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望과 忘 (4) - 인간은 심심풀이 땅콩?
둘째, 종교문제를 떠나 현실로 들어와 본다면, 望은 성취해 본 경험이 많을수록 더 큰 望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난 총선에서 타워 펠리스 주민들이 보여준 높은 투표율은 놀라웠죠. 가진게 많아 세속적인 일에 별로 신경쓰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재벌이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주변인 경조사를 챙기는 지극정성은 일반인이 엄두를 못낼 정도라고 하죠. 향후의 반대급부를 위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사심없이 챙기는 경우도 많다고 하더군요. 그런 '챙김/챙겨줌'은 아마도 ...........그쪽 계통 인간의 '본능' 혹은 '집단 무의식' 같은 건 아닐까요? 인간조직에선 그런 챙김/챙겨줌이 경쟁력으로 작용하겠죠. 체제가 확 바뀌어도 기득권층 상당수가 그대로 유지되었던 역사를 감안한다면 말이죠.
기득권(旣得權)층... "이미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란 뜻이죠. 가져봤기에 그 권리를 지킬 줄도 아는 거 아닐까요? 望을 품어봤고, 또한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느껴봤다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望이 지속되기에 그런 거 아니었을까요?
셋째, 望을 성취해 본 경험이 없거나 성취할 가능성이 적으면 비틀린 望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비기득권층은 자기 계급에 반대되는 투표를 하는 경향이 높다고 하죠. 빈곤층이나 여성, 혹은 살면서 험한 꼴을 겪어봤던 사람들은 보수 세력에 투표하는 성향을 보이죠. 자신을 얕잡아 보고 이용해먹을 것이 뻔한 세력에 주저없이 투표하는 경향이 높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만 그런게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항상 그래왔다죠. 앞으로도 그럴 거같구요. 얼마 전의 대선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었죠.
사회학자들은 이렇게 분석하더만요. 희망이 없을수록 국가/민족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경향이 많다고요. S그룹이 잘 나가는 것이 바로 내가 잘 사는 것으로 느껴지고, 국가대표 축구팀이 강대국 대표팀을 누르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뭐 그런 것의 일종이겠죠. 그러기에 '강한 국가/민족'을 표방하는 보수세력에 표가 몰리는 계층이 있는 거일 수도 있겠죠.
어느 교수가 수업시간에 질문을 받았는데 할 말이 없더랍니다. 대학생 제자가 이렇게 질문했기 때문이라죠.
"교수님, 우리나라가 지금은 잘 못살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는 무척 잘 살았다면서요?"
하.... 이건 과연 누가 던져준 望일까요?
진보를 '자처'하는 계층은 학력이 높은 편이라고 하죠. 민주당같은 사이비 진보정당이 아닌, 투표율 1%도 제대로 얻지 못하는 소수의 진보 정당들에 등록된 당원들의 평균 학력은 최소 대학원 졸업은 될 거라고 우스개 소릴 할 정도로요.
근데..........지금 우리사회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분들의 望은 합리적일까요? 글쎄요?
보수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구꼴통 신문들마저 가끔 지적하는 진보계층의 문제점이 어쩌다 그럴듯하게 느껴질 때도 있죠. "진보계층은 성급하다"는 바로 그 평가요. 성급하다는 것은 가볍다거나 혹은 이율배반적이라는 의미도 지니죠.
며칠 전 노회찬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했습니다. MB 정부나 법조계를 향해 이런 저런 지탄을 가합니다만, 진보계층이 나름 지지하고 있는 노무현대통령 시절 만든 법에 걸려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하는 경향이 있죠. "MB정부와 노무현정부의 FTA는 다른 것이다"라는 식의 황당한 논리와 비슷한 거죠. 노무현 정부가 S그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어도, 과연 노회찬 의원이 거기에 걸려들었을까요? 노회찬씨 의원직 상실의 원인은 MB가 아닌, 노무현 정부에게 있었던 것 아닐까요? 몇년 전, '노회찬/심상정 지못미' 현상도 있었습니다만, 단일화를 위해 그들에게 고양시장 및 서울시장 사퇴압력을 가한 주체도 바로 진보세력이었죠.
다른 사례로는, 박근혜후보를 이기기 위한 민주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단일화라는 목적을 위해, 결과론적으로는 안철수후보를 쫒아낸 진보세력들의 시위 현장에는 조국 교수가 있었죠. 나꼼수 지지자와 대립각을 세우며 나름대로 합리성을 지키려던 진중권 교수 역시 촛불을 들었고요. 그랬어야만 했을까요? 왜요? 만약, 박근혜가 대통령되는 것을 막는 것이 주목적이었다면, 차라리, 박근혜에게 더 경쟁력이 있는 걸로 추정되던 안철수로 단일화했었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요? 그래서 문재인 선거사무실로 몰려가서 시위해야 했던 것 아닐까요?
얼마 전, 진보 교수 등으로 구성된 연구단체 웹사이트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랬네요. 박근혜에게 몰표를 던진 노인층에 대한 혜택을 줄이자는 운동이 한창일 때였는데요. "버스를 탔더니 그날따라 노인들만 보이더라. 소름이 끼치더라"라는 댓글들이 달려 있어서요. 철학/사회과학 등의 인문학 서적도 몇권씩이나 출간한... 그런 교수들의 댓글들이 바로 그랬어요.
이런 식의, 민주주의를 원하는 과정에서 가끔 드러나는 비민주주의적 방식 ..... 세계 혁명사에서 너무나도 비일비재했습니다. 논리는 다양하지만 결국 비슷하게 집약되죠. "결국 체제가 바뀌어야 민주주의를 시도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당장은 좀 뭣하지만, 후일을 위해 ...." 근데, 과연..... 그럴까요?
진보세력을 성급하게 만드는 건 뭘까요? 혹시 望을 성취해보지 못했기에, 예컨데, 민주주의를 꿈꿨지만 민주주의를 가져보지 못했기에 그리 성급한 건 아닐까요? 박정희 시대에 비하면, 많은 이가 피를 흘린 덕에 지금은 상대적으로 민주화가 되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요원하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요? '느긋한' 기득권층과 '성급한' 비기득권층의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하는 걸까요? 어찌보면 오히려 기득권층이 별다른 욕심이 없어보일 정도로요.
너무 수다를 떨었군요. 주제로 되돌아오기 위해 이야기를 좀 바꾸죠.
몇달 전 영화를 보러 갔어요. <프로메테우스>라는 영화였습니다. 공상과학 영화인데, 창조주와 피조물의 이야기를 그린 거죠. 생각해볼만한 다양한 소재거리가 있습니다. 영화는 "자기 살해를 통한 생명의 탄생"으로 시작해서 "아버지의 살해"로 끝나죠. 그 중간중간에 많은 이야기거리가 존재합니다. 그 중 하나....
제 영어실력이 짧아서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음을 미리 밝히고요. 인간의 창조주 (신, 영화에서는 엔지니어라는 외계인)를 찾아 떠나는 우주 여행 중에 인간과 인조 인간이 가볍게, 아주 가볍게 대화를 나눕니다. 인간이 인조인간을 만들었으니 이 또한 결국 창조주와 피조물의 대화라고도 볼 수 있겠죠. 대충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갑니다.
인간 : 창조주는 도대체 왜 인간을 만들었을까?
인조인간 : 인간은 왜 날 만들었죠?
인간 : (심드렁하게) 그야 뭐...너를 만들 능력이 있었으니까.
인조인간 : (역시 심드렁하게) 창조주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그냥, 인간을 만들 능력이 있었으니까...
저는 이 오락용 공상과학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해있었는데.... 이 장면에서 ... 허걱...했습니다. 신이 인간을 심심풀이 땅콩으로 여겨 "그냥" 만들었다니?..... 만약 사실이라면, 수천년 동안 인간이 고민했던 철학적 고민들은 그야말로....
지젝이란 철학자는 "신에게 부여된 초월적 보호자로서의 이미지가 허상"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신은 우리 행위의 모든 행복한 결과를 보증해주는, 즉 '역사적 목적론'을 강조하는 초월적 보호자가 아니라는 거죠.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힘을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한 지젝의 관점이, 저 영화에도 등장하는 거죠.
역사적 목적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면,
유신론적 입장에서는, 인간이란 존재가 신으로부터 보호받을 양이거나 혹은 속죄받을 염소로 단순하게 구분될 수도 있는 거고요. 무신론적 입장에서는, 제가 지금 주저리주저리 길게 쓰고 있는 이 황당한 "망과 망"이란 글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거겠죠.
노르웨이 화가 뭉크의 <절규>라는 작품은 유명하죠.
노르웨이어로 된 원제는 모르겠고, 영어로 번역된 제목은 The Scream입니다. 비명을 지른다는 건데..., 저 그림을 패더디하여 만든 동명의 공포영화 <스크림> 시리즈에서도 비명소리가 화면에 차고 넘치죠.
근데......... 저 그림 속에는 아무도 그 비명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명을 지르는데, 딴사람들은 그 비명을 듣지못하다니요? 그럼 그림속 저 사람을 자신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걸까요? 왜 비명을 지를까요?
잠시, 다시 한국 현실로 돌아오죠.
한국에서는 대선 직후 48%에 해당하는 사람이 '맨붕'이란 걸 심각하게 겪었다고 하더만요. 맨붕이란 거, 그 현상이 외부로 표출되면, 뭉크의 그림에서도 보이는 일종의 절규에 해당하겠죠.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더군요.
- 맨붕한 사람들은 '박근혜 대통령'이란 걸 반대했던 걸까?
아니면
- '문재인 대통령 (혹은 민주적 대통령)'이란 걸 원했던 걸까?
뭔 궤변이냐고 황당하게 느껴지시겠지만, 저는 저 둘의 차이가 크다고 봅니다.
발성되는 scream과 발성되지 않는 scream의 차이만큼이나요.
혹은, 望과 忘의 차이만큼이나요.
다음 글에서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