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어느 봄날 오후에
해선녀
2016. 5. 8. 06:33
언제나처럼, 운동화와 챙모자와 바지차림으로 칠순이 다 된 내가 팔순은 되었으리라, 자그마한 키에, 예쁜 가방 하나 손에 들고, 긴 지하철 통로의 인파 속을 혼자서 걸어가는 한 노인을 보았다. 조붓한 어깨에 허리는 아직 꼿꼿하고 좀 높은 굽의 하얀 구두를 신고 나풀나풀 걸어 간다. 자줏빛 모자에 같은 색의 짧은 윗도리 아래로 프릴이 달린 청보라색 긴 치맛자락이 발목에서 살랑대는 촉감이 내 발목까지 전해진다. 꼭 그 옛날, 마지막까지 그 단아한 자태를 잃지 않으셨던 내 시어머니의 모습이다. 아들네로 가고 있을까, 명동으로 친구를 만나러 가고 있을까? 아마, 저 가방 속엔, 와인색 루즈와 뽀오얀 샤넬 콤팩트와 목공단 자수양산도 하나 들어있을 것이다.
베낭 끈을 바투잡으며 그 뒤를 따라 갔다. 그러나,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내 좁은 시야를 가리며 앞을 가로막는 순간, 그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환승차에 오르며, 뒷꼭지가 자꾸 캥겼다. 내가 장자의 나비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니야, 이건 분명, 현실이야. 사람들은 여전히, 누가 누구의 꿈속인지 알 수도 없이, 어떤 삶에서 어떤 삶으로 갈아 탄 것인지 알 수도 없이, 다시 꿈속으로 빠져들어 흘러가고 있었다. 지상으로 올라 오다가 눈부신 햇살에 잠을 깨고 보니, 소파 아래로 늘어진 치맛자락 밖으로 비져 나온 내 발목이 좀 썬들하였다. 창밖에는 온통, 붉은 영산홍과 하얀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