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세, 생일 즈음에
토요일, 전화 받았을 땐 막 현관문을 닫고 나서는 순간이었다. 금요일 퇴근길에 근사한 저녁을 사주겠다며 온 올캐가 나를 태우고 그대로 내달려 양평으로 간 거였다.
늦은 밤이었는데도, 올캐는 벽난로도 피우고, 다나네가 인터넷 주문으로 보낸 떡 케잌도 자르고...단 둘만의 파티를 즐기고 푹 잤다. 그래 놓고도, 아들을 곁에 앉히고 조곤조곤 이야기 나누며 운전해다 주고 돌아와 산책하고 있다는 네가 또 부러웠던 건 무슨 욕심? ㅎ 저녁은 퇴촌에서 무슨 한정식 집에 들어가자는 걸 마다하고, 걍 전주곰탕집에 가서 도가니탕으로 먹었었다. 전에 맛있어서 몇 번 갔던 집. 이제 와서, 남편도 자식도 아닌 올캐한테 너무 큰 생일호사를 받는 거, 거북해서다. 그렇게 자주, 나와 함께 양평에 가 주는 것만 해도 어딘데? 아직도, 생일 같은 거, 아무 것도 아니게 넘긴다는 너네 양반도 엔간하다. 나도 언젠가는 치매가 와서, 회갑날에도 아무 일 없이 지낸 절제뿐인 세월이 너무 억울하다고, 누군가를 막 힘들게 할까, 그런 생각도 들더라, 그러니, 너라도, 훗날, 후회 없도록, 누구들 말마따나, 살아 있을 때 더 잘 하라고 엄포라도 놓아 보려므나...하하... .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입원 중이신 형부가 치매끼까지 있어서, 영 엉뚱한 모습을 자꾸 보이시는 게 참 딱하다. 그 수발을 들고 있는 언니도 자꾸만 환자에게 휘둘려서 간병인을 사흘드리 바꾸며 사사건건 나에게 상의를 해오지만, 순간마다 코치가 되어 줄 수도 없고, 세세히 설명한다는 게 서로 힘만 든다. 그 호기롭고 청청하던 시젊은 다 지나고 병든 현실만 남은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신 형부 못지 않게, 환자 앞에서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리는 약한 노인, 언니도 딱하다. 몸이 사그라지면 정신도 사그라지는 게 자연의 이치, 청징한 정신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노인이 얼마나 있을까마는, 자꾸 연민을 넘어 숙연해진다. 나는 그저, 바보처럼이라도, 평화스럽게 갈 수만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
온통 단풍으로 휘덮힌 앞산을 바라 보며 겨울 단도리를 좀 하고 왔다. 옆집에서는 텃밭 농사 마무리 작업으로 돼지감자를 캤다며 한 봉다리 갖다 주었다. 닭장에 들어가 병아리 구경을 했다. 오골계 한 마리가 병아리를 다섯 마리나 깠더라. 제 알은 하나뿐이었는데, 다른 알들도 모아서 품더란다. 언젠가, 그 집 장닭 한 마리를 사다가 우리 가마솥에 넣고 옻닭을 할 날을 꿈꿔 본다. 닭은 그녀가 잡아 주겠다고 하고, 그가 쓰다 만 옻 한 봉지도 양평에 갖다 둔 게 아직 있다. 그녀는 병아리들이 너무 추울까봐 이중비닐을 친 독방을 차려 주고, 까치들이 알을 훔쳐 먹을까봐 닭장 전체를 그물로 덮어 놓았다. 그 집 남편은 텃밭일도 닭장 일도 안 도와 준단다. 그가 있었다면, 어쩌면 책을 덮어 놓고 그런 일을 하는 시간을 더 즐길 것이다. 아마, 그 사이에도 몇 번이나, 친구들, 제자들 불러 모아 칠면조 구이 대신, 옻닭을 끓이며 즐거워 했을 것이다. 11월, 그와 나의 생일이 다 들어 있는 달, 그가 더욱 그리워진다.
안땅엔 제법 많은 자작나무들이 자생하고 있다. 그와 내가 오래 전에 심었던 자작나무들이 그 씨앗을 퍼뜨린 거다. 마당엔 삼년밖에 안되었는데도, 작은 소나무와 단풍나무들이 자라고 있어서 아주 귀엽다. 고목은 쓰러져 가도, 나무 밑에 또 나무, 새로 움튼 씨앗들이 자라는 것이 새삼 신통하다. 퍼뜨린 씨앗에서 새로 움터 나온 아기 나무들이 크고 작은 나무들로 가득 자라고 있는 숲...인간의 숲도 자연의 숲과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상에게 받은 음덕을 자손들에게로 내려 보내고, 자손들은 또 그 자손들에게로 내려 보내며 인간세상도 저 숲처럼 이어지는 것이겠거니..
너는 종일 집에 있겠구나 했더니, 여차저차 또 들려 주었구나... 덕분에 미적거리던 숙제를 해치우게 도와 줘서 너무 고맙다. 급해서 말할 틈도 없었지만, 다나에미는 더 좋은 큰 선물, 다나의 동생이 생길 거라는 소식도 전해 왔었다. 아들 하나 더 낳고 싶다고 원을 하더니, 뭐를 낳든, 계네들도 이제 자식이 둘은 될 모양이니 정말 반갑고 든든하다.
새벽에 잠이 깨어 어제 쓰다 만 네 답글을 또 이렇게 길게 늘였다. 나중에 사진도 좀 올려야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 11월이 다 가고 있었네. 12월이 되면 또 괜히 마음이 바빠지겠지? 너무 춥기 전에, 우리 숲에 더 자주 가자. 낙엽 냄새, 나무 냄새가 갈수록 더 좋아지는 것은 왜일까? 아주, 숲속으로 들어가서 살고 싶다. 물기 머금은 굵은 나무기둥들이 그리 좋다고 너도 말했지. 든든하고 믿음직한 청장년들 같은 그 나무들도 지금쯤 기지개를 켜고 있을까? 곧 동이 틀 텐데, 조용한 걸 보니, 아직 새들은 잠이 깨지 않았나 보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자장가나 올려 놓고 조금 더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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