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갑니다.
` 모든 것이 지나갑니다. 휙휙 박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무엇 하나 내 안에 머물어 잇기를 이제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 지나는 순간의 자태와 소리와 냄새와 느김을 즐길 뿐이지요...언젠가, 다시 그것을 만나면, 아, 너로구나, 반갑고 또 까맣게 생각이 안나도, 그쪽에서 아는체만 해주어도 고맙습니다. 내가 그것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미미햇던지를 너무도 잘 알기에, 그 쪽에서도 나를 어떻게 알앗거나 간에, 이 세상 어느 한 구석에서 그래도 서로 만났고 만나고 있다는 인연만 해도 그저 반가울 따름입니다.
어딘가, 눈에 익은 물건들, 사람들, 아끼던 소품들, 먹다가 만 빵 조각들, 언젠가 배웟던 외국어 쪼가리들, 쓰다가 만 글이나 잠시 머금었던 생각 쪼가리들이 다 그렇습니다. 아니, 언젠가 다 끝냈던 일들도 그렇습니다. 내가 이런 글을 썻엇나, 내가 당신을 언제 어떻게 만낫더라? 새삼스럽고 낯설어도 다시 생각하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하는 기억의 편린들이 다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어렴풋, 그 때 참 섭섭하고 아쉬웠던 기억들도 이젠 다 내 영혼의 항아리를 채워 주고 싯겨 주던 단비 같은 것이엇음을 깨닫습니다.
이제, 거울 앞에 돌아와 앉은 여인도 한참 지나 다시 또 다시 돌아와 앉은 할머니가 되엇습니다. 아가씨라고 불리다가 아주머니라고 불리고 이제는 언듯 들리는 할머니라고 부르는 소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놀라기도 하지만, 이 소리도 곧 익숙해지겟지요 머지않아, 할머니가 내 유일한 이름이 되었을 때. 손주들만이 아니고 시장 사람들, 버스 기사들, 가판대 아주머니들이 그렇게 부르는 소리들도 정겹게 들리면 좋겟습니다. 업소나 가게에서 언니라고 부르는 소리보다도 더 리얼하게 나를 일깨워 주고 보듬어 줄 것 같습니다. 주책 할머니, 답답한 할머니, 멍청한 할머니....다 좋지만,그저, 양체 할머니나 안되엇으면 좋겟네요...ㅎ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한여름, 무성한 덤불 한가운데를 건너다 보며 느릿느릿 지나가고, 당신들은 내 스산한 가을숲 끝자락을 비켜 지나갑니다. 아니,우리는 서로 다른 위치와 속도와 방향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들 속에서 흘깃 지나칠 뿐, 서로 제대로 들여다 볼 겨를도 없습니다. 그저, 너무 심한 소음을 내며 부딪치고 흔들리지나 않앗으면 좋은 것이지요. 이제, 그런 걸 감당해낼 의미도 체력도 없어요. 당신들과 나 사이에, 이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도,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가 나도, 다 흐린 안개 속에서 흘려 보냅니다. 사람 사이에서 상호투명성을 기하려고 애쓰던 시절은 내게는 이제 다 지나갓습니다.
지난 일요일에는 둘째 동생네와 함께 양평집엘 갓습니다. 애초엔 이것 저것 꽃모종을 좀 사다 심을까 햇지만, 그가 다니던 농원을 찾아갈 길눈도 없어서 길가의 아무 데나 들어갓더니, 값만 비싸고 마땅한 꽃도 없엇습니다. 눈에 띄는대로, 하얀색과 연보라색의 꽃잔디만 몇 판을 사서 마당 둘레에 듬성듬성 심고 보니, 혼자서 외롭게 피어나기 시작한 목련꽃에게 조금 위로가 되기는 하겟네요...내가 없엇던 겨우내 막내부부가 들락거리면서 돌보아 온 덕분에 집은 별탈이 없엇습니다. 이제 얼어 붙을 일은 없을 터이니, 보일러를 꺼놓고, 데크만 좀 정리한 후, 모처럼의 휴일 봄날을 그냥 즐기기나 하자고 나서서 양평과 남양주 언저리를 이리 저리 다녓습니다. 만개한 벚꽃을 보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할 듯, 그래도,오랫만에 먹는 오리고기와 봄나물과 따사로운 햇빛만으로도 충분히 봄은 봄이엇습니다. ..
에전에 우리가 꿈만 꾸다가 집도 못짓고 동생네에게 넘겨 버린 땅이 잇는 배꽃마을로도 건너 갓습니다. 웬 차들이 잔뜩 와 있나 햇더니, 아직, 배꽃축제 기간은 아니고, 마침 옥수수와 감자 심기로 농촌체험 행사를 하고 잇엇습니다. 12년을 연임하면서, 이런 행사들로 마을을 일으키고 있는 이장이 우리를 반겻습니다. 내가 심엇던 배나무들은 물론이고, 배밭 가생이로 심엇던 다른 꽃나무들도 덩굴식물들로 휘감겨 밀림처럼 우거져 잇었습니다. 이장에게 그 관리를 부탁하니, 일단, 일년 간의 복구비를 내어 놓으면, 임대를 알아 봐주겠다고 햇습니다. 다른 방도가 없으니 그리할 수박에요..
갑자전을 앞에 놓고 이야기하는 동안에, 십년 전의 일이 생각낫습니다. 자기가 소개한 땅을 산 댓가로, 이모님의 빈집을 언제까지든지 쓰게 해주겟다는 그의 말만 믿고, 다 쓰러져 가는 폐가 하나를 우리가 수리해서 쓰다가, 2,3년만에 주인이 다시 들어 오는 바람에 결국, 비워 주고 말앗던 일....부인이 바람이 나서 자살해 버린 후, 서울 딸네집에 가서 얹혀 살다가 본집으 로 돌아 와서 처음에는 바깥채에서라도 기거하게 해달라더니 우리가 없는 사이에 점점 안채로 들어와서 자식들도 들락거리기 시작하면서 결국, 우리가 더 이상 편히 슬 수 없게 되어 버렷던 그 집...그래도, 두어 번 맞닥드 렷을 때마다 미안해 하던 그 유순하게 생겻던 집주인 유노인...그의 안부를 물으니 잘 계시다네요. 유노인이 그 땐 이모부라고 우리에게 말햇던 것을 잊어 버렸는지, 지금은 어머니의 팔촌의 아들이랍니다.
이 사람은 그 때 그 일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 왔을까, 잠시 다시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 일로 유노인의 자식들과 사이가 나빠졋다고 그랬지만, 우리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나와 버렷으니, 결국, 자신이 끌어들인 서울 사람 봉 하나 잘 잡아서 그 덕을 보게 해주었다고 생색을 내엇겠지요...마을을 위해 자신이 얼마나 애써 왓는지에 대해 서만 자화자찬을 늘어 놓는 그에게 연민을 느꼇습니다. 그 유덕하게 보이던 그의 부친과 함께, 매우 신실한 사람일 거라고 무조건 믿엇다가 실망하고는 불평 한 마디도 안하고 그 집엘 더 이상 발걸음을 안해 버렷던 울양반의 심정도 그랬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람을 믿고, 종이 쪼가리 한 장 받지 않고 쓸 만한 집으로 수리를 해놓으니까 주인이 들어 와서 산다....그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도, 그와 라이벌 관게엿던 전이장으로부터 유노인의 사위가 억세게 항의햇다는 소문과 함께, 우리의 가구들이 어느 빈 창고로 옮겨져 잇으니 비워 달라는 전화를 받앗을 뿐, 정작, 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습니다. 신의를 배반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이 필요하겟습니까? 전이장도 그는 원래 그렇게 눙치고 퉁치는 사람이라고 그를 폄하하엿지만, 정작, 직접 내려와서 따지라는 말뿐, 외지인인 우리들을 거들고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그는 이제 전이장이 대적할 수 없을 만큼, 여기저기엣 많은 지원을 끌어 내는 능력잇는 마을 지도자로서의 위상이 확고해졌고, 그 덕분으로, 폐가가 수두룩했던 마을이 한결 윤택해진 모습이엇습니다. 유노인도 그 아버지도 모두 장수하시고, 전이장도 현이장도 마을사람들도 모두 다 하평하게 지내시기를 비는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게 그렇게 지나갑니다. 이제,내게 남은 역할이라고는, 이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사람구경이나 하며 느릿느릿 지나가는, 오래 눈길 줄 일도 없는 한 할머니의 역할뿐입니다. 무대의 끝쪽을 천천히 걸어 내려가면서 내 치맛자락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당신들은 아직 무성한 여름, 그 무덥고 힘들지만, 삶의 열의가 가득한 시대를 유감없이 알차게 사십시요. 노인이 되엇을 때에 대해 지레 걱정하고 대비하느라고 너무 움츠리지는 마십시오. 자신이 지나고 잇는 시대에 충실하면서 즐기는 것이 각자의 의무이고 권리니까요.
이웃에서 개가 짖고 잇습니다.이 밤중에, 누군가가 그 집앞을 지나가지도 않고 기웃거리고 잇는 것인지...어서 지나가십시오...아니, 저 개가 오히려, 골목에서 혹은 이웃집에서 일어나고 잇는 어떤 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간섭을 하고 잇는 것인지도 모르겟습니다. 그래. 짖어라. 네가 짖을 만하거든 짖어야지. 그게 너의 의무이자 권리니까...짖지 않는 개는 개도 아니란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아예, 짖을 줄조차 모르는 개는 아닙니다. 가끔식은 나도 저렇게 짖으면서, 살아 잇다는 기쁨을 느끼고 삽니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던가요 그렇지요, 가겟지요...그래도, 짖습니다. 아니, 기차는 가도 개는 짖습니다. 어떻게 짖느냐고요? 아, 이렇게 불질이나 하는 것이 짖는 것이지요....하하....내 웃음소리가 안들리세요? ^^
조용해졋습니다. 녀석아, 이제 다 짖엇니? 그래, 너 잘 짖었다. 내일 아침엔 간밤에 무슨 일이 잇엇던지조차 까맣게 다 잊어 버려도 너 잘 짖었다. 덕분에 나도 이리 한바탕 잘 짖엇네..밤이 깊엇습니다. 내일은 양평장에 가서 텅빈 아아치 위로 올망졸망 붉디 붉은 술잔들을 받쳐 들고 피어 오를 줄장미나 한 그루 톡톡한 놈으로 좀 사다 심어야겟습니다. 녀석아, 너도 .이제 자거라. 나도 잘게...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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