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나의 '노가다 집장사' 이야기 1

해선녀 2012. 7. 5. 21:32

 

어제는 이 집 지붕수리를 했다. 거의 이십년이 다 되었나,  내가 지은 빌라다.  맨꼭대기층을 베란다 확장을 해서 거실과 방 하나를 좀더 넓게 만들어 지금도 이 집 주인인 둘째 동생네에게 특별분양한 것이었지만, 세월이 가니, 그 달아낸 부분이 물이 새는 것이다. 수리를 맡은 유사장은 그 때 배관공사를 해주었던 젊은이였는데, 지금은 동네 입구에서 인테리어 가게를 하고 있다.  일년 반 전, 내가 이 집으로 세를 얻어 들어올 때도  당시의 페인트집 사장과 함께 집수리를 해주었었다.

 

이 빌라의 이름은 美田이다.23 평형의 작은 집이지만, 딴엔 예쁜집이라고 내가 그런 이름을 붙였던 것인데, 사실, 그 이름값을 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제새끼는 다 예쁘다고, 내 눈엔 아직도 예쁘지만, 역시, 낡아서, 보온력이 떨어지는 듯, 지난해 난방비가 작은집 치고 제법 많이 나왔던 것 같다. 그래도,  이 집을 그 무릎에 안아 주고 있는 듯한 든든한 아버지 같은 관악산의  팔뚝처럼 보이는 한 자락이 다른 집들 지붕 위로 건너다 보이는 작은 주방 창문과 남산 방향으로 툭 터인 전망이 여전히 좋다.

 

뒷면이라 보이지는 않지만, 이 집 뒤로는 관악산 봉우리가 정말, 아버지의 얼굴처럼 우뚝 솟아 있다. 어제 냉커피를 가지고 유사장과 한 일꾼이 작업하고   있는 옥상으로 올라가니, 그 아버지가 너, 왜 또 그렇게 코쳐박고만 사냐?  한 번씩  올라 와서  이 에비 얼굴도 좀 쳐다보고 그러지,...하는 것 같았다. 요즘은 덥다는 핑계로, 시원하게 에어컨된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 오니, 마을입구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오면서 그 얼굴을 바라보던 게 언제였나 싶다. 그러고 보니, 숲산책도 안한 지가 꽤 되었다.

 

 그 아버지의 무릎 맨 위에는 낡은 군인 아파트가 있고, 그 바로 아래, 그러니까, 이 집보다 한 골목 위의 코너에는 이 집 짓기 바로 전에 역시 내가 지은  빌라가 또 있다. 그 이름은 心田. 자그만치, 55평형의 대형으로, 당시, 서초동의 어느  고급빌라들보다 더 잘 지었다고 소문났던  집이지만, 나는 마음밭을 가꾸리라는 생각으로 감히, 빌라에다가 그런 이름을 붙였다.  美田과 똑같은 70여 평의 대지에  층당 한 세대씩 4세대. 지하는 모두 주차장과 창고...크기도 크기이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직접 논현동 건축 백화점을 오르내리며 고르고 고른 원목과 대리석을 비롯한 소소한 자재들과 한 치도 내 눈이 들어가지 않고는 지나치지 않은 모든 설계, 그리고 마음을 담아 설치했던 가스 벽난로와 꼭대기층의 다락방, 그리고 지붕의 온수  태양열판.... 더 좋은 자재들이 수없이 많아진 지금은 그게 다 골동품이나 되어 있겠지만, 나는 지금도 식구들이 함께 산다면, 그 집에 이사들어 가고 싶다. 

 

 그러니까, 미전은 심전의 예쁜 동생이라는 뜻이었다.  유사장은 이 동네 집수리를 내내 하고 다니지만, 아직도 그 집만한 집이 없다고 말한다.그에 의하면,  우리가 살려고 했던 그 2층을 사서 들어와 살던, 동양지리학하시던  교수님 댁에 무슨 수리를 하러 갔을때,  지나가는 말이었겠지만, 그 집은 호랑이가 앉아서 배로 따뜻이 감싸고 있는 자리에 해당한다고 하시더라나...그런데도, 그는 왜 서울대를 그만 두고 나와버리고,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몸도 아프게 되었을까?  짐작에, 서양지리학이 지배적인 학과의 다른 분들과는 소통이 어렵지 않앗을까도 싶지만,  종종 그 분의 소식이 궁금하다. 

 

   이 동네에서 지금도 살고 있는 당시의 업자들이 몇 더 있지만,  유사장은  기술도 성품도 제일 믿을 만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아니, 사실, 거의가 다 그랬다. 배운 건 없지만, 난 소위 그 노가다들에게 늘 정이 갔다. . 몇몇,  술 먹고 바람질하는 사람들도 있고, 돈 받은 만큼 제대로 일해 주지 않아 애먹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거의가 다 선하고소박한 사람들이었다. . 그 후로, 시부모님과 함께 살기 위한 전원주택을 지으려고 처음으로  양평에 마련했던 대지 옆에 일단, 허름한 농가를 빌려 수리했을 때도, 나는 서울에서 함께 일하던 일꾼들을 내 차에 태우고 다니면서 수리를 했다. 양평 업자들의 텃세가 심하고,  자재니, 뭐니, 불편한 게 많았지만, 그들은 묵묵히 잘 일해 주었다. .결국, 도시형 체질이신 어머니를 그런 시골에서는 못모신다는 딸들의 반대에 부딪쳐 전원주택은 포기하고 어머니는 산본의 전셋집 아파트에서 모시고 살다가 돌아가셨지만...

 

심전과 미전 이전에도, 나는 집을 지었었다. 그러니까, 이 집이 지어진 93년 봄까지, 한 3년 동안, 모두  이 동네에서만  자그만치 네 번에 걸쳐서 , 그것도 단독주택이 아니고 다세대 주택을. 나 혼자서 해낸 건 아니고,  동업자와 둘이서였지만...햐, 쓰다 보니, 나의 '노가다 집장사 ' 이야기를 정식으로 좀 써야겠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이야기'는 못되어도... ㅎ 나는 왜  이런 이야기를 제대로 쓰지 못했을까? 한 번 붙들고 써야지, 생각은 자주 스쳤지만, 그 때 그 때, 닥치는 주제들을 쓰기에도 게으르다  보니 그리 되었다. 살아온 세월에 대해 일부러 생각을 모으고 정리해 보는 일은 숙제를 미루고 당장 눈앞의 주전버리에 빠져드는 아이처럼 미루고 잊어 버렸다. . 뭐, 가까운 사람의 인격을 운운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이런 일들은  진작에 글로도 정리해 두었어도 좋았을 터인데...

 

..사실, , 남편은 한 번도 내가 하는 일에 반대를 해본 적은 없지만, 어이, 김교수, 마눌이 집장사해서 돈 많이 번다며? 이런 소리에 속으로는  상처를 받고 있지 않나도 싶었고,  나 자신도, 내가 지은 집 집들이를 했을 때, 친구들이, '야, 너 복부인 됐구나. 돈 많이 벌었니? 하는 소리가 그 옛날, '공부벌레'라는 소리만큼이나 마음에 좀 걸렸었다. 하지만, 내가 투기꾼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해 구태여 변명하고 싶지도 않게, 나는 늘 당당했을 뿐 아니라, 밥집사든 떡장사든, , 글장사든 말장사든, 뭐가 대수란 말인가?  단지, , 얼핏한 이야기로 설핏한 오해나 더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 어떤 글인들 그렇지 않던가?  나를 어떻게 이해하거나 말거나, 모든 이해는 일종의 오해라는 생각은 어차피  마찬가지였으니, 한 마디로, 정작 자신에 대한 게으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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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지은  집은 ,이동네에 처음으로  이사 와서 3년 가까이 되었던 91년, 그 이층집을 헐고 지은 다세대 빌라였다.   이 동네는 다, 원래의 임야를  7, 80평씩,  반듯반듯하게 구획개발해서 예편된 영관급 장교들에게 분양한 '군인단지'였는데, 10 미터 도로를 사이에 두고, 큼직큼직한 집들이 보기좋게 늘어서 있는 곳 중에서도 그 집은 가장 밝고 쾌적한 코너 자리였다..  우리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기 전에 내가 딱 5년, 중학교 교사를 하며 모은 돈으로 덕지덕지 융자 안고 전세 끼고 사놓고 갔던 신림동 산동네집도 80평이었고,   귀국 후에 온갖 나무와 동물들을 키우며  한 때는 시부모님도  모시면서 7년쯤, 그 집에서 살았었고, 그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남편은 말하기도  했었다. , 그러나,  , 우리는 우연히, 서울대 후문쪽의 이  동네, 그러니까, 봉천동의 맨끝 동네에 있는 어느 교수댁을 방문하였다가 이 한갓지고  쾌적한   숲아랫 마을에  혹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이 동네는 관악산 본자락이면서도  경사가 매우 완만하였고,  그 당시, 포니2를 끌고 그 가파르고,  꼬불꼬불 좁은 언덕길을 위험스레 교행하며 운전하거나 무거운 시장 보따리를 들고 오르내려야 했던 우리들에게는 이건 정말, 눈이 번쩍 뜨이는 곳이었다.   . 

 

그 집도 덕지덕지 세놓고 융자 끼고 샀었다.  다행히, 안방이 매우 넓어서 서재까지 겸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겨우 방 2개만 사용하고도, 유지하기가 빠듯했다. , 결혼하고서야 대학원 시작한 그의 공부십년 만에야  교수가 된 지 겨우 2년쯤이었을까?  돈 잘 버는 남편 만나서, 신혼때부터 돈을 모으며 살아온, 그래서 이제는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친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살림살이였지만, 나는 내내 시간강사에,  친구네 아이들 영어가정교사까지 하면서도 행복관엔 변함이 없었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 아무리 돈이 없어도, 공부하는데 드는 돈은 아깝지  않았고, 굶지만 않으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약간의 여가생활을 즐길 수만 있으면 그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이었다.

 

 우리의 그런 사고방식에 맞게?, ㅎ   신림동에서부터 렛슨비월오만원 짜리 동네 학원에서 피아노에 이어 바이얼린을 배워 온 큰아이가 갑자기, 바이얼린을 전공해 보겠다고 서울예고에 시험을 보겠다는  말을 했다.  그 때가 5월, 11월이면  입시인데, 6개월만에 니가 무슨 재주로 거기를 합격해?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한 번 공부해 봐...우리는  그 때부터 여러 단계의 선생을 두는 본격 렛슨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은행대출도 더 받아내어 웬만한 악기도 하나 사주었다. 우리가 누구인가? 아빠와 나는 집에서나 운전 중에나 항상 클래식 음악을 켜놓고 사는 사람들이고, 미국서 공부할 때는 특히, 아빠는 유학생으로서는 꽤나 비싼 Sony 테이프를 거의 오백개나 사서 일일이 녹음하고 리스트를 만든 사람이었다. .당시, 남편의 월급은 백오십만원. 은행융자 상환금 60만원 내고 씀씀이가 큰 그의 용돈을 쓰고 나면 생활비는 형편없이 모자랐다 그러나, 내가 또 누구인가? ㅎ

 

. 나는  시간강의도  더 맡고, 수당은 더 많지만, 그 때 막 알게 된 나의 망막색소변성증  때문에 될수록  고사하고 있던 야간 강의도 더 맡았다. 다행히,  , 친구도 그 아이들 공부를 내게 다 맡기면서 월 백만원을 주었다. 이런 것쯤은 고생도 아니었다. 미국서는 중국 음식점에서 내내 일하며 혼자서 네 식구 생활비를 벌면서도 공부해내지 않았던가? 그 때와 마찬가지로, 즐거운 마음으로 렛슨집에 아이를 열심히 태우고 다니는 기사노릇을 하면서, 이 아이의 공부길을 막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니, 정말, 이 아이가 음악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생각뿐이엇다. 월백만원을 각오해야 한다는 렛슨비를 앞으로도 계속 대어야 한다면, 이 집을 팔지, 뭐. 그러다가, 아이 음악공부 때문에 월세를 살게 될 것이라는 말들도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언제는 셋방 살지 않았던가? 아이가 합격하고는 곧장, 집을 팔려고 내어 놓았다. .바로 그 때,   옆집에서 그냥 파는 것보다는 빌라를 지어서 파는 것이 훨씬 이익이 크다며 함께 짓자는 제의를 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