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끄적거림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인가,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인가? 신을 만든 것이 인간이라고 하면, 바로 그런 인간을 내가 만들었던 거라고 신께서 말할 것이고, 인간은 또 바로 그런 신을 우리가 만든 거라고 말하겠지. 그러고 보면, 이것도,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의 문제였던가? 아무튼, 우리는 왜 이런 문답을 계속할까?
'심심하니까...'. 심심한 것을 못견디는 존재는 인간뿐이 아닐지? 그래서, 염불도 외우고 무어라도 끄적거리고 만들어 내고, 또 그걸 부수기도 하는 것이지.
오늘도 비. 모처럼 무어라도 만들어 볼까? 빈대떡이라도 만들려니 녹두가루는 커녕, 밀가루도 없다. 만들지는 못해도, 무얼 부수기라도 해 볼까? 부수는 것도 그것이 없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 하하, 그러니까, 부수는 것도 만드는 것. 부수는 것도 귀찮고, 냉장고나 들여다 본다. 냉장고에 만들어 놓은 게 아무 것도 없다. 이거 하나는 분명한가? 그것이 무엇이거나 간에, 만드는 것은 부수는 것에 우선한다?
그러니까, 신을 우리가 먼저 만들었거나, 신이 우리를 먼저 만들었거나, 만드는 것이 부수는 것에 우선한다는 것. 만들자, 만들자, 잘 만들자. 그러고는,부수자, 부수자, 잘 부수자. 그러므로, 우리의 삶도 죽음에 우선한다. 살자, 살자, 잘 살자. 그리고, 죽자, 죽자, 잘 죽자. 새로든, 나비로든, 꽃으로든 풀나무로든, 어떻게든, 내가 잘 살아야, 또 내가 잘 죽지. 내가 잘 죽어야, 내가 잘 살지...는 아, 아니고, 내가 잘 산 것이지....
그러니까, 잘 죽어야 잘 산다는 말은 시간적으로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당대에서는 불가능하므로, 결국,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다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논리적인 진술이고, 사실적으로도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삶을 사는 것은 어떤 다른 삶을 부수는 것이고, 어떤 신을 만든다는 것은 동시에, 어떤 다른 신을 부수는 것이다, 어떤 신을 만들면 동시에, 그 신은 우리를 만들고 있고, 우리 또한 그 신을 만들고 있다. 다만, 만들어진 것, 그것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부서지며 새로운 다른 것으로 만들어진다. 존재는 끊임없는 만듦의 과정이자 부숨의 과정이다. 한 마디로, 만듦의 과정이다.
연사흘 째, 전두환의 재산을 압수수색한다고 난리다. 잊고 있었는데, 그는 내란죄로 사형을 구형 받고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아 쬐꼼 감옥살이 흉내는 내었던가? 특별사면으로 나왔다는 거다. 나와서, 옳다구나 , 그러면 그렇지, 하고, 추징금 따위는 내는 흉내만 또 조금 내다가 어물어물 그 환수할 재산이나 불키며 살아 갈 참이었는데, 법대로 원칙대로 한다는 이 정부가 참다 못해 칼을 들었다는 것. 대통령의 허가도 안 받고 무력으로 나라를 휘잡았던 반국가적인 죄인이었는데도 꺼내 주었다면, 재산환수라도 제대로 하긴 해야지...근데, 그럼, 박정희는 대통령의, 국민의 허가를 받고 정권을 잡았었던가?
우리 시아버지는 저 박정희 정권이 사형을 구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었다. 민주주의 국가의 법과 원칙을 세우자고 외친 죄로, 그 죄는 이제 50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가 되었는데, 그 죄를 씌운 박정희의 딸은 저 '정의의 칼'로 역사의 어디까지만 자르겠다는 건가? 어차피, 각주구검, 세상은 변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같은 행위에도 같은 법과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없고, 새로운 법을 만들고, 그 법으로 세상을 새로이 만들겠으니, 우리는 그들이 몰고 가는 뱃전에 이리 저리 부딪치며 기껏, 잔물결이나 치면서 따라나 오란 말이지...
라면이라도 끓이기로 하고, 보험과 상조광고가 판을 치는 티비를 보며, 그래, 진정, 세상이 나를 만들기만 하는지 내가 세상을 만드는 게 하나도 없는지, 생각해 본다. 이 세상에 라면이 없었으면, 난 그냥, 라면 같은 건 먹어 보지 못한 인간이 되기나 하고 말았을 뿐이라고 하자. 그런데, 라면이 기왕 있는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라면을 하나라도 사 먹고 안 먹고가 이 세상을 어떻게라도 만드는 것이기는 할까? 그래, 곧 죽어도, 나도 이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게 있다고 한다면, 고작, 소비자로서의 역할 뿐이네. 세상의 온갖 흐름 속을 허우적거리며 떠내려 가며, 그저 세상이라는 신을 향해 경배하면서도, 이게 정말 나의 신일까? 의심이나 해보는 거네. 그 의심하는 나 속에 이미 세상이 만들어 준 내가 들어 있고, 내 신이 들어 있어서, 세상이 하도 그 쪽으로만 보니, 나는 저 쪽으로도 보겠노라고 기껏, 이렇게 미약한 소리나 내어 보며 세상의 음화와 양화들을 내 안에 만들어 가네.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내가 경배하는 신인지, 혹은 내가 거부하는 신인지조차 까무룩, 분간이 안 되는 시간들을 이불처럼 껴안고서...
그러니, 이제 나에게, 누가 누구를 만들었는지를 묻지 말라. 나는 그냥 그렇게 떠내려 갈 뿐이다. 그저, 라면 붓기 전에 어서 먹기나 하고 떠내려 가자. 숟가락을 들려다 말고, 그래도, 마지막으로 묻는다. 내가 정말 배가 고팠나? 사람은 배가 고픈 게 먼저였나, 배가 부른 게 먼저였나? 대학시절, 배고픈 귀신이 내 안에 들어 앉았나 싶을 정도로 늘 배가 고프다던 친구 생각이 난다. 그건 왜였을까? 그 사람이 실제로 고픈 것은 배가 아니고,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그런데, 나는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그 욕구를 열심히 쫓곤 한다. 딱히ㅁ,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니더라도, 내게 주어지고 내가 찾아낸 그 무엇인가를 쫓고 있다. 살아있음이다. 언젠가, 이 쫓음 노중에 나는 갈 것이다. 그걸 굳이 다 내려 놓고 더 이상 배고프지 않고 배부른 상태에서 가야 한다는 강박증을 차라리 내려 놓고 싶다. 하하, 그래서, 언제든, 내가 죽을 때 조금 타게 되어 있는 보험에는 들어 놨으니, 언제 죽든 안심은 해도 되겠네.
비가 그칠 모양이다. 그친 비는 또 언젠가 다시 올 것이다. 창문을 닫아야지. 잠시 볼일을 보고 올 요량이지만, 또 어디로 뻗게 될른지도 모른다. 열어 두고 나갔다가는 비가 들이칠 수 있다. 이 집도, 언젠가 부서져 내리는 그 순간까지는 문턱이 상하지 않게 잘 써 주어야 할 것 아닌가? 지금 내 소유도 아니고, 작고 초라하지만, 내 삶의 일부이자 내 죽음의 일부, 그 옛날, '집장사'니, '복부인'이니 하는 소리 들어 가며 내가 만들었던 집이니, 박근혜가 돌아간 청와대가 그녀에게 그럴 것 이상으로, 내겐 정겹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