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선녀 2014. 4. 11. 12:55

어시장 한 모퉁이 쓰레기 더미에 때묻은 플래카드 한 자락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하도 낡아서 뭐라고 씌어 있는지도 알 수 없는데, 아직은 이 세상과의 연을 끊을 수 없다는 듯, 전화번호 끝자리가 살아 있다. 비릿한 바람 한 줄기가 살짝 들어 올린 그 자락 밑으로 노오란 민들레 한 송이가 아장아장 걸어 나와 부신 눈을 비비며, 하늘 아래 첫말인 듯, 대사를 읊는다. 아, 봄이 와 있었구나. 나를 위하여. 그리고는 그 뿐, 그 민들레는 여러 날을 그렇게 피어 있다가 뽀오얀 꿈속같은 베일을 쓰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몇 번의 장마가 끝나고 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이도록 그 무대의 조명은 다시 켜지지 않았다. 

 

혹시, 이 무대가 너무 허접하여, 관객모독이니, 독자모독이니 할 사람 있을지 모르겠다. 그 쓰레기 더미가 있던 자리는 이미 고층 아파트의 화단이 되었지만, 지금이라도 당신이 그 때 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 수만 있다면, 당신은 그 민들레의 대사를 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봄은 언제나 꽃과 함께 오는 것, 언제나 쓸쓸한 당신을 위하여. 꽃이 지는 것은 그 쓸쓸함을 더 사랑할 줄 아는 꽃으로 다시 피기 위하여 지는 거예요. 나는 지금 바로, 당신의 집 뒤안에 다시 피어 있어요. 거기, 잊혀진 빈 항아리 하나 혼자서 무심히 뒹굴고 있는 옆에서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아무도 모르는 더 사랑스러운 당신만의 꽃이 되어서. 이제, 보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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