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에서

[스크랩] 望과 忘 (3) ..... 예수님이 화나셨나?

해선녀 2013. 1. 26. 21:17

(이어서)

 

오늘은 望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앞글에서 이미 望을 양(羊)에 비유했던 바, 기독교에서 말하는 '길 잃은 어린 양을 구원'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보죠.

 

종교 경전은 '문자 그대로의 해석'보다 '은유'로 읽어야한다.... 라는 것이 비종교인들의 일반적 견해입니다. 저 역시 그렇고요.  이런 전제를 깔고, 즉, 성경의 기적 등과 관련된 부분을 '은유'로 받아들이고 살펴본다면 ........'어린 양을 구원'하는 것과 관련하여 제게 가장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장면은 아래의 그림에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가 마태오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장면이죠. 제 단견입니다만, 성경 최고의 기적/반전이 아닌가 싶습니다. 카라바조의 <마태오의 소명 (the Calling of Saint Mattew)>이 그림 제목입니다.

 

 

예수가 베드로와 함께 어두침침한 방에 들어섭니다. 그곳에는 마태오를 비롯한 세리(稅吏)들이 모여있죠. 예수가 그 세리 중 한명인 마태오에게 손짓하며 "나를 따르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어두운 장소에 빛을 등지고 서있습니다. 예수의 손끝을 따라서 빛이 주욱 그어지며 마태오에게 향하고 있네요.

 

성경에 의하면, '나를 따르라"라는 말 한마디로 인해 마태오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 9:9)

 

(마태오는 나중에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 됩니다. 성인의 반열에 드는 거죠. 그렇다면, 제 아무리 초라했던 시절이 있었다하더라도 성인이 될 법한 중후한 느낌을 줘야 할텐데.....카라바조 그림에서는 그런 느낌이 없습니다. 오히려 초라하거나 비굴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카라바조 그림의 특성이 여기서도 등장하는 거죠. 따라서, 저 그림에서 과연 누가 마태오냐, 예수의 손가락이 그림 속 누구를 가르키느냐..... 에 얽힌 이야기가 많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인터넷을 조회해 보시길.) 

 

마태오의 직업은, 말 그대로 '세리(稅吏)' 였습니다. 그 당시 세리의 역할을 살펴보죠.

 

기록에 의하면 정복자 로마인들은 피정복자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하죠. 그래서 묘책을 생각해냅니다. 유대인에게 징세권을 파는 입찰을 실시하는 거죠. 낙찰된 유대인은 목돈을 로마 정부에 선납하고, 유대인의 특출한 장사 능력을 발휘하여 동족들로부터 낙찰액 이상의 돈을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일을 했답니다. 그러다보니 유대인들은 로마인들보다 유대인 세리를 더 미워할 수밖에 없었겠죠. 우리 역사에 비춰 예를 든다면 '일제에 빌붙어 동족의 고혈을 빨아먹는 피도 눈물도 없는 파렴치한/악질/반동/모리배/매국노/역적 조선놈....그래서 일본놈보다 수백배 수천배 더 미운 조선놈' 정도 되려나요? 

 

그런 세리 중 한 명을, 길 잃은 어린 양을 보살피듯 예수가 거둬들이는 겁니다. 나머지 유대인들이 빤히 지켜보는 앞에서요. 메시아로 추정되는 예수가 분연히 일어나 로마인을 물리치고 핍박받는 유대 민족을 구원해주기만을 이제나 저제나 간절히 기다리던 바로 그 유대인들 앞에서요. 이러한 예수의 행위는 결국, 그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예수를 버리게 되는 여러 요인 중의 하나였을 수도 있겠죠.  

 

이런 예수와 유대인의 모습이 은유적으로 표현된 그림도 있습니다.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아>를 보죠.

 

 

보통 이 그림을 관람할 때는 탕아의 불쌍한 표정과 탕아를 보듬는 아버지의 인자한 표정을 보며 감동받습니다. 하지만, 그들 부자 곁에 지켜서고 있는 '탕아의 형제들' 표정도 아주 볼 만합니다. 떨떠름함을 지나서 저주하는 듯한 눈빛까지 내비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나요? 예수가 마태오를 보듬을 당시, 유대인들은 저 형제들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분노와 경악의 표정을 지었을 법 합니다.

 

 

여하튼, 말 한마디로 못된 놈을 회개시키는 예수의 능력은 별로 감탄스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못된 놈까지 훌쩍 보듬는 예수의 사랑과 헌신과 희생은 감탄스러움을 넘어서 정말이지 기적처럼 보입니다. 저에겐요.

 

테레사 수녀, 데미안 신부... 등등의 성인 반열에 든 사람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오지의 어느 신부, 강원도 산골의 어느 목사, 독재정권 감옥에 갇힌 어느 목사 .... 등등에서 예수의 자취를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된 가장 큰 요인이 바로 그런 헌신과 사랑이겠죠.

 

당연히 서양화에서 예수는 자비로운 모습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끌려가던 처절한 그 순간에도 자상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엘 그레코의 그림 <성 베로니카>에서처럼요.

 

 

(수건에 세겨진 이런 그림이나 조각을 '베라 이콘 (Vera Icon)'이라고 합니다. 예수가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던 중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수건으로 예수의 땀을 닦아줬는데, 그 수건에 예수의 얼굴 형상이 저절로 드러나더라는 기록을 형상화 한 거죠.)

 

그런데, 이런 자애로움과 헌신의 상징이던 예수가 갑자기 화난 얼굴로 등장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가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아래의, 러시아 태생 작자 미상의 베라 이콘이 그 한 예겠죠.

 

 

 

 

13세기에 접어들면서 러시아 민초들은 외부로부터의 심각한 고통에 직면하게 되죠. 바로 터키계/몽골계 유목 민족인 타타르로부터 수시로 침략을 당하고 살륙 당하게 되는데, 속수무책이었나 봅니다. 유목민족의 기동성과 호전성을 당할 재간이 없었겠죠. 바로 그 시절, 저 성난 예수 형상을 한 베라 이콘 (Vera Icon)이 등장합니다. 아마도 예수의 힘을 빌려 외부의 침략을 견디고자 했던 거겠죠. 구태여 비유하자면, 사찰 입구에 놓인 무시무시한 표정의 사천왕이나, 우리네 옛적 마을 입구에 사나운 표정의 장승을 세워 악귀를 물리치려던 것과 비슷한 역할을 기대했다고나 할까요.

 

이쯤에서, 望에 대한 주제로 되돌아옵니다.

 

사랑과 헌신을 상징하는 예수의 온화한 모습을 저토록 심통스럽고 화나게 만든 건 누굴까요? 세력을 과시하려는 종교단체 수장이 아닌, 바로 그 시대 평민들이었을 겁니다. 그 당시 평민들의 望이 변한 거겠죠. 대중의 望이 더 늘어난 것이겠죠. 그래서, 사랑과 헌신 외에 강력한 수호신의 능력까지 요구하게 된 거겠죠.

 

사랑과 헌신이 望조차 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을 겁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겠죠. 현대적 의미에서의 '소외'가 없는, 루카치식으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총체성'이 확보되던 시대에는 그랬을 법합니다.  그러다 인간 사회가 좀 더 복잡해지며 사랑과 헌신이 望으로 등장하던 시기가 있었을 겁니다. 그때 온화한 모습의 예수가 등장했을 것이고요. 한단계 더 나아가면 내 가족을 지켜 줄 수호신이 望으로 등장했던 시기도 있었네요. 바로 그때쯤 예수는 저렇게 성난 모습으로 등장한 거겠죠.

 

(그럼, 현대 사회는 어떨까요? 예술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고 흔히 말해지니, 지금 이 시대의 예술도 다른 모습의 예수로 변화된 望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 충분히 추정됩니다.  실제로, 컨템퍼러리 아트 시대답게 예수의 모습은 정말 극단적/파격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만, 이야기가 길어 질 수 있으니 다음 기회로 미루죠.)  

 

여하튼, 이렇게 望이 변할 수 있다는 제 궤변을 합당한 가정으로 우긴다면..... 望은 크게 3개 정도의 특징을 가지겠네요.

 

첫째, 望은 또 다른 望을 낳는 것 같습니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요.

 

기독교는 하나님만을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를 모태로 한 일신(一神)교에서 출발했다고 하죠. 하지만, 예수가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며 그리스도라는 신으로 승격하는 순간 이신(二神)교적 특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성부/성자/성령을 모두 인정하는 다신(多神)교로 변화되어 버립니다. 이런 현상은, 어찌보면 인간의 望이 자가증식하면서 또 다른 望을 낳았던 거,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望을 충족시킬 또 다른 신이 필요했을 수도 있지요.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에는 정파와 더불어 수많은 이단이 존재하죠. 그 이단이 포교할 때 주요 타킷으로 삼는 사람이 바로 정통 신앙인이라고 하죠. 비신앙인을 대상으로 포교하는 것이 아니고요. 기존 정파에서 풀어주지 못하는 그런 望을 찾아주는 방식으로 포교하죠. 정파와 똑같은 경전을, 정파와 다르게 해석해서요. 

 

그리고, 세가 확산되면 그 이단은 자연스럽게 정파가 됩니다. 물론, 그 순간에도 이단은 또 생겨나겠죠. 인간의 望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까요. 성경을 통한 望을 갖지 않고 있던 비기독교인 눈에는 이런 현상이 황당하게 보일 따름입니다만.....사실, 그런 비기독교인도 성경이 아닌 다른 것에서, 예컨데, 사회가 합의한 '일반 상식'의 잣대에서 별개로 望을 만들고 있으니 별반 차이가 없는 거일 수도 있겠고요. 주지하시다시피 '일반 상식'은 시대에 따라 변하죠.

 

결국, 인간의 望이란 것은 또 다른 望을 계속 키워나가는 자가 증식 기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를 언급하려니....... 글이 또 너무 길어졌군요. 둘째와 셋째 특성에 대한 제 궤변은 다음 글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둘째/셋째 특성은 종교적인 면을 배제하고 실생활 면에서 드러나는 것들로 논지를 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루한 글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계속)

 

 

 

사족) 오늘도 결국 진짜 '양'그림 한 장 못올리고 흐지부지 종결하네요. 글 한 편으로 끝내려던 것이 벌써 세편으로 늘어났는데, 이런 분위기라면 너무 지루하게 이어지겠군요. 대략 네다섯편으로 서둘러 결말짓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죄송

 

 

 

출처 : 촌촌
글쓴이 : 촌촌 원글보기
메모 : 또 가져 갑니다. 계속...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