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김밥 옆구리들에게...ㅎ

해선녀 2014. 2. 23. 04:27

 

 

촌촌님,

말이 길고 짧고 간에, 존경어거나 반말이거나, 수다거나 논문이거나 간에, 어떤 것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진술(질문형식 포함)을 단언이라고 말한 거였어요. 애매모호하거나 얼버무리지 않고 확실하게 단정하는 말, 이 clarity, 의미의 명료성은 특히, 진지한 토론, 세미나 수업에서나 요구되고 가응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블로그가 때로는 진지한 토론장이 될 수도 있겠지요? 

 

단언적 주장이 그 이유와 근거에 대한 설명이 없이, 그 요지만 짧게 선언된 상태에서는 그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까지 포함한 더 많은 질문을 야기하지요. 저 '내가 여기 답을 가지고 있다. 누가 나에게 질문을 좀 해달라.'라고 외치고 다녔다는 랍비의 의도가 그랬던 것처럼, 장터의 사람들이 그와 토론을 벌였던지는 모르지만, 아마, 몇 마디 들어 보지도 않고, 저거 이 편이야, 저 편이야, 각자 또 어떤 편당적 '단언'들을 내뱉으면서 떠나버리지 않았을지...진지한 토론은 지루하고 어려워도, 함께 머리 싸매고 이야기하려는 사람이 없으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지요. 소크라테스는 당시 귀족들의 정치적 입맛에는 맞지 않았지만, 그와의 대화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제자들이 있어서 다행이었죠...

 

완벽주의자는 자신의 말이 진리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 때문에, 그 확신이 아직 없을 때는 침묵하고, 확신이 있어도, 그걸 일일이 설명하게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을 시작하면 그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을 때까지 다변이 되기도 하겠지요. '꼰대'는 완벽주의자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변일 때만 꼰대라고 하나요? 저 위에서, 완벽주의자는 단언적이라고 섰는데, 침묵하는 완벽주의자도 '꼰대'라고 할 수는 없을지는 모르겠군요.

 

제가 말한 '반어적' 완벽주의자는  '내 생각은 이렇다. 누구,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있는가? 우리, 머리 맞대고 토론 좀 해 보자'고, 완벽을 기하고자 명제나 질문을 내거는 사람이지요. 그의 의도는 전자처럼 자기가 아는 진리를 말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함께 진리를 끝까지 추구해 나가자는 의도로 자신의 생각을 명백하게 제시해 보이면서 자신이 틀렸을 수 (실수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전제와 함께 자신의 실수를 인식하면 그것을 시정하려는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므로, 말하자면, 이것이 진짜 완벽주의라는 것이었지요. 강의와 토론에서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대화에서도 그런 태도의 차이는 확연하고 소크라테스는 후자의 대화를 즐겼던 것이지만, 이 경우도, 상대가 깨달음의 길을 놓지 않도록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지니, 역시, 또 다른 의미의 꼰대는 꼰대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가 스스로를 등애나 전기가오리에 비유한 것도 그런 '꼰대성'을 자인한 것이라고 할까요?  그 선배와 촌촌님 사이의 대화는 어떤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감정적인 거부감만으로 끝났다면 불행한 경험이었네요. 자신의 실수가능성은 끝까지 회피하면서 상대의 실수를 지적하는데만 집중하는 가짜 완벽주의자였을까요? ㅎ

 

교수와 학생 간에도, 그렇게 좋지 않은 감정으로 헤어지는 경우도 많고, 반대로, 지적으로보다는 감성적으로 서로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 경우도 많지요. 그런데, 다른 어떤 관계보다도 교수와 제자의 관계의 요체는 지적인 관계여야 한다고, 저는 단언합니다...ㅎ 교수와 학생관계가 아니라도, 발화자나, 반응자나,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주장, assert하고 있는 단언들이 서로 만나 어떤 스파크가 일어났을 때...그 때가 우리의 영혼이 자극받고 흔들리면서 진리를 향한 길이 그 틈새를 비집고 비춰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촌촌님 말씀대로, 자칫, 어느 도당이나 패거리로 치부될까봐,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우리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시체를 넘고 넘어...앞으로 앞으로...낙동강아...우리는 전진하는 거죠. 김밥옆구리를 뚫고...ㅎㅎ

 

근데, 니체는 왜 소크라테스의 옆구리를 뚫었는지, 샐던의 공리주의는 왜 기분나빴는지, 그런 단언들로부터 또 옆구리를 뚫을 도구는 없을지, 그게 궁금하군요...이 질문에 대한 답들이 또 어떤 단언들이라면, 또 얘기가 끝없이 길어지겠지요? ㅎ

 

 

 

쿨와이즈님,

 

어릴 때의 대화 경험이 와이즈님을 질문을 안 하는 아이로 만들었다구요? 저는 운이 좋았나 봐요. 울아부지도 꽤나 엄격하신 분이셨지만, 저한테는 늘 관대했고,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질문을 거부 당해 본 경험이 별로 없었으니...어떤 발화에 대하여, 늘 질문하며 자신의 주장을 개진해 보려는 사람과, 질문없이 그냥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듯이, 질문을 환영하는 사람과 기피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 성향이 서로 맞는가가 스승과 제자뿐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큰 요인이 되는 것 같아요. 질문쟁이였던 저는 다행히, 친구도 그런 친구를 만나 서로 좋아했고, 선생도 내내 그런 분들을 만났지요.

 

예전에, '교사와 학생간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교사의 발화와 학생들의 반응들을 정리해 보았던 게 생각나네요.  우선, 교사의 주장 A에 대한 학생의 반응:

그것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반응

그것을 부정하는 반응  -A

A인지 -A인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는 반응

A는 아니고, 그와 유사한 A', 혹은 A"...라는 주장

그 대상범위를 줄여서 a, a', a"...라는 주장

아예, 다르게, B, C...f라는 주장

나는 잘 모르겠다는 반응...

 

이에 대한 교사의 반응이 또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요. 학생의 발언에 화부터 내는 교사는 토론의 싹을 잘라 버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A인지, A'인지, a인지 구별도 못하는 반응을 하게 되면, 여간 질문쟁이가 아닌 클래스라면 토론은 중구난방이 되고 말지요. 진리를 향한 노정에서, 교사가, 혹은 학생이 여기를 좀 보자고 촛불을 밝혀 드는데, 엉뚱한 곳을 보면서 반응을 하는 경우, 난시와 사시로 길을 잃고 우리 내면의 진리의 응시를 어렵게 할 것이라는 논지였지요. 

 

소크라틱 수업방법이랍시고 저런 모형을 생각한 건 학생들의 어떤 김밥옆구리 터지는 반응에도 적절히 반응하며 진지한 토론에 몰입하게 하는 그 때의 지도교수의 수업이 하도 좋아서였지만, 그 후 한국에 와서 한 20년을 주로 토론식 수업으로 그것을 흉내내면서 강의를 하는 동안, 워낙 질문을 잘 하지 않는 학생들을 토론으로 이끌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게 수업하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지요. 그 사이,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상호투명성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난반사로 끝나도, 수업 중 많은 대화가 오가다 보면, 무엇인가 각자의 내면에서 스스로 깨닫게 되는 어떤 것이 있게 되고, 그것이 진짜 자기 자신의 지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진리랍시고' 우리들에게 덮쳐 오는 어떤 지식이나 주장들, 혹은 그 반응들도, 다 '말인즉슨' 그렇다는 것이지, 그게 곧장 진리는 아니다고 정신 바짝 차리고 당당하게 선언한 사람 이야기를 또 하고 싶네요. 아시죠? 코메디언 이주일씨....ㅎ 전에, 그것도 이런 댓글놀이에서였는데, 그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있어요. 그가 종종 우스개로 말했던 '원투 해브 예쓰', '모든 말은 다 일리가(는) 있다' 가 그가 곧 노자였고, 아우구스티누스였다는 걸 말해 준 명언이었다고...ㅎ

 

그 때 제가 한창 번역하고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바로 그런 말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는 누구보다도 플라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의 대화 역시, 저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을 쓰고 있었지요. 그는, "모든 언어는 그 자체로서 실재, 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내부의 빛에 의해 우리 스스로 진리를 응시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는 자극을 줄 뿐이다." 라고 함으로써, 소크라테스가 자신은 아직 진리를 알고 있지 못하다고 한 이유를 설명했던 것이지요. 어때요? 그보다도 천년 전이었던 노자의 말, 道可道 非可道 名可名 非可名 도 더 분명하게, 부연해 주고 있지 않은지? 이 세상의 많은 언표, 단언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그들은 그렇게 오래 전부터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었는데도, 우리는 내내 외부로부터 들려 오는 많은 정보들을 무조건 받아 들이기에만 급급하다가, 정신분열증적 상태가 되어 자신 내면의 빛을 응시하는데 집중하지 못해 온 게 아닌지...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영혼은 불멸하면서 우리가 전생에 알았던 것을 계속 회상하면서 깨달아 가는 능력은 곧 신의 시여(Divine Dispensation)라고 했고,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그 깨달음의 빛이 곧 신이 내려 준 진리의 빛이라는 것이었지만, 아무튼, 둘 다 우리의 자유로운 영혼이 세상에 범람하는 정보들에 의해 압도되지 않고 헤엄쳐 나갈 수 있을 때 진리에 이르게 된다는 걸 말해 준 것이지요. 촌촌님이나 와이즈님이 아무리 꼰대들의 말을 순진하게 받아 들였다고 말을 해도, '말인즉슨' 그랬다는 것이지, 누구못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들로 살아 남았음은 우리가 이미 알아채고 있지요. 알고 보면, 저 노자도 소크라테스도 아우구스티누스도 다 그랬듯, 적어도, 눈치만 보면서 패거리 문화에 휩쓸리지 않은 김밥옆구리들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ㅎ

 

 

 

 

말인즉슨, 그렇다는 것이지...: http://blog.daum.net/ihskang/13733568

 

아우구스티누스의 교육론 제5장

     3-1 언어와 사물:커뮤니케이션의 문제 http://blog.daum.net/ihskang/13733566

     3-2 언어와 사물: 커뮤니케이션의 문제:http://blog.daum.net/ihskang/13733567

     4 외부의 언어와 내부의 로고스: http://blog.daum.net/ihskang/137335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