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그리고 아름다운 인연들
수목원엔 과연, 미루님이 그렇게 꼭 가자 하실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해변을 끼고 있는 넓디 넓은 수목원의 이름도 처음 듣는 수많은 나무들과 꽃들도 놀라웠지만, 후원회에 가입하신 미루님 덕분에,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는 목련원까지 구경할 수 있어서, 정말, 큰 행운이었다. 마침, '후원의 날'이어서, 연구원들의 설명을 들으며, 만개하기 시작한 목련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미루님은 에전에도 여기를 방문하였다가 감동을 받고, 민원장님에게 작은 선물을 보내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 분이 돌아 가시고 한참이 지난 후, 사무장님이 그 답장을 보내 왔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원장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답장을드려 달라고 부탁했던 일을 미처 챙기지 못하고 지내다가 이제야,답을 하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 목련나무 아래에서 목련차와 떡을 먹으며, 피스 코 단원으로 한국에 왔던 인연으로 수목원을 처음 만들고, 이름도 한국이름으로 바꾸었다는 민병갈 원장님이 마지막에 어머니까지 모시고 와서 함께 살았다는 한옥을 바라 보며, 그 특별한 마음을 생각했다. 그 엣날, 플로리다 살 적에 자주 갔던 멕클레이 가든에서 보았던 매그놀리아와 아젤리야 꽃나무들도 떠올렸다.
내가 아직 젊었던 그 시절, 주말이면, 일과 공부와 살림살이로 피곤에 쩔은 나를 데리고 가서, 그 나무 아래에 세워 놓고 사진을 찍어 주던 그도 떠올렸다. 억지로라도 방긋 웃으며 찍었던 기억 때문에, 그 사진들을 볼 때마다 나는 늘 마음이 시렸지만, 예쁘지도 못한 내 얼굴을 액자로 만들어 벽에 잔뜩 걸어 놓고 좋아라 바라 보는 그를 보면, 시리던 마음도 녹아 버리곤 하던 그 때, 그 시절, 너무 힘들어 절대로 그리워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시절도 아슴히 그리워지곤 하는 건 순전히, 그것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이라는 것 때문일까? 목백일홍, 태산목, 후박나무도 아직, 잘 구별하지 못하고, 그저, 백목련, 자목련 밖에 구별하지 못하는 나와는 달리, 온갖 나무와 꽃들을 다 잘 알아 보고 감탄을 연발하는 젊은 친구들 옆에서,그저, 될수록 가까이, 꽃들을 들여다 보고, 만져도 보며, 덩달아 어린아이처럼 행복해지는 것은 순전히, 이나마라도, 꽃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것만인 건 아니다. 그와 내가 살아낸 그 세월들이 만들고 담아냈던 삶의 의미들 때문이다. 그것을 도모하고 이어갔던 그와의 인연과 기억들 때문인 것이다. 때때로, 길을 잃고 헤매면서 내가 그에게 '당하기만' 하고 있다는 생각도 하였지만, 사실, 알고 보면, 모두 내가 만든 일들이다. 근본적으로, 어떤 경우에도, 내가 나답게 하지 않은 일은 없다. 그래서, 내 삶이 소중한 것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불행했다면, 그만큼, 내 영혼이 내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기에는 너무 미약하거나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맥클레이가, 민병갈이, 어떤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어떤 인연으로 저런 정원들을 가꾸어 나갔던지는 잘 모르지만, 앞으로도 내가 어떤 인연을 더 만들어 나갈른지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은 다 나 자신이 규정한 인생의 의미에 따른 내 몫이고 내 탓이라는 것.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은 제 정원을 제 생긴대로, 가꾸며 살아 간다. '결혼하라,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지 마라, 그 또한 후회할 것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저지르는 사람이나 후회하는 사라이나, 그것은 그 자신이다.
나에게 있어서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이 들면서야 분명해진 그 답은, 인생이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 무슨 꽃을 피웠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 어떻게 그 꽃을 피웠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봄날은 간다. 그냥, 가는 게 아니라, 누군가는 주춤거리는 것을 보며 부추기면서 가고, 숨기고 얼버무리고 거짓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타박질도 하며 가고, 또 누군가, 아둥대는 사람에게는 하하 웃으며 간다. 봄날은 무책임하게 간다. 어떻게 가도, 다 우리들 탓이다. 이젠 살 날이 그리 많지 않은 이 남지 않은 나에게는, 이젠 정말, 무엇을 하라고가 아니라, 사노 요꼬의 권유대로, 아무 것도 열심히 하지 말고, 어떻게 더 아름답고 소중한 자신과 인연들을 잘 마무리해 나갈 것인지나 생각하면서 살라고 다독거리며 간다. 맞다. 봄, 봄, 봄, 이 흐린 눈으로라도, 내 안도 내 바깥도, 제발, 잘 보고, 잘 생각하고,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만 살아갈 일이다. 이제 와 내 정원은, 그것이 무슨 꽃이든 간에, 맑고 순한 향기로 피었다가 조용히 져가는 그런 꽃들만 피고 지는 꽃밭이었으면 좋겠다.
어제, 일요일엔, 태오에비 페이스북에도 아름다운 인연 이야기가 올라 와 있었다.
It was winter of 2011-2012. I had been going through extensive rehab in Korea after a devastating stroke. Mr. Harris was visiting Seoul at the time. When I told him how I wanted to go back to Eastman after rehab and finish the degree, he told me that I could come live with him at his place, which is only a few minutes walk from school. "It will be nice, two old people looking after each other", he said.
For three years, I woke up almost every morning to him practicing JS Bac...h cello suites. He practiced everyday, almost religiously. Not because he had concerts lined up like he used to in the past, nor because he had anything to prove to anyone. I have yet to ask him why, but it felt obvious to me that practicing the cello and music itself had become a part of his being, a part of his life that is inseparable no matter what.
We live. Sometimes we may do incredible things in life, sometimes not so much... but we all live a life in which some of us are lucky enough to find something that gives a purpose, meaning to our lives.
I never had any opportunities to study music with Mr. Harris in any capacity, but I learned something that no other teacher ever taught me; music is not something he does, it is something he lives. I learned how music can become a living part of ourselves, just like one of our toes or fingers.
Mr. Harris is here in Sioux Falls, SD. He came to visit my family and I, as well as share some of his musical experience and insight with students at Augustana University. "I just want to come see you and Eunho, I am not trying to make money or become famous..." (been there, done that).
I feel deeply honored and thank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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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걸 또 번역 안 할 수가 있나?ㅎ
2011-2012년 겨울이었다. 심각한 뇌졸증을 겪었던 내가 한국에 가서 고강도 재활치료를 받고 있을 때였는데, 그 때 마침, 해리스 교수님도 한국을 방문 중이었다. 치료를 끝내면, 나는 꼭 이스트만으로 돌아가서 확위를 끝내고 싶다고 말씀 드렸더니, 그는, 그러면, 우리집에 와서 함께 살자고 하셨다. 그의 집은 학교에서 바로 몇 분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어다. "두 늙은이가 서로 돌보면서 살면 좋지 않겠나?" 그는 그랬다.
3년 동안 거의 매일 아침, 나는 그가 연습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으곡들을 들으며 잠을 깼다. 그것은 마치, 종교와도 같았다. 그에게는 이미 더 이상, 예전처럼 연주회나 그의 연주를 들려 주어야만 할 어떤 일들이 줄을 서 있지 않았는데도, 그는 매일같이 그렇게 했다. 나는 왜 그러는지를 기어이 묻고 말았지만, 그에게는 첼로연주와 음악이라는 그 자체가 그의 존재의 일부란는 것,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그 존재와 분리불가능한 그의 삶의 일부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해 보였다.
삶을 살아 가다 보면, 때로는 대단한 일을 해낼 때도 있지만.별일 없이, 그저 그런 날들을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우리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 같은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해리스 교수한테서는 어떤 음악공부도 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다른 선생님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음악이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는 것. 나는 우리의 손가락, 발가락이 그렇듯, 음악이 어떻게 우리 자신의 살아있는 한 부분이 될 수 있는지를 그로부터 배웠다.
해리스 교수가 지금 여기, 사우스다코다의 수 폴즈에 오셨다. 그는 우리 가족을 만나러 오셨지만, 나는 우리 오거스티나 대학의 학생들이 그의 음악과 함께 그의 지혜를 많이 나누어 가지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자네와 은호를 만나러 온 것이지, 더 이상, 돈을 벌거나 이름을 내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네."(갔노라, 했노라, 이러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고.)
너무도 영광스럽고 감사합니다.
Piano Trio in c minor, op. 1, no. 3 - Ludwig van Beethoven
Four Seasons of Buenos Aires - Astor Piazzoll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