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운명론과 거제여행ㅎ

해선녀 2015. 8. 2. 23:24

앞글, '영성의 시대2'에서는 와이즈님과 댓글 주고 받다가, 결국, 이 우주에 편재하는 영성의 총화가 바로 자연의 섭리라는 이야기와, 운명은 그 섭리 속에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물살과도 같고, 우리의 삶은 그 물살을 타고 찌그덕 삐그덕 타협하고 조정해 가며 운행해 가는 나룻배와도 같다는 이야기로 대충, 마무리해 놓고, 글친구들과 함께 거제여행을 떠났다. 거제의 지세포 마리나에 정박되어 있는 쿨님의 요트에 올랐을 때, 쿨님은 이 배를 여기 묶어 놓고, 이 배를 가까이서 보살피기 위해, 그토록, 힘들여 거제에 그 멋진 집까지 지으신 걸로 알았는데, 왜 베트남으로 떠나는 것일까? 잠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양평에 집을 지어 놓고, 용인으로 이사온 것도 그렇고, 이것도 운명과 의지의 합작품이었을까? 적어도, 내가 양평집을 지을 때는 용인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다. 저 나룻배처럼, 때로는 운명, 때로는 의지로 기울면서. 그러면, 영성은 그 길목마다, 우리의 길을 비춰 주는 영혼의 작은 불빛이었던가? 아니, 도대체, 운명이란 무엇인가?

 

사실인즉, 나는 운명은 그 물살이라기보다도, 그 물살을 안고, 그렇게 노저어 가는 배, 내 삶의 방식 자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룻배로든, 요트로든, 내가 그 주어진 물살의 조건들을 인식하고 운용해 가는 내 삶의 자세와 스타일 말이다. 이 중요한 것을 빼놓고, '주어진 조건'만 가지고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요리법에 들어가기도 전에, 재료만 가지고 요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다만, 그렇게, 요리법의 중요성을 더 부각시키려니, 한 가지, 걸리는 문제는 있었다. '운명'이라는 말에 일반적으로 붙박혀 있는 '예정성'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 요리의 재료와 조리환경과 요리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 탈렌트까지 다 주어진 것이라고 하자. 그 다음엔 또 무엇이 더 주어지는 것이고, 그래서, 그 요리는 어디까지가 예정되어 있는가 말이다.   

 

큰 아이가 예고 다니던 시절, 나는 이런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너는 누구못지 않은 음악성은 있는 것 같은데, 노력은 별로 안 하는 것 같아. 재능만 있으면 뭘 해?' 아들의 대답은 이랬다. '엄마, 노력하는 것도 능력이라구요. 난 그 능력이 고것밖에 안 되는 거라니까요.'  나는 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맞는 말이다. 녀석은 한 번씩, 궤변같지만, 내가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말들을 한다. '그래도,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최선을 다해서 해보는 것, 그것으로 아름다운 거잖아. IQ가 70밖에 안되는 아이가 노력끝에 겨우, 자기 이름 석 자를 쓸 수 있게 된 게 다라고 해도, 그게 얼마나 장하냐? 능력은 개발할 수 있는 거야.' 겨우, 이런 말이나 보탰지만, 뒷힘이 빠져 버려, 그 후로 더 이상, 노력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찌 저찌, 큰아이는 그 음악의 길을 계속 가고 있다. 작은 아이는 반대로, '엄마, 난 공부무끼는 아니예요. 대학은 엄마 아빠 얼굴봐서 졸업은 해주지만, 나보고 공부길 같은 건 말하지도 말아요..' 이러던 애가 지금은 계속 공부에 빠져서 살고 있다.

 

'내가 알아서 한다.' 이것은 제 아빠가 늘 들고 섰던 깃발이었고, 어려서부터 눈나쁘다고, '공부하라' 소리 대신, 제발, 책 좀 보지 말라는 소리만 듣고 자랐던 나도, 누가 그런 간섭을 했다면, 아마 더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들들도, 무엇이든,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 의문이 풀릴 때까지 질문하고 파고 들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하지만, '해야 되는' 시험공부나 숙제같은 건, 아주 하기 싫어 했다. 나중에, 큰 아이가 '엄마도, 다른 엄마들처럼, 나를 좀 다그쳤으면 내가 좀더 잘 하는 아이가 되지 않았겠어요?' 이런 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그게 그냥, 해 보는 소리였을 뿐이라는 건 저도 알고 나도 아는 거였다. 중요한 건, 알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지, 무조건, 열심히 노력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본말이 전도된 맹목이고, 그래서,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호모싸피엔스로도 호모루덴스로도 아니게, 우리의 영혼을 노예로 전락시킨다.

 

재능이 있다고 다 요리사가 되느냐? 큰 아이도, 꼭 음악만 할 것도 아니었고,소위, 만능인 아이도 있고, 그저, 좋아서 하다 보면, 없던 재능이 길러지기도 하지 않던가? 운명을 '주어진 것', '예정된 것'에 너무 붙들려서 생각하는 건 문제다. 그렇다고, 가게 된 길, 못가게 된 길, 그것을 나중에야, 운명이었다고 하는 것은 결과에 의지해서 결정론을 말하는 비논리, 지적으로 무책임하고 부정직하기까지 한 일이다. 하필이면, 왜 그 길을 가게 되는지. 그리고, 그 길에서 내가 어떤 솜씨를 발휘하게 되고, 어떤 기회를 얻고, 혹은 놓치고, 누구와 어디서 만나 어떤 일을 도모하다가 어떻게 되는지까지도 모두 다 주어졌다고 생각해 보라. 끔찍하다. 솜씨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단순히, 재능과 훈련을 통해 마스터되는 기술이 아니다. 어떤 기술이 내게 있다고 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책에만 있는 레시피가 아닌, 나만의 눈썰미로 요리의 상황을 파악해서 나름의 취향과 손맛을 더한 나만의 스타일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던가? 우리들의 삶은, 나룻배로든, 요트로든, 같은 물살에서도, 그 방향과 속도와 거리는 물론이고, 그 각기 다른 목적과 자세와 취향으로 순간마다 크고 작은 새로운 판단과 행위로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어 가게 한다. 그렇지 않고, 그 모든 것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내가 스스로 해내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일찌감치, 두 손 놓고 나가서 계시만 빌든지, 닥치는대로 아무 일이나 하다 갈 일이다.  

 

오래 전부터, 일난성 쌍둥이들을 대상으로, 성격, 지능, 재능, 직업 등의 상관관계를 알아보는 종적연구가 있어 왔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같은 집에서 자라난 아이들보다 상관계수가 낮다는 것은 그것들이 유전요인만이 아니고, 환경의 영향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 여기서, 같은 집에서 자라난 일난성 쌍둥이들, 즉, 유전과 환경이 다 같이 비슷하게 주어졌다고 간주된 경우들이 운명론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두 아이의 삶의 자세와 스타일이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자란 경우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서로 다르다는 건 결국, 똑같이 주어진 조건에서도, 그것을 인식하고 해석하고 반응하는 방식이 그만큼 서로 달랐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나는 종종, 문화적 유전'이라는 말을 써 왔는데, 이것은 삶의 방식이 대를 이어 누적되어 온 것이라는 점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같은 문화 내에서도, 개인마다 그렇게 다르게 인식되고 다른 반응을 일으킨다는 점에도 더 주목할 일이다. 그것은, 결국, 같은 문화 안에서도 서로 다른 문화가 형성되고 누적되게도 한다.

 

한 사람이 자신과 그 문화적 환경과의 관계를 알게 모르게 규정하고 그에 따라 행위를 하는 방식, 그리고, 상대방이 그에 따라 반응하는 방식은 결국, 그의 인격형성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의 운명을 만든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어떤 사람은 모든 인간관계를 정치적 논리로만 보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것을 경제논리로, 또 어떤 이는 남녀간의 사랑논리로만 읽는다. 그것은 그의 문화가 그렇게 누적되어 온 영향이 크다. 거기에, 호랑이의 지배논리까지 보태어지면, 다른 사람이 그 상황을 다른 눈으로 보고 대처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기선을 제압한다는 말도 있지만, 어떤 낯선 문화나 환경을 만나도 항상 자신의 인식 쉐마를 거침없이 작동시키는 사람이 있고,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는 이도 있다. 그러다가, 뒤늦게, '호랑이는 가라', 아무리 외쳐도, 그 목소리는 웬만해서는 전달되지도 않는다. 그 사람은 이미, 생물학적 유전에, 문화적 유전까지 보태어져서 난공불락의 성과도 같은 운명을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그런 사람과 만났을까, 그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필연으로서보다, 피하고 싶었어도 피하지 못한 우연, 냉소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이다.

 

 와이즈님이 소개하신 허만 멜빌의 '바틀비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그 변호사는 바틀비와의 비지네스적인 만남을 왜 하필이면, 인간적인 만남으로 인식하고 그를 인간적으로만 대했는가? 그의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문화인식을 그대로 투사한 것이다. 사무실이라고 해도, 인식주체에 따라 그것은 다른 환경이 된다. 똑같은 환경이라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는 없다. 재미있게도, 제임스 죠이스의 '카운터파트'도 똑같이, 변호사와 필경사의 만남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필경사 팰링턴은 바틀비와는 정반대로, 자신이 처한 권력관계에서 꼼짝없이 억압 당하면서도, 그 변호사에게 겨우, 비아냥 한 마디를 해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 놓고, 종로에서 빰 맞고 한강에서 눈흘기는 정도를 넘어서, 한강에서 돌을 던지는 격으로, 자신보다 약한 상대인 어린 아들에게는 호랑이로 탈출해서 폭력을 가한다. 알고 보면, 그도, 끝까지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소멸해 간 바틀비보다도 더 나약한 영혼이었다고 할까? 그런 그를 바라 보고 자라는 그 아들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 아이가 어떤 시각으로 그 환경을 인식하고, 무엇을 어떻게 판단하고 행위해 나갈지는 그 자신만 알 것이므로.  

 

외적 조건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개입해서 내가 만들어 가는, 가장 나다운 존재방식에 더 촛점을 두고 운명을 정의하고 보면, 인생은 더 살 만해진다. 운명이라는 말 자체가 원래, 그런 거 아닌지? 목숨을 운위해 간다. 주어진 것은 어쩌면, 목숨-물리생물학적인 조건들뿐이다. 내 존재방식까지, 외부의 일방적인 규정에 맡기지 않고, 나 스스로 탐색하고 규정하고 작동, 관리하다가, 때로는, 무엇인가에서 다시 영감을 얻어 수정도 해 가는 'The Self', '나 자신'이 바로 나의 운명이다. 그렇게 보면, 주어진 '운명'에 '순응'한다는 말이나, 그것을 '극복'한다는 말은 처음부터 어불성설이다. 내가 내 무덤을 파든지, 겨자씨만한 생각 하나로 태산을 옮기든지 간에, 내 삶에 주어진 콘텐츠들- 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가보다도, '어떻게', 내가 그것들을 운영하는가, 내 삶의 방식이 더 나다운 운명이라는 거, 이거, 더 신명나지 않는가? 주역도 명리학도 모르면서, 그런 어벙한 운명론을 말하다니, 그런 건, 딴데 가서 떠들든지, 말든지, 운명론이라고 부르지도 말라? 어디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ㅎ

 

그래서, 말이지만, 이번, 거제여행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이건 , 운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만큼 막연한 질문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대답이 당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심각한 질문이 될 수도 있다. ㅎ농담이고, 마지막에 들렸던 그 멸치덕장에서의 만남이 떠올라서다. 우리가 어느 멸치를 살까, 말까, 생각하고 고를 여유도 주기 전에, 다짜고짜, 어쩔 거냐고,냅다 소리부터 지르던 그 성질 급한 멸치덕장 아저씨. 그는 우리들을 보내 놓고, 좀 후회도 했을까? 이미 그런 운명법으로 굳어졌는데, '장사 좀 해먹겠다고' 그 운명법을 돌릴 것 같지도 않아는 보였다. 그냥, 그대로 가는 게, 우리같은 여행객에게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 德을 베푸는 것이기도. 그는 누구에게서 무슨 억압을 그렇게 받았을까? 선주? 공장주? 그에게 대대로 누적되어 온 '갑질문화'가 있었을까, 생각하다 보니, 그 옆에서 고개 숙이고 멸치만 고르고 있던 그 여인(부인?)의 남편?운전법이 어쩌면, 고수의 경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녀아먈로, 대단한 운명의 대가가 아닐까? ㅎ

 

저 영성을 현실계로 끌어 내려서 논의해 보려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운명을 좀더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자는 거였지만, 또 너무 뻔한 이야기를 길게만 늘어 놓았다. 운명이라는 말도, 영성이라는 말 이상으로, 신비한 영역 그대로 좀 보전해 두는 것이 우리의 인생항로에 여백을 남겨 두는, 더 나은 삶의 자세일 것을. 서울엔, 한 달쯤은 안 나가도 살 것 같다. 용인, 여기서 내 운명은 어떤 항해를 더 할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오늘도 개구리들이 울고 있다. 녀석들은 또 밤늦도록 내 벗이 되어 줄 것이다. 난, 이제, 밥부터 먹어야겠네. 어줍잖은 글 하나 느라고, 저녁도 여태 안 먹었잖아. 개구리들이 그래, 그래, 그래, 하며 화답해 준다. 기특한 녀석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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