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초입에
코 쳐박고, 악보 몇 쪽 익히는데 몇며칠이 걸렸다. 이것이 진짜 내 노래가 되는 건 언제일까? 아니, 언제, 될 수나 있을까? 허둥지둥, 바늘허리 실꿰며 살던 시절이나, 놀멍쉴멍, 게으름을 즐기며 사는 지금이나, 나의 노래는 오선지에 매달려 턱걸이만 하고 있거나, 목구멍 안에 웅크리고 앉아만 있다. 글을 읽어도, 춤을 추어도, 말 그대로, 장님 코끼리 만지기. 엉뚱한 데서 맴을 돌고 헤매고 다니다가, 더러는, 아, 이거구나, 영감인지, 환상인지, 뭐가 언뜻언뜻 비치기도 하지만, 나의 코끼리는 곧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한결 높고 맑아진 하늘, 둥둥 떠있는 어느 구름 뭉치 속에선가, 코끼리 소리가 들려 온다. 목구멍을 활짝 열고, 먼데 산을 바라 봐. 어깨 힘을 빼고 네 현을 지긋이 눌러 저 산도 그 진동을 느끼게 해 봐. 내 다리가 코 같고, 귀가 꼬리 같아도 좋아. 뮤즈의 치맛자락은 아니어도, 기린목에 염소뿔 하나즘 달렸어도, 그대로 좋아. 세상이 찍어 준 카드에 나를 가두지 마. 어떤 천재의 눈도, 인공지능도 다 필요없고, 네가 느낀대로, 백지에 네 손으로 나를 그려 줘. 너만의 노래와 시와 춤으로 나를 만나 줘.
창밖의 녹음은 이제 갈색으로 가고 있다. 이 가을이 가고 또 겨울이 몇 번을 더 왔다 가도, 자유롭고 또 자유로운 너, 나는 과연, 그런 너를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9월하고도 중순이 지나고 있다. 내 눈은 이미 너무 부시고 약하여, 엷은 가을저녁 햇살조차 바라 보기 버겁다. 눈을 감고, 들려 오는 구름속 너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소리를 알아 들었는지, 작은 새 한 마리, 여름내 배운 제일 멋진 자세로 너를 향해 날아 가더니, 돌아오지 않는다. 개구리 소리는 그친 지 오래, 풀벌레 소리만 밤을 도운다. 밤바람 서늘함에 창문을 닫는다. 이제 곧 추석, 아무도 없는 놀이터 위로 달이 저만치, 혼자 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