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에서

[스크랩] 望과 忘 ...... 그리고, 양과 염소 (2)

해선녀 2013. 1. 19. 05:14

(이어서)

 

근데, '속죄 염소'는 당최 뭘 말하는 걸까요? 성경의 저자들마다 좀 다르게 표현합니다만, <레위기 16:21>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뒤집어 쓴 염소로 등장합니다. 이런 성경구절을 충실하게 표현한 <속죄 염소 (Scape Goat)>라는 작품을 보죠.  라파엘전파 작가 중의 하나인 윌리엄 홀먼 헌트가 1854~5년경에 그린 거죠.

 

 

 

 

라파엘 이전의 초심의 세계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던 화가의 특성만큼이나 그림도 상당히 상징적입니다. <레위기>에선, 유대인들이 인간의 원죄(혹은 그냥 죄)를 속죄받기 위해 두마리의 염소를 골라 한 마리는 사원에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살려서 신에게 속죄를 받도록 하죠. 사원에 바쳐진 염소를 카라바조의 그림 속 염소로 추정한다면, 살려서 속죄용으로 쓰여지는 또 다른 염소는 바로 헌터의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거겠죠. 

 

"....속죄 염소를 광야에 보내며... 염소는 모든 죄를 짊어지고 낯선 광야로 간다"

 

도상학적으로는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뒷편의 언덕 풍경이나, 혹은 속죄염소의 발이 빠져있는 소금침전지.... 등등요. 화가는 이 배경을 그리기 위해 사해에 위치한 어떤 장소로 갔다고도 전해지죠. 신이 그곳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벌했다고 생각되는 곳이라나요. 소돔과 고모라를 단죄했던 그 끔찍한 곳에 홀로 선 속죄 염소.... 무척 상징적이죠. 

 

염소의 머리에는 붉은색 모직 끈이 둘러져있습니다. 인간의 죄를 뒤집어 쓴 탓에 붉게 되었다고 설정한 거죠. 만일 이 염소가 광야에서 산 채로 발견되고 붉은색이 흰색으로 변했다면 신이 그 속죄를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된다더만요. 화가는 이 장면을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죠.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속죄 염소'......는 마치 목사님 설교에서처럼, '희생'과 '사랑'을 의미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근데, 과연 그럴까요? 희생과 사랑 정도의 긍정적 의미로 받아들이고 말아야 할까요? 저 멀리 내 눈길이 닿지않는 그래서 쉽게 잊혀질 광야로 뭔가를 보내버린 것은 아닐까요? 무언가를 忘해버린 것은 아닐까요? 속 편하게 살기 위해서요.  

 

속죄를 위해선 염소와 같은 짐승만 이용하진 않죠. 사람을 속죄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짐승 대신에 사람을 속죄도구로 삼을 경우 그 속죄는 더 구체화되고 효율적(?)이 될 것 같네요.

 

인간을 속죄 염소와 유사하게 이용한 사례로......십자군 전쟁을 언급할 수도 있으려나요? 하지만 '역사상 가장 멍청했던 전쟁'으로까지 평가받는 십자군 전쟁을 예시로 사용하기는.... 좀 뭣하군요. 기독교 근본주의 영향이 큰 미국과 한국에서는 십자군 전쟁이 어느 정도의 긍정적 이미지를 띕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해프닝 중의 하나였을 뿐이었다고 하죠. 종교적 판단이나 전쟁의 정당성 여부 등등을 떠나서요. 오죽했으면,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침공을 십자군전쟁에 비유했을 때, <양철북>의 작가 퀸터 그라스가 그렇게 노골적/공개적으로 비아냥거렸겠어요. 일국의 대통령이 너무 무식하다고요. 역사 공부 좀 하라구요.     

 

십자군 전쟁 이후에 벌어진 '마녀 사냥'이 한 사례가 될 수 있겠네요. 십자군 전쟁에 비해 우리 무의식의 어떤 지점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법 하니까요..

 

마녀 사냥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있죠. 교권이 형편없이 추락한 교황청의 '군기 잡기'용 행사였다든가, 혹은 민간치료법에 빼앗긴 '돈 줄'을 갖기 위한 종교의학 종사자들의 노림수였다든가, 혹은 하층민의 불만이 영주나 귀족에 미치지 않기 위한 '시각 전환'용이었다든가, 심지어는 봉건제도 해체기에 일부 여성 자본가(?) 증가로 인한 여권 신장을 막기위한 남성들의 뒷공작이라든가 ..... 등등요.

 

하지만 제가 주목하고 싶은 건......... 마녀를 색출하는 작업이 (교황청이 아닌) '민간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마녀 사냥이 본격화되기 시작할 즈음에야 교황청은 개입했다고 하죠. 동네 사람이 이웃 노파나 과부를 마녀로 지목하면 교황청이 와서 심판하고 그 재산을 낼름하는 식이었죠. 교황청은 그야 말로 별다른 수고없이 날로 먹은 거죠. 구성원들이 앞다퉈 '속죄 염소'를 만들어주니까요.

 

저 광야에 놓여진 염소는 운좋으면 살아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것 같은데, 마녀사냥 한가운데에 놓였던 '염소'들은 뭐... 그야말로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십자군전쟁의 여파 등등으로 인해 사는 게 막막해 진 주민들이 서로 돕지는 못할 망정 왜 그런 끔찍한 짓을 '자발적으로' 저질렀을까요? 이웃집에 사는 과부가 마녀로 죽임을 당해도 그 재산은 전부 다 교황청으로 귀속되니 얻을 것도 없는데,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얻는게 없다면, 현실 속에서 잊고 싶은 어떤 것을 마녀사냥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혹시........... 그런 忘이 무의식적으로 발생하진 않았을까요?

 

앞글에서 조지 오웰의 <1984>의 중요한 두가지 모티브가 '증오'와 '망각'이라고 말씀드렸더랬습니다. '증오'란 것은 그 특성상 인간의 맘 속에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은데, 의외로 '망각'을 위한 주요 방법으로 사용될 수도 있음을 저 마녀사냥 사례가 얼핏 보여주네요.

 

아감벤이란 철학자는 '호모 사케르'란 용어를 씁니다.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여도 괜찮은 존재를 뜻하죠. 지금 당장 죽이진 않지만, 언제든지 죽여도 별 상관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아... 제목은 <望과 忘>인데..... 忘에 대해서만 주절주절 너무 길게 쓰고 있네요.

 

望, 그러니까 '양' 그림을 보고나서  다시 忘(염소) 이야기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모 사케르'는 그 후에 다시 이야기토록 하죠.

 

 

앞선 두개의 그림 속 염소들과 달리, 양은 평온한 모습으로 서양화에 등장할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죠. 예컨데...... "길 잃은 어린 양".......이란 표현을 듣기만 해도 그냥 짠~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죠. 길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짠~한데, 하물며 길 잃은 그것이 "어린" 것이라니요. 꼭 찾아서 지켜줘야 할 의무감이 불쑥불쑥 생겨납니다. 찾은 후에는 고이 간직해야 할 어떤 것으로 느껴지고요.

 

근데..... "예수를 누가 죽였느냐는 문제에 집착하는 순간 인류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 고 니체는 말했더군요. 인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는데, 후세인들은 그로 인해 비극의 원류를 갖게 되다뇨? 뭔가를 얻는 순간 그게 또 다른 비극일 수도 있는 건가요? 길 잃은 양을 찾는 순간 또 다른 염소를 광야로 내치게 되는 건 아닐까요?   세번째 글에서 제 궤변을 늘어놓도록 하죠.

 

 

 

 

 

사족) 제 의견을 구체화하지 않고 자꾸 질문체로 문장을 맺으며 끌어서 죄송합니다. 몇 분 읽진 않으시지만, 그래도 짜증나실 분들껜 미리 죄송 ㅠㅠ

 

영화 한 장면 올리며 두번째 글 마무리합니다. <그을린 사랑>이라는 영화에 등장하죠. 성모 마리아 사진이 붙은 저 총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요? (헉, 또 .... 질문체...ㅠㅠ)

 

 

 

 

 

(계속)

 

출처 : 촌촌
글쓴이 : 촌촌 원글보기
메모 : 거봐요. 이 좋은 글을 계속 안쓰시면 머리에 가시가...ㅎㅎ 감사합니다. 또 가져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