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게이머 / 헛됨의 미학
가볍게, 가베얍게....당산님 방에서 까마귀가 나오는 시를 만나면서, 참새처럼 귀엽게, 비들기처럼 평화롭게, 그렇게 살아야지 하던 생각을 또 잠시 잊고, 다시 저 무거운 까마귀가 되어 본다. 저 앞의 글, '수선화...'에서 마지막 쓰셨던 촌촌님의 댓글을 자꾸 뒤돌아 보는 것이다. 하긴, 까마귀의 뼛속이 더 가벼울지도 모르지....이 너른 우주에서 티끌 하나의 차이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ㅎ
라캉은 무의식이라는 것도 융처럼 원래 있었던 인간의 본능으로 보기 보다, '공백'으로부터 끌어낸, 단지, 기능적으로 의식과 일관되지 않는 상징들일 뿐이라고 보았다는 것에 기어이 또 동감이라도 표시하고 싶은 것이다. 무릇, 有는 원래부터 있음이 아니고, 無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말을 한 것이라고 해도 비약은 아니리라. 촌촌님도 그리 보셧듯, 색즉시공 공즉시색과도 관련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리라. 그래서, 라캉 역시, 다분히 불교적이라는 말을 하는 것도...
어떤 철학자는, '내가 삶을 사는 목적은 가장 쉬운 것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게 바로, 저 헛된 상징들의 구조와 그 기능들에는 실체는 없고(無,), 오직 그들 간의 '위상'들만 있을(有) 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증명하기를 그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쉽고 가볍게, 그저, 있다면 있는 줄 알고, 없다면 없는 줄 알면서 넘어 가거나, 너그러이, 저 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세상 모든 것을 다 포용하며 넘어 가거나, 혹은, 세상 살고 보니,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되더라, 일갈하고 넘어 가면 그만일 것을, 현실과 현실 사이, 현실과 꿈 사이, 꿈과 꿈 사이, 그리고, 도무지 일관되지 않아 보이는 의식과 무의식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상징들이 다 그 각각의 삶의 틀 안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게임을 하고 있는지, 세심하게 들여다 보며 분석해 내는 일이 오죽 어렵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보다도 재미있다는 소리겠거니...
한 눈에, 별자리 보듯 삶의 틀과 그 룰들을 다 보는 게임왕도 있겠지. 삶을 게임으로 보고, 모든 게임들의 판도를 다 읽어 내는 왕게이머... 그런 게이머라면, 인생은 얼마나 가벼울까? 자신이 받게 되는 포상과는 무관하게, 어차피, 다 헛된 것이므로, 게임의 승패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가벼운' 존재자들의 몸짓을 재미있게 응시하고 관조하며, 그러면서도,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한 판, 걸지게 놀아 보는 유머 가득한 삶, 유희로서의 삶...
원래, 지행의 불일치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그 아는대로 말하고 행하게 되어 있으니까. 모르는 건 말할 수가 없고 행할 수도 없다. 꿈에서가 아니더라도, 일관되지 않아 보이는 언행도 들여다 보면, 그 의식의 밑뿌리인 무의식의 발로여서, 우리의 행위는 어느 순간에도 우리를 속이는 법이 없다. 우리가 우리 삶의 주체자가 되기 위해서는 저 무의식의 우리까지 모두 다 들여다 보면서 우리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완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그 무의식의 우리에게 끌려 가곤 한다. 무의식은 바로 우리들 안의 마법의 성이어서, 게임을 분석하는 게이머마저도 그 부서지고 일그러진 룰에 빨려 들어가기 십상이다.
철학은 그렇게 빨려 들어 가지 않는 주체자로서의 게임을 해보자는 것이다. 그 마법의 성을 포함하여, 원래는 공백일 뿐이었던 삶의 판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들여다 보자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그어져 있던 그 판의 메트릭스를 의식의 표면 위로 드러내어 놓고, 그 위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말(言)들로 말(馬)을 삼아 우리도 게임을 해보자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을 그렇게, 공백 위의, 허구의 판 위에서 행해지는 어떤 게임으로 reduce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한 편의 연극과도 같은 삶의 유머 있는 주체자가 되는 것이다. 거기가 축구장인지 농구장인지, 천지도 모르고 남의 굿판에서 깨춤 추는 삶은 유머가 아니라 코메디이다. Something out of nothing...원래 空임을 잘 알기에, 그 판 위에서 걸판지게 놀면서도 그 게임만을 이 세상의 유일한 게임으로 절대시하지 않는 심리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삶...남의 굿판에 기대거나 착취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삶, 그야말로, 몸과 마음으로 공즉시색의 깨달음을 실천하는 삶이 아니겠는가?
많은 과학적 가설들도 그런 '유머있는' 게이머들이 삶 속에 내재된 게임의 룰들 틈새에서 새로운 룰들을 발견하는 통찰에서 나온 것이고, 그 통찰을 이름하여,철학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보면, 무슨, 철학은 과학이 발전성장할 동안 아무 것도 해놓은 게 없다는 말들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순전히 그 많은 저마다의 게임의 규칙들의 틈새를 파고 또 파고, 비추고 또 비추는 철학 덕분에 그 진위를 검증하는 과학의 할 일이 끝없이 생기는 건데...그러고도, 철학은 비켜 서 있을 뿐,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돌보는 엄마처럼, 핼리콥터 맘처럼, 과학의 앞뒤를 보살피면서 그 상징들의 관계가 얼마나 명료한지, 어설픈지를 살펴 주고 있는데...
하지만, 언어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어설픈 사다리들의 틈새를 파고 파고 또 파들어 가도, 언어게임은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어서, 그 짓을 수천년을 거듭해 온 지금까지도, 우리는 저 플라톤을 입에서 또 다른 입으로 다시 또 다시 확인하고 분석하고 연장하며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돌고 있다.
언어가 그렇듯,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가설은 없다. 모든 가설들은 태생부터 다 서로 어느 부분이 연결되고 닮아 있는 큰 통찰의 대가족관계 속에 들어 있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줄줄이 이어져 온 그 허상들, 상징들 간의 관계에 대한 탐구, 또 그 탐구에 대한 탐구..., 실체를 확인하고 실재계로 가는 길이 그것이 아니던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은 그런 과정에서의 어느 가설을 검증하는 단계부터라고 하겠지만, 眞으로든 僞로든, 사실적으로 검증가능한 통찰만 과학의 범주에 넣고, 그 이전의, 그런 가설들이 도출된 바탕인 통찰들은 비과학, 또는 미신으로 취급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과학을 잉태한, 혹은 뒷받침하는 그런 통찰들을 과학으로 부르든 철학으로 부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차피, 끊임없이 계속되는 변증법적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이니까. 저 라캉의 '잉여향유'라는 개념만 해도, 주인이니, 노예니 하는, 버젓이 내노라하는 상징들간의 관계를 분석하던 틈새, 허공에서 건져 올려진 통찰이 아니던가? 궁극적으로는 그 모든 과정들이 실재의 범주를 향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분명, 저 헛되고 또 헛될 수 있는(원래 無이므로) 이미지들과 상징들로 이루어진 사다리의 디딤대들 사이의 허공에서 김밥 옆구리 터지듯 비져 나와 또 다른 보조 사다리를 세우는 일이다. 이제 우리가 더 이상, 기성 상징들의 올가미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논리체계를 세울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진리란 어떤 실체가 아니고, 이미지나 상징들도 물론 아니고, 상징들간의 관계와 그 관계들의 관계를 인식해 나가는 끝없는 길목에서 잠시 잠시 비쳐 든 한 줄기 빛에 반응하며 유희하는 우리 안의 작은 빛의 깨달음으로나, 저 멀리 어딘가에 있다고 희망하게 되는 그 어떤 것이 아닐까?
그나저나, 우리의 저 望과 忘은 지금, 어디쯤을 헤매고 있을까? 괜히,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멀쩡한 사다리의 디딤대 사이를 미끄러져 나가서 되돌아 오지도 못하고 허무의 바다에서 실종되어 버린 게 아닐지? 어쩌면 처음부터, 뜬금없는 미신이 아니었던지? ㅎ
자다가 또 뜬금없이 봉창을 두드리는 해선녀로부터....ㅎㅎ
빛의 미학 http://blog.daum.net/ihskang/1830890
2월 저녁의 흐린 수채화 http://blog.daum.net/ihskang/96323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