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군주론 / 윤시목
新 군주론
/ 윤시목(당나귀콧김)
새벽에 일어나 거울을 보지 말라
새벽에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지 말라
새벽에 오늘의 부재를 안다
새벽에 지난 달력을 한 장씩 넘겨본다
새벽에 참았던 검은 가래를 뱉고
새벽에 창가에 열린 별 하나를 따먹는다
새벽에 갑자기 태어난 이름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새벽에 동쪽 벌판이 환히 열리고 그 틈을 타 봄꽃이 슬쩍 내려앉는다
새벽에 누구는 내가 펴낸 국어사전을 펴보지 않으리
새벽은 나의 주무대
나는 새벽의 제왕
그러나 새벽은
사망률이 가장 높은 시간,
아침이 사실적으로 위험한 물가를 걷다가
부리 꽉 다문 늙은 백로 한 마리 만난다
날개에 살얼음이 꽂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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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를 위한 레퀴엠을 들으며
거울도 안 보는 여자인지, 거울을 못보는 여자인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반듯하게 누워 있다.
관 속에 들어 가서도 나는 이렇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을까?
움켜 쥔 손 안엔 아무 것도 없는데도?
클라우디오는 여든 살에 위암으로 갔다고 한다.
이 겨울, 기침과 가래가 그치지 않는 나는 언제고
폐결핵이나 폐렴이나 혜암으로 갈 것이다.
가래인지, 기포인지, 하얗게 한가득 찼던 그의 폐사진을 잊을 수가 없다.
의사가 중환자실에서 그 사진을 보여 준 지 한 시간여,
그는 내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갔다. 나도 그렇게 갈 것이다.
의사가 누구를 불러서 사진을 보여 줄 일도 없이.
월요일 다음 날이 일요일이 되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다.
지난 달력도 지날 달력도 뻔할 것이므로 들쳐 볼 일이 없다.
그래도, 새벽은 매일 내게로 온다.
새벽별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밝아 오는 창을 향해 손을 내민다.
별아, 내 손에 들어 와 다오.
내게도 갑자기 태어난 이름 하나가 콧김을 뿌리며 다가 온다.
두렵다. 그런데, 그의 눈은 너무 슬프다.
내게 슬픔을 다시 전염시키지 말라.
나는 이미 슬픔따윈이제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훤히 밝아 오는 동창의 눈부심이 또 희망를 약속하려 한다.
하지 마라, 약속 같은 것도 난 하고 싶지 않다.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다 희망이니까.
희망의 끝은 또 희망이니까. 그래서,
누가 펴낸 국어사전 따위도 볼 일이 없다.
그 사전에서 희망 이외의 글짜는 더 이상 찾고 싶지 않으니까.
새벽여우였던 나는 이제 새벽잠도 곧잘 자는 여왕이 되었다.
새벽에 사망해도 그 새벽에 다시 태어난다.
아니, 시도 때도 없이 태어나고 죽는다.
사망률 높다는 새벽을 살아남은
노루 한 마리가 맴돌고 있는 아침숲은 햇살이다.
늙은 백로의 날개에 박힌 살얼음이 반짝이며 녹아 간다.
부리를 열고 잊고 살았던 그 옛날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꺼내고 숲위를 날아 오른다.
죽기 전에 이렇게 손이 펴져 날 수 있음에 스스로 놀라며
훨훨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뀌쯤은 돌고서야 숲을 떠날 것이다.
그가 못다 살고 내게 남겨 준 이 세상을 떠나기는 못내 서러워서.
...하여, 여기 모든 새벽의 제왕들과 여왕들이여,
그대들도 새벽에 일어나면 거울도 보지 않고 주머니에 손도 넣지 않고
달력도 들춰 보지 않을지라도, 오, 제발, 살아 있는 날까지
그대의 빛나는 자부심의 영토들에서만은 부재하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