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교사의 과없 - 6 진리를 위한 변증법
眞理를 위한 변증법
다음의 글은 문법교사이자, 아프리카 교회에서 이탈했던 기부학파(Donatist)의 열성적 지지자였던 크레스코니우스(Cresconius)에게 보냈던 것이다. 히포의 주교로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종파를 이단으로 비난하였으며, 이에 크레스코니우스는 기부파 교회의 동료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기부파 주교 페틸리안(Petilian)의 견해를 옹호하는 글을 써서 돌렸다. 그에 대한 회답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부학파 문법학자 크리스코니우스에 반대함」이라는 네 개의 글을 썼으며, 이 글은 그 중에서 발췌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크레스코니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야말로 억지논리에 불과한 변증법에 몰두해있다고 몰아세웠다. 그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변증법의 중요성을 논하고, 예수와 사도 바울의 예를 따라서 기독교 교사들은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드을 설득하기 위해 반드시 변증법을 사용해야 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A.D. 405-406년 아우구스티누스가 주교로 임명된 지 10년만에 썼던 것이다.
74)당신은 스토아학파들 사이에서 변증법이 얼마나 성행했던지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교양학과에 대해 그토록 무지하면서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점을 기쁘게 생각했던 에피큐러스학파들까지도, 사람들이 남에게 속아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논쟁의 원리들을 반드시 동원해야 된다고 하면서, 자신들은 그것을 가지고 있고 또한 가르치고 있다고 자랑해 왔습니다. 변증법은 바로 논쟁의 기법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변증법이 마치 기독교의 진리에 위배되는 것처럼 말하면서 나를 몰아세우는 것 같이 보이므로, 나는 당신에게 그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 때문에, 당신을 가르친 선생님들은 논쟁을 통해서 나를 반박하고 승복시키는 대신, 피하고 멀리해야 할 변증론자로서만 나를 경계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신도 그들처럼 그렇게 하도록 설득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이 심지어 글로 써서까지, 우리와 논쟁하는 데 매우 열심이었으니까요.
이제, 당신은 나더러 변증법을 사용한다고 비난을 시작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속일 수 있고 나와의 논쟁을 꺼리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출 수 있기를 바라는 모양입니다만, 그렇게 글까지 써서 나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당신은 정말 변증법을 쓰지 않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은 분명히, 논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으면서, 논쟁속에 끌려들어가고 있는 위험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혹시, 그것을 알고 있다면, 왜 나의 면전에 변증법에 대한 비난을 퍼붓는 것입니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몰라서 그것 때문에 논쟁에서 패하게 될지 검토해보지도 못할 만큼 성질이 급한 것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주제를 당신 스스로 공격할 만큼 배은망덕하다는 것입니까?
당신이 써보낸 글을 검토해보니, 매우 잘 정리가 되고 산뜻한 스타일로 문제를 분석해들어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당신은 웅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곳에서는 매우 섬세하고 예리하게, 즉 변증법적(논리적)인 방법으로 파고 들어 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웅변과 변증법을 나쁜 것이라고 탓합니다. 그것들이 그토록 해로운 것이라면, 당신은 왜 그것에 빠져 있습니까? 해로운 것이 아니라면, 왜 비난을 합니까? 변증법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따지지는 맙시다. 문제 자체가 이해된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거기에 너무 매달릴 것은 없습니다. 말을 하는 사람이 풍부하고 우아한 스타일로 할 뿐 아니라 진리를 말하고 있어야만 웅변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과, 섬세하고도 진리인 것을 말하고 있어야만 그 사람을 “변증론자”라고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웅변적이지도 변증법적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말하는 스타일에 생기가 없고 무질서하기 때문도 아니고, 논리적인 힘이나 재미가 없기 때문도 아니며, 단지 당신은 거짓된 것을 옹호하느라고 당신의 그 웅변력과 기술을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진리를 말하는 데서만이 아니라, 사악한 것을 열렬히 주장하고 논리를 내세우는 데서도 “웅변”이나 “변증법”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웅변적으로 헛된 감상을 조장하고 거짓인 것을 교묘하게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웅변적이고 변증법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에 대해서는 이만 해둡시다.
스토아학파는 그야말로 가장 뛰어난 변증론자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그들이 논쟁에 끼어들어오지 못하도록 조심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주교가 우리를 변증론자들이라고 하면서 우리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 점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만일 변증론자였고, 스토아학파처럼 논쟁의 기술로서만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지 못했던 진리를 가지고서, 실제로 그들과 맞서서 논쟁을 하였다고 한다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할 것입니까? 사도가 변증법을 썼으니, 당신은 그것을 죄악이라고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어렵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 비난을 나에게 돌리고 있다고 해서, 나는 당신이 무경험 때문에 그렇게 헤매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교묘하게 나를 속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dialectic”(변증법)은, 말의 용법 그대로를 이야기하자면, 라틴어에서는 disputatoria라고 했던, 그리스어입니다. 두 나라의 가장 학식높은 사람들이 문법을 라틴어로 literatura(문학)이라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문법이 “문자”(letter)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이듯이, 변증법은 “논쟁”(disputatio)에서 온 말로서, 그리스어로는 “대화”(dialogue)라고 했습니다. 문법교사(grammticus)는 라틴어에서 “문자교사”(litterator)로 알려졌던 것처럼, 그리스어에서 “변증론자”(dialectician)라고 알려진 것은 라틴어로는 “논쟁자”(disputator)로 더 널리, 적절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사도 바울을 변증론자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반대하겠지만, “논쟁자”라고 부르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라틴어 이름으로는 인정하는 것을 그리스어로는 공격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반면에, 당신이 바울을 “논쟁자”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를 거부한다면, 그토록 끊임없이 토론하고 기술적으로 논쟁했던 것이 바울이었던 바에, 당신은 그리스어도 라틴어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당신은 그리스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리스어로,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라틴어로,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쉽겠지요. 진리를 선언하고 거짓을 물리치는 사도의 설교를 그렇게 많이 듣고 읽어온 당신이 사도가 논쟁에 몰두했었다는 것을, 더구나, 그러지 않았다면 그가 이루어놓았던 그 많은 일들을 하나도 해낼 수가 없었는데도, 당신이 부정하고 나서는 것은 도대체 얼마나 큰 무식의 증거인지? 아니면, 사람들을 오도하려고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지?...
75)논쟁에 가담하는 사람은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지도 못하면서 변증론자로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남에게 잘 속아넘어가는 사람들에게 함정에 빠뜨리는 질문을 해서 교활하게 그들을 속입니다. 그들은 그 사람들을 누가 봐도 분명한 그런 오류에 꼼짝없이 갇히도록 유도해서 결국 그들을 조롱꺼리가 되게 하는 그런 결론으로 이끌어갑니다. 혹은, 이들 “변증론자”들은, 논쟁 상대를 속여서, 자기들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그런 숨어 있는 거짓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게 만듭니다. 논쟁에 진지하게 몰입된 사람, 즉 거짓들로부터 진리를 추려내는 일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은 우선, 자신이 속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 자기자신과 먼저 논쟁을 벌입니다. 이것은 신의 도움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 그러한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살려서, 우선 그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확인을 해보고 나서,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 혹은 믿고 싶어 하지 않는 것으로 그들을 이끌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는 그것이, 지식으로든지 아니면 신념으로든지 간에, 그들이 원래 받아들여 왔던 것에서부터 나온 결론이었음을 그들에게 확인시켜 줍니다. 그 결과는, 사람들이 모두 합의하는 그런 진리를 통해서, 전에는 거부해왔던 다른 진리들을 인정하도록 그들을 유도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전에는 거짓으로 생각되었던 진리가 이미 자신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왔던 진리와 부합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76)어떤 사람이 자신의 대답 때문에 논쟁에서 졌을 때, 그 대답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었다면, 그 사람은 그 질문자를 탓할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대답을 잘한 경우, 그것은 그 질문자에게가 아니라 자기자신에게 대답을 잘한 것입니다. 주님이 유태인들과 논쟁하고 있던 중에 그들이 스스로의 대답에 갇혀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것을 그들이 당신들 기부학자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거나 당신들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주님을 모욕했던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마리아 사람”보다 좀 특이하게, “변증론자”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로써 주님을 모욕하겠다는 저의를 가지고 주님에게, 씨이저를 경배하는 것이 합법인지 아닌지를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어떻게 스스로 왜곡되고 혼돈이 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은 주님이 막상 어떤 대답을 하게 되어도,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주님이 그것을 합법적이라고 대답하시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비난하였을 것이고, 불법이라고 하셨다면 씨이저의 적으로 몰아서 벌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동전을 한 개 보여달라고 하면서 그것이 누구의 상을 새긴 것이냐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강요되어 왔던 정답대로, “씨이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에게, “씨이저의 것은 씨이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려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유도해 나갔습니다. 자,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질문의 그물로 주님을 함정에 빠뜨려서 속이고 이겨 넘으려고 했던 그들이 변증론자입니까, 아니면, 그들의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서 다시 반문함으로써 진정한 정답을 그들 스스로 말하도록 이끌어내신 주님이 변증론자입니까? 그들의 질문에 주님이 꼼짝없이 갇혀서 위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들 스스로가 무엇이 진리인지를 말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변증론이었습니다.
당신은 교활하고 악의적인 질문으로 주님을 덫에 가두려고 했던 그 유태인들이 변증론자였다고 하겠습니까? 주님은 왜 대답을 했겠습니까? 당신들은 우리더러 변증론자라고 합니다. 주님은 왜 그들이 완전히 승복하고 진리를 선언하도록 유도하였습니까? 왜 그들에게, “위선자들아, 왜 나를 유혹하려 하느냐?”(마태복음 22 : 18)라고 하시면서도, “이 변증론자들아”라고 하는 말은 하지 않았겠습니까? 왜 동전을 요구하여, 그 사기꾼들의 입에서부터 진리가 튀어나오도록 했습니까? 왜 차라리, “물러가라. 그 따위 억지 질문으로 나와 더불어 변증론을 해보겠다는 사람들과는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그런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괴롭히는 질문을 하고, 말꼬리를 잡아 비트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주님은 그 대신, 예리한 질문과 난공불락의 논리를 가지고, 진리의 적들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 진리를 증명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임을 항상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사악한 변증론자라고 생각되거든, 당신들도 우리에게 주님처럼 대하십시오. 혹시, 우리가 당신들에게 변증법을 사용할까봐 겁에 질려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변증론자라고 말할 수 있겠으면, 변증법을 쓴다고 나를 죄인 취급했던 태도를 이제 버리고, 변증법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건대, 당신은 아마 그것을 피하기 위해 그 유태인이나 주님이, 양쪽 다 변증법을 쓴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지 않을까요? 교묘하고 기만적인 방법으로 상대방을 속이고 혼란시켜서 자기들이 내어준 그릇된 대답을 진리로 받아들여 믿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의 방법이 변증법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진짜 변증법인지, 말해 보십시오.
변증법에 무슨 악이 들어 있고 그것이 무슨 해를 가져오며, 왜 그것을 피해야 하는지, 그것을 말해 주십시오. 당신은 무지한 사람들에게 변증법을 경멸하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데,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그 이름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진리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술적이고 정직한 질문을 던져서, 그들의 대답으로부터 그들을 진리에로 이끌어가는 그런 일이 변증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유태인들 앞에서 변증법을 사용하였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교묘한 방법으로 상대방을 오도하는 질문을 해서 그를 속이려는 사람들도 역시, 유태인들이 예수에게 했던 질문이 바로 그런 질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까봐, 변증법을 사용했던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들 곁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즉, 예수는 말로써 그들을 이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이 그토록 박학다식하고 현명하다고 믿어 마지 않는 당신의 주교들이 반박의 여지 없는 절대적 진리를 가르치고자 하면서도 변증론자들과의 토론에는 임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지금 변증론자라는 개념에 매우 큰 당혹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술적 논쟁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그랬다가는 지금까지 당신이 비난해 왔던 것을 찬양하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그렇다고, 기만적인 말장난꾼쯤으로 생각했다가는, “예수께서도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그렇게 논쟁을 하였으니, 기독교인들은 모름지기 그렇게 해야 한다”라는 말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 크레스코니우스는, 그런 딜레마를 벗어나고 싶으면, 우리들을 차라리 당신들 기부학자들이 더불어 대화하고 싶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솔직하게 정의내리시지 그러십니까? 변증법을 한다고 우리들을 비난하면서, 자기들의 주교는 그런 우리들과는 토론하기 싫어한다고 주장하는 당신으로서 그러는 것밖에 별 도리가 없지 않는가 말입니다...
77)변증법이라고 하는 이 기술은, 진리 명제로부터 진리인 결론을 내리게 되거나 허위명제로부터 논리적으로 따라나오는 결론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으로서, 결코 기독교 교사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스토아학파들이 논쟁을 걸어왔을 때에도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17 : 16-31). 변증법은 진리를 주장하되, 누구든지 자기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절대로 허위의 결론으로 몰리게 되지 않도록,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그 사람이 원하든 않든 간에, 자기 스스로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기가 한 말에서부터 자기가 원하지 않는 그릇된 결론이 도출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자기가 가진 전체가 그릇된 것이 아닌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올바른 전제를 확보하고 있어야, 거기에서 도출되는 결론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지금까지의 신념과 의문에 모순이 되는 한이 있어도, 그것을 배우고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헛된 공명심보다도 논리정연한 진리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78)크레스코니우스, 당신의 편지 전체에서 당신은 내가 쓴 편지 내용의 어떤 오류도 증명해내지 못했다는 것을 간단하게 설명해보일 테니, 들어 보십시오. 그렇기는 하지만, 당신은 분명히 나에게 한가지 가르쳐 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명사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기부주의자”라고 하지 말고, “기부학자”라고 하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내가 “기부주의자”라고 쓴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지,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나타내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구태여 바꾸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 유명한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도, 우리 같은 저술가들이 사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에 대해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키네스(Aeschines)가 그의 표현 중에서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을 때, 그는 그리스인의 운명은 그 사람이 이 말을 쓰느냐 저 말을 쓰느냐, 혹은 그의 팔을 이쪽으로 뻗느냐 저쪽으로 뻗느냐 하는 것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어떤 표현을 하든지, 그 말하는 내용의 애매하지 않게 이해될 수 있는 한, 언어의 파생적인 규칙을 가지고 그렇게 왈가왈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주된 관심은 언어적인 장식이 아니라, 진리의 증명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관한 한, 그것이 우리의 본래 문제에 아무 상관이 없으므로, 나는 당신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내가 당신과의 토론에 임할 때만은 반드시, “기부학자”들이라고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에는 관례대로 하겠습니다. 관례는 바로 언어의 형식을 이끄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당신이 그토록 열렬한 웅변을 보내주었지만, 나는 아직도 명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아마도 당신의 동료들에게, 나와 같이 아직 문법적인 지식이 모자란 듯이 보이는 사람이라면, 변증론자라고 해서 하나도 무서워 할 것이 없다는 확인을 시켜주어도 될 것입니다. 당신이 “변증법”이라고 하든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어쨌든 논쟁을 위한 학문은, 사물의 본질에 관해서 우리가 합의를 하고 있는 한, 어떤 언어로 어떻게 그것을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학문을 “변증법”이라고 해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조차, 사실 나의 걱정거리가 못됩니다.
그렇지만, 나는 논쟁에 있어서의 기술과 능력을 어떻게 기를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기 위해서 말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가는, 매우 위험한 실수를 범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부주의자”로 부르느냐, “기부학자”로 부르느냐 하는 것이 지식이 많고 더 많이 배웠다는 표시가 되는지 어떤지에 대해 나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구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 단어가 교회 밖에서의 헌신기도를 처음으로 제도화했던 도나투스(Donatus)에서 따올 것인지, 아니면, 캐씰리언(Caecilian)에 반대한 분파의 운동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해서 당신의 종파에서 첫 번째 주교가 되었던 마르조리누스(Marjorinus)에서 따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나는 관심을 쓰지 않겠습니다.79* ) 다만, 당신들이 이단자들이라는 것을 증명해보이고, 따라서, 당신들이 다른 사람들을 속이지 못하도록 세세한 관심을 쓰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맡은 공적인 위치에 주어진 중대한 임무를 소홀히한다는 무거운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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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기부학파 크레스코니우스에 반대함」, ⅰ, 16-47.
75) 「기부학자 크레스코니우스에 반대함」, ⅰ, 19.
76) 「기부학자 크레스코니우스에 반대함」, ⅰ, 21-23.
77) 「기부학자 크레스코니우스에 반대함」, ⅰ, 25.
78) 기부학자 크레스코니우스에 반대함」, ⅱ, 2-3.
79)* AD 311년 경, 카르타고에서 있었던 일로서, 캐씰리언을 주교로 선출하기 위한 선거에 너무 늦게 도착했던 누미디아의 몇몇 주교들이 캐씰리언을 선출한 것을 무시해버리고, 그 경쟁자였던 마르조리누스를 다시 뽑게 됨으로써, 교회가 두 파로 나뉘게 되었다. 마르조리누스를 지지한 사람들 중에 도나투스라는 주교가 있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부주의 운동의 진짜 설립자는 따로 있었고, 그 사람은 마르조리누스의 뒤를 이어 카르타고의 주교를 맡았던 것이라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