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걱거리는 나무게단이 있는 집
어제는, 담쟁이 덮힌 오래된 붉은 벽돌건물속,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이 끊어져서 교실에도 못가고, 시험시간에도 늦어버리는 중학교 시절의 꿈을 꾸었다. 오래 전에도 종종 꾸었던 꿈. 아직도 성장이 덜 끝난 아이가 내 안에 앉아 있는 것일까? 오래 전 가 본, 코넥티컷의 큰고모님댁의 하얀 목조집에도 그런 나무계단이 있었다. 아흔이 되신 고모님은 그 계단을 기어서 오르내리며, 조카내외가 온다고 사흘을 음식을 만들며 기다리셨다며, 여전히 총기있는 그 하얀 얼굴로 웃으셨다. 내가 꼭 닮았다며, 나를 보면 늘 환하게 웃으시던 고모님. 빚에 몰려 비단공장이 망하고 고모부님이 돌아 가신 후, 고모님은 우리집 마당 한 켠에 작은 함석집을 지어 사시며 한 다라이씩 계란을 받아다가 머리에 이고 시장을 돌며 팔기도 하셨다. 고모님에게는 아홉 자식들 중 아직도 다섯 명의 아이들이 자립하지 못하고 슬하에 남아 있었다. 미국으로 이민 가서도 화훼농장에서 수 십년, 꽃단을 묶으며 마지막까지 일하시고, 그 연금까지 다 자식들을 위해 쓰시다 가셨다. 고모님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꼴난 관광여행길이 무에 그리 바쁘다고,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서둘러 헤어진 후, 다시는 못 뵈었다.
고모님은 고종사촌 언니가 모시고 살고 있었다 부산의 이층 양옥집, 커다란 유리창에 레이스 달린 하얀 커튼이 있는 커다란 방을 혼자 쓰며 공부하던 그 언니는 경남여고의 재원이었었다. 방학이면 외할머니댁에 와서 우리들 사촌, 육촌들이 모여 노는 것을 좋아했었다. 증조부님의 재실이 있는 언덕에 올라, 강물을 내려다 보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던 내외종 형제들 중에서도, 얼굴 훤한 미남에 테너 목소리까지 멋지게 뽑던 의과대학생, 큰집 큰오빠를 세라 교복에, 양갈래로 머리를 땋은 눈이 예쁜 여고생, 그 언니가 사랑하게 된 것은 거의 운명과도 같았다. 부산에서 대구로, 약학에서 법학과로, 학교까지 옮겨서 작은집에서 다녔지만, 결국, 온집안에 큰문제를 일으킨 그 '미친' 언니를 '대쪽판사'였던 작은 아버지가 뒷방에 가두어 버렸다. 타이프라이터 하나 들고, 어느 날, 그 방을 탈출한 언니는 평택 미군부대 앞에서 국제결혼하는 여자들 서류를 대행하는 일을 하다가, 미국인 선교사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내뺐었다. 그 후, 고모네 남은 식구들은 모두 그 언니를 따라 이민을 갔었다...
한밤중에 도착하여,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 자려고 인사하러 간 나에게 놀랍게도, 고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 년이 지 남편을 죽였어. 그 착하디 착한 사람이 저 못된 성질 때문에 고생만 하다가 죽은 거야... '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신 듯하던 고모님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무원 은퇴를 앞두고 있는 노년한 딸을 '년'이라는 말로 부르시는 데서부터 놀라 머뭇거리는 나를 눈치채시고는 얼른, 읽고 계시던 성경책을 다시 펴시며 건너가 자라고 손짓을 하셨다. 그 때, 나는 남편을 혼자 자게 하고 고모님과 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아침에 일어나 오후에 퇴근하면 함께 나가자며 출근한 언니를 기다리지 못하고 나와 버린 것이다. 남편은 산책이라도 다녀 오라 하고, 언니가 올 때까지, 고모님의 이야기를 들었어야 하는데. 그 엣날, 고모님이 어렸을 적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야기에서부터, 우리집 마당 한 쪽에서 숨죽이며 사시던 때의 이야기, 영어도 모르면서 그 수십년, 이민생활을 어떻게 다 이겨 내셨는지를 들었어야 하는데. 아, 어느 일본인 목사의 부인이 되었더던, 그 순한 미소와 조곤조곤한 목소리의 사촌동생 은숙이의 이야기도 궁금했는데. 하지만, 나중에 그 언니와의 통화에서, 언니는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동생들이 얼마나 엄마를 힘들게 하였던지, 엄마는 또 얼마나 바보같이 그 동생들에게 '이용만 당하면서' 언니를 힘들게 하였던지, 나로서는 다 듣기 힘들었을 이야기들을 내게 털어 놓지 못해서 너무 아쉽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사는 게 다 그렇지. 속엣말을 다 전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나도 어느 날, 맨 마지막 날까지도,어쩌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내 아이들이 와도, 아무 말도 전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될 수도 있지. 아, 지금까지도, 꿈에서는 늘, 대여섯살배기, 아직, 너무도여리고 아치랍기만 한 어린애의 모습들로만 나타나는 내 아이들하고도.아무튼, 지금까지도 그런 꿈을 꾸는 것을 보면, 나도 지난 날, 그렇게 얼결에 영 귾어져 버린 인연들이 너무 어이없는 거다. 온라인 오프라인의 수많은 만남들이 언제라도 다시 이으면 된다는 생각은 이미 착각이었음을 아직도, 어렴풋이만 알고 있는 거다. 미련이다. 내게서 멀어져 간 사람들뿐이랴. 아침저녁으로 눈맞추고 살면서도, 딴엔,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정의롭다고 믿었던 내 판단들, 생각들, 가슴시린 추억들, 회한들이 대화의 미숙으로 공유되지 못한 채, 소멸되고 왜곡되어 가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이제 와서 굳이, 누구탓이랄 것조차 없고, 인간이 살아가는 일, 그 자체의 한계임을 너무도 잘 알기에, 부질없음을 잘 알면서도, 내 안에는, 중학교 시절의 내가 아직도, 그 끊어진 계단을 기어이, 이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버둥거리며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다. 딴엔, '정답'이랍시고 써낼 시험시간은 다가 오는데, 어찌 어찌, 게단을 올라 가서도, 교실을 찾을 수도 없는데, 다시 내려 오면, 계단 아래 허공은 깊고 어두운 심연일 뿐인데. 그래, 그저, 주저앉아, 오래 길이 든 따뜻한 나무의 체온에 기대며 누군가, 도와 줄 사람이라도 오려는지, 기다리다가 잠이 깨는 것이다.
며칠 전엔, 이제 80이 다 된 내 친언니가 카톡으로 보내 준 치매노인들의 우스개 중에 대충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야, 나는 요즘,계단에 서서도, 내가 계단을 오르던 중이었던지, 내려 가고 있던 중이었던지를 모르겠을 때가 있어. 야, 말도 마라. 우리가 지금, 왜 여기 있는 거지? 우리는 버스를 타러 온 거야, 여기서 방금, 버스를 내린 거야? 나는 그것도 모르겠다구. ' 저 두 가지 말 외에도 한 가지 더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저 둘마저도,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도 모르겠다. 하하, 어쨌든, 나는 지금, 붉은 벽돌집이든, 하얀 목조집이든,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이 있는, 담쟁이 덮힌 오래된 집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제, 그런 집을 닮았으면 좋겠다. 뒤꼍이나 옆구리쯤을 스치는 바람같은 씁쓸함은 한 번씩, 친구처럼 찾아와 줘도 좋은 집. 그래도, 그 옛날, '장미빛 인생'을 못내 그리워 하며, 한 번씩 목놓아 우시는 시이모님의 한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은, 계단은 삐걱거려도, 바람 잘 통하는 집. 햇빛나면 반짝이고 바람 불면 살랑거리고, 비가 오면 젖을 줄도 아는 담쟁이잎들이 기어 오르는 벽. 그 벽 속의 은밀한 계단을 그 때 그 고모처럼 느리지만, 기어서라도, 혼자서 오르내리며, 오르던 중이거나 내리던 중이거나, 미련이나 오해같은 건 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냅두고, 몇 군데,아귀가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소리쯤이야, 오히려, 즐기고 있는집. 계단 어느 칸에서나, 잠시, 판단중지하고 망연히 앉아 내다 보면,완벽치 못한 나 자신이나 창문밖 풍경들이 이제는 모두 다 아름답게만 보이는 평화로운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