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 그리고 내게 남은 행복
눈실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하얀 컵에 우유가 든 줄도 모르고 비워 버리지를 않나, 하얀 컵이 엎어져 있는 줄도 모르고 커피를 붓질 않나... 우리 눈나쁜 사람들 홈피에 가보니, 눈나쁜 후배 한 사람은 씻은 쌀을 밥솥 열판에 그냥 들이부었다는 글을 올려 놓았다. 나는 그래도, 단지, 게으름 때문에, 솥단지째 쌀을 씻어 버릇했더니, 눈이 아무리 더 나빠져도 열판에 씻은 쌀을 부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눈 멀쩡한 사람은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실수들인가? 하긴, 휴대폰을 냉장고에도 넣는다니, 누군들, 어디에 무엇인들 못넣으랴... 하하.
이번 여름엔 두 가지 좀 웃지 못할 실수들이 있었다. 초봄, 미국 가기 전부터 장애인 활동 도우미 써비스를 받아 보려고 여러가지 알아 보고 시작도 해놓고 갔던 건데, 결국 실패한 실수 이야기. 대화를 하다 보면, 상대방의 말귀를 잘못 알아 듣거나 내가 잘못 말하는 일이 많아서, 나는 평소에도, 실수를 안 하려고 소심하다 싶을 정도로 꼼꼼히 따져 묻는 편이다. 그래서, 딴엔, 서울의 복지기관의 도우미 담당에서 시작하여, 건강보험공단의 실사 담당, 양평의 면사무소의 복지담당들에게 세세히 물어 보고 나서 신청하고 실사받고 드디어 서류를 완비해서 제출하였는데도, 마지막 코스였던 양평의 면사무소로부터 복지부에서 거부되었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그것 때문에 일부러 양평 면사무소에 세 번이나 가고, 그 때마다 친절히 안내해 주더니, 이게 무슨 소린가? 이유인즉, 65세 이전에 한 번도 장애인 활동보조 써비스를 받은 적이 없는 신규 신청자는 아예, 신청자격을 주지 않고, 단지, 노인요양 도우미 써비스만 받을 수 있는데, 그것도 건강보험료를 일정액 이상 납부하는 사람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많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고는, 자리에 누워, 꼼짝 못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65세가 넘어 처음 신청하는 사람은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이 어디 그런 정도로 못움직이는 사람인가? 자식에게 보험이 얹혀 있는 사람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써비스를 받을 수 있고, 혼자 살면서 건강보험료를 따로 내는 사람은 자식의 도움을 못받는 것만 해도 답답한데, 도우미 신청이 불가하다니? 도대체, 처음 신청하는 사람은 불가하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65세 이후부터 힘들어진 사람은 꼼짝 말고 집에서만 지내라는 것인가?
억울한 사각지대라는 생각을 하다가, 금새, 생각을 돌리기로 한다. 그래, 내가 조금 더 혼자서 노력하며 지내라는 소리겠지. 정 힘들어지면, 개인 도우미를 조금씩 쓰면서 살다가 요양원에 가라는 소리겠지, 그래도, 의료보험료 내는 만큼의 능력은 있지 않은가? 그러다가, 나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면, 그 전에, 어떤 보완책이 나오겠지, 그것이 발전하는 나라의 현주소니까...
어쨌든, 그들은 왜 내가 신규신청이 불가능한 경우라는 것을 마지막에야 확인하게 되었는가? 물어 보니, 첫 기관에서는 내가 신규라는 것을 깜박 잊었다고 하고, 두번째 기관부터는 내가 신규도 신청가능하게 되었다더라고 말하니까, 자기들도 그렇게 된 줄 알고 넘어갔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신뢰할 만하게 보였다는 건가? 아무튼, 모두, 미안하게 되었다고만 하니, 황당해서 할 말이 없었다. 저번 양도세 문제가 있었을 때도 그랬다. 내가 집을 팔 당시는 일시적인 세법상의 변경으로, 내가 양도세 과세대상이 되어 있던 시점이었다는 걸, 2년이 넘도록 나는 모르고 있는 동안에, 세무서에서는 나에게 고지도 한 번 안 해놓고, 다른 일 관계로 내가 먼저 그것을 알게 되어 신고하고서야, 하루에 3/10,000씩인가의 가산세까지 물려 가며 고지를 하면서 또 미안하게 되었다는 소리만 했던 것이다. 게다가, 아니, 딴엔, 그 미안한 마음에서 내게 도움이라도 주려고, 매입과 매도액 이외의 추가경비에 대한 증빙서류를 가져 오면 다 인정해 주겠다고 해서, 어렵게 어렵게 서류들을 챙겨 가게 해놓고, 마지막엔, 내 경우는 그게 다 해당되지 않는 경우라고 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매입시의 영수증이 없다고 여러 번 말했는데도, 그 경우는 시세에 의한 추산법으로 처리하게 되어 있어서, 그런 증빙서류는 인정해 주지 않는다나? 하기는, 그런 추산과세가 증빙서류에 근거한 과세보다 세금이 조금 적었기에, 다행이라면 다행이긴 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모두 그런 실수를 했을까? 아니, 왜 나의 실수를 방조하게 되었을까? 내가 너무 강하게 보였나, 아니면 얕보였나? 하다못해, 설거지하는 일에도, 모든 일의 담당자들 중에는 초짜가 있는 법이고, 법이라는 게 늘상 바뀌는 것이고, 그건 이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좋은 일이고, 너무 많은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누가 어느 경우였던지를 깜박 잊고 일반적인 법만 이야기해 줄 수가 있는 것이고...모든 이해를 다 동원해 봐도, 한 마디로, 무자비했던 이 여름의 무더위 탓이 제일 큰 듯하다. ㅎㅎ
나도 실수를 하도 잘 하게 되니, 말로든 행동으로든 함부로 나서지 않게 되니, 그것도 한 다행이다 싶다.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는 척, 덤비다가 내는 실수가 제일 부끄럽다. 저 밥솥의 경우처럼, 눈 잘 보일 때 하던 버릇대로 무심코 저지르는 짓이 제일 두렵다. 나는 죽을 때도 아마, 실수로 죽을 것 같다. ㅎ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이 안 보여서, 혹은 게을러서, 나도 모르게 '운명적으로' 피해진 실수들, 그런 행운들이 내게도 있어 왔음에 감사한다.
오늘은 선풍기가 넘어지면서 불이 났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 사람은 나처럼 눈이 나빠서 바닥에 늘어져 있던 전선에 발이 걸려 선풍기를 넘어 뜨렸을까, 눈은 잘 보였는데도, 다른 생각에 빠져서 너무 서둘렀을까? 나는 어려서부터, 방바닥에 있는 아버지 재떨이를 발로 차고 다녔다. 부주의하다고 꾸중을 들었지만, 아마, 그 때도 내 시야가 좁았던 탓이기도 했으리라.
풀 한 포기도 제자리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고들 한다. 하지만, 길섶에 난 풀은 언제나 자유로이 자라고, 길가운데 난 풀은 짓밟히고 부대끼기만 할까? 인간은 더구나, 자기가 난 자리에 붙어만 있는 존재도 아니다. 어디서든, 자유로울 때 방종하지 않고, 부대낄 때 화내지 않으며, 어떤 사고 앞에서도 남탓해봐야 열만 나지, 허허 웃으며 나 자신의 실수에나 연민하며 차근히 수습해 나가는 일. 그게 늘 내 삶의 과제였고, 이제 내게 남겨진 가장 든든한 행복이다.
아침산책...오늘은 내가 또 무슨 실수를 할까? 조금은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심조심 작은 발걸음으로 걸었다. 확실하다 싶어도 스틱으로 한 번 더 짚어 가며...쉼터에 이르니, 늦봄에 나와 함께 한국으로 와서 여름방학을 지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나서 달려와 여기 앉곤 하던 손주들이 벌써 그립고, 한여름에 아들 늦장가 보낸다고 와서, 밀린 이야기하며 천천히 걸으리라, 몇 번 마음만 내다가 , 무더위에 지고 말아 그냥 떠나 보낸 친구가 그리웠다. 이제 곧 가을바람이 선선할 테지. 나는 물 한 병 들고, 새소리 들으며 느리게 느리게, 이 길을 걸으리라. 눈길 미끄러울 때까지는 아직 석 달은 남지 않았는가? 내 삶에 몇 번의 가을과 몇 번의 봄이 더 남았을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 이 숲산책이 더욱 애틋하고 귀하다. 언제 또 무슨 실수를 하여도, 보석같은 내 남은 행복거리들에 감사하며 살리라...오늘도 귀한 하루가 지고 있다.
Erich Wolfgang Korngold
죽음의도시중 아리아."Glück, das mir verblieb"
나에게 남겨진 행복이여
업로드된 날짜: 2006. 10. 14.
Recorded live at the Théâtre Musical De Paris - Châtelet, 2000
그리고, 안네 소피 폰 오터의 이 곡도 들어 보세요.
눈물나게 아름다운 그녀의 목소리...31세, 그 때만 해도 너무 젊었지요...
업로드된 날짜: 2009. 09. 3.
Taken from a 1986 Gala of Young Stars in Frankfurt.
A very young Anne Sophie von Otter sings Angelina's las aria from Rossini's Cenerentola titled Non piu mesta. If i may say so myself, this is amazing coloratura singing.
James Levine conduc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