 곧, 이름같은 거, 문법 같은 거, 철자 같은 거, 다 따지지도 말고, 그저, 그거 있잖아? 왜 그런 거 말이야, 이러면서 사는 게 노인다운 자연스러움이 아닐까? 노인이 되면, 그 영혼은 오히려, 그런 이름들에 더 이상 갇히지 않고, 이름들 너머에 있는 의미들을 읽어 내고 분석하고 종합하는 데서 그 명징성을 유지해야 할 지 모른다...
이런 위로를 스스로에게 하며 다독거리며, 저녁을 맞고 있다. 어렵사리, 그래도 오늘, 모레 양평행 스케쥴을 최대한으로 즐겁게 마련했다. 계약과정에서 유난히 까다로운 주문을 계속하는 통에 계약서를 너댓 번이나 고쳐 가며 새로 쓰게 했던 새 세입자와 무슨 이야기들을 더 해야 할까? 이런 거 나 좀더 생각하자. 젊고 당당한 그 사람과 그래도 가장 합리적으로 따뜻한 대화가 가능해져 가고 있어서 기분이 좋다. 오,제발, 저 김훈이 말하는 돈몰의 시간에 들어섰더라도, 끝까지 가운뎃길, 큰길을 놓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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