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그 때 그 시절 2

해선녀 2009. 9. 21. 08:32

 

어제 문병왔던 저 세 사람...영준이와 그 부산고 일년 후배 차균이,  그리고 학주...과에서는 저 사람들이 아주 든든한 버팀목이었지.....아, 그랬군요.....지치지도않는지, 나뭇꾼의 이야기는 계속되엇고 음악은 이제 3악장으로 들어서고 잇었다.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가히 황제라고 할 만큼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 곡이라는 뜻으로 출판사에서 그렇게 이름붙여 주게 되엇다는 황제.....그러나, 실내의 소음 때문인지, 너무낡은 오디오때문인지, 사실상, 음악 자체는 우리들에게 그다지 감동을 주고 잇지 못하엿다. 

 

 예전의 DJ실은 지금 카운터로 바뀌었고 그 뒤로 LP판들이 그 때의 기억이라도 하라는 듯이 일부 꽂혀 잇고 그 때 그 스피커엿던가? 낡고 커다란 스피커통이 달려 있는 벽체는 너무 오래 커피향에 젖어서인지 내 어두운 눈에는 더욱 어둡게 보인다. 이제 곧 이 건물이 헐리고 다시 짓는다던가? 그래도,  지금 이 곳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 클래식 음악과 옛추억을 고집하며 계속 드나들 것일까?  

 

그 때 그 '영준씨'는 과대표였으니, 우리는 그 때 선후배할 것 없이 학생들끼리는 꼬박꼬박 그렇게 서로 공댓말을 햇다...지금은 서로 반말도 많이 하게되었지만.,  대의원회를 중심으로 시위를 이끌고 잇다는 걸 나도 알고 잇었지만, 맨날 연극패들과 어울려 다니고 미우회에서 그림이나 그리면서도 늘 조용하고 말이 없던 저 학주까지도 종종 학교앞 다방에서 나뭇꾼과 시위를 위한 모의를 하고 잇는 모습을 몇 번 목격하고 나는 은근히 놀라고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었다. ...알고 보니,맨날 친구들이 들락거리고 자고 가기도 하는 줄만 알앗던 그의  면목동 자취방이, 아, 그 때 처음 나오기 시작했던 그의 그 포터블 레코드 플레이어가 저 클래식 음악과 가곡들을 들려 주곤 햇지... 그 시위의 모의장이기도 햇던 것이다.  

 

그랫다. 우리 과에 여학생이 나 하나뿐이라고 대접만 받을 줄 알앗지, 나는 별로도움이 안되는 아이였다 .날이면 날마다 데모하다시피 하는 남학생들과 밤낮 보조를 맞출 수는 없엇지만, 그래도,  여학생회를 들락거리면서 좀더 활발하게 그들을 도와 주었어야 하는데 혼자서만 벨벨, 비몽사몽, 무얼 하고 지냇단 말인가? 뒤늦게 여학생회에 들락거리면서 나도 좀 도움이 되고자 애는 썼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민첩하기조 기민하지도 않은 내가 그래 봤자, 얼마나 도움이 겟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권총을 여럿 차서 결국 한 학기 늦게 졸업하게 되엇다. 그것은  데모 때문은 전혀 아니고...순전히 저 게으름과 방황 때문이엇지만...  

 

그제는 점심 후에 또  학림에 갓다가  길건너편을 바라 보며 옛날엔 저기에 무엇이 잇엇는가고 묻는 나뭇꾼의 제자에게 그 땐 저런 상가들이  하나도 없엇고 개천 따라 학교 건물만 주욱 잇엇지...마로니에 나무가 공원처럼 서 잇는 그  교정 바깥으로 우리가 미라보 다리라 부르던 다리들이 몇 개 걸쳐 있엇고...봄이면 개나리꽃이 군데군데 만발한 그 길을 따라 종로5가에서 전차를 내려 걸어 들어 오곤 햇지..전차표 한 권이면 부자엿던 그 시절...아, 전차도 잇엇어요? 그럼요...그 전찻길을 남겨 두엇더면 더 좋앗을 걸.....그런 이야기를 하니 비로소 왜 이 거리가 대학로인지 실감이 간다고 한다. 아무튼, 이렇게라도 남아 잇다는 것만으로 고마운 일이지...

 

한 제자는 그 때 잇엇던 그 창문 중에 구석자리에 딱 하나 남은 나무창문 앞에까지 가서 만져 보며 감탄사까지 발하며 대리향수에 젖는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보면 거기서도 차를 마실 수 잇는 모양인데,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그 곳에 대해서는 물어 보지도 못하고 학림을 나왓다. . 다음엔, 저기도 올라가 보아야지...영영 없어지기 전에...여기는 가끔만 오던 내가 이런데, 이 곳을 들방구리 쥐드나들듯 하던 사람들은 왜 안그렇겟눈가?.. 

 

 그 젊은 제자들은 , 캠퍼스가 관악으로 모두어진 후의 학교후문 밖에 있던  '겨울 나그네'라는 음악다방도 알 리가 없엇다. . .대학의 통합적인 발전을 위해서라기보다  저 산지사방 흩어진 캠퍼스들에서 시도 때도 없이 게릴라처럼 일어나는 시위가 다른 대학의 시위와 합해져서 서울시내 전역이 데모화되는 것을 막기 위에  관악 계곡에 성냥곽처럼 파네 박힌 건물들을 한꺼번에 지어 캠퍼스들을 자루에 쏟아 붓듯 몰아 놓고 옴죽달쑥도 못하게 그 주둥이에  관악 경찰서를 지어 시위진압의 효과를 극대화햇던 그 때, 그래도 좀 숨이라도 쉴 것 같앗던 후문밖찻집.....지금은 그마저 음식점으로 바뀌었지만, 그 때 그 쓸쓸한 숲가의 목조 이층집엔 학생과 교수들을 위한 세미나실도 두어 개 잇엇고, 우리는 특히, 바이얼린을 공부하는 큰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무수히 많은 그 클래식 음반들이 잇는 너른 방을 직접 들락거리며 음악을 골라 듣기도 하였다....

 

길을 건너 방통대에서 근무하는 제자를 따라 방통대로 들어서니 일제시대의  옛건물도 남아 잇고 군데 군데 아름드리 나무들이 어깨를 기울이며 옛이야기를 들려 주려 하지만 너무 빼곡하게 들어선 새 건물들이 도무지 낯설다. 여기를 그대로 보존하고 캠퍼스를 넓혀 가면서 이 일대를 진짜 대학촌으로 발전시켜 나갓어야 하는데...하긴, 이 오랜 세월 지나 이젠 더 이상 캠퍼스가 민주화 시위로 들끓지 않는 시절이 되고 보니 이 복닥거리는 시내 한복판보다는 지금의 저 더 크고 넓은 자연 속의 캠퍼스가 더 통합적이고 자유로운 상아탑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잇게 된 것이라고도 해야겟네....그래도, 그래도, 그 때 그 시절이 추억이 더 아름다운 것을 저들은 알까.... 

 

 현재만 알 뿐, 과거는 모르고 잇는 것이 어디 한둘인가,그 반대도...아니, 나는 이제,  과거적인 노인의계절이 틀림없지....그러면 어떠랴, 언제는 내가 이 시속 수백키로로 달려가는 시류를 따라잡을 생각을 한 적이 잇었던가? 나는 늘 뒷북이나 치고 그도 못치고...그렇게 살아 왓다...그게 나다. 나는 이제 그 본색을 그대로 외양으로 나타내며 살게 된 것뿐이다.  너무 가리기도 귀찮고 너무 까발리기도 귀찮은 것이다. 젊어 보인다는 소리도 너무 늙어 보인다는 소리도, 추하게 늙엇다는 소리도 곱게 늙엇다는 소리도,  다 내 본색을 바꿀 일이 없다...당신의 눈이 보여 주는대로 나를 보라...나 또한 그렇듯이...그저 흔들리지 말고 우리는 서로 잇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마음 편하게 흘러 갈 일이다...

 

어제 저녁엔 그 대학로 뒷길 어느 갈비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며늘아기의 티셔츠에 씌어 잇는 Enjoy the Present라는 문구에 눈이 갓다. 그래, Enjoy the Past also...라고 속으로 읊조리다가, 그래, 과거든 미래든, 그저, 그 때 그 순간, 내가 원하고 궁금하고 재미있으면 해볼 일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곧 타협햇다...ㅎ 지금은 그저.., 내가 가지고 잇는 많은 LP판 레코드들을 언젠가 펼쳐 놓고 제대로 들어 볼 여유를 좀 가지게 될 날이 오면 좋겟다. 나뭈꾼의 건강이 조금만 더 회복되면... 

 

그 때 이야기로 돌아 가자.  나는 그 때, 내 전공인 교육학에서도 갈 길을 못찾고, 그렇다고, 부전공인 영어과에도 제대로 발을 들여 놓지도 못한 채 , 경계인처럼 지냈다. 아니, 사실은,밤늦도록 내가 앉아 잇던 진원중 교수님방에서 나는 교육학보다 영문학 책을 탐독하엿는데, 자연스럽게, 밤늦게까지 항상 같은 층의 연구실을 지키시던  장왕록 교수님의 번역 일을 돕기도 하고 영어과 아이들의 회화 동아리에서 본의 아니게 회장도 맡고 하엿으니, 그 땐, 영어과 아이들은 책은 줄줄 읽어도 회화 한 마디 못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엇다, 장왕록 교수님이 차라리 영어과로 전과하는 것이 어떻겟느냐는 제의도 하셨다.

 

매우 고마웟지만, 그 분은 어쩌면 내가 그걸 원한다고 생각하셧는지도 모른다...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나는 우리과에서 홍일점, 하고도 명색이 수석으로 들어 온 아이가 아닌가? 내가 전과를 하면, 같은 캠퍼스 내에서 오가며 우리과 사람들을 어떻게 보겟는가, 부전공은 부전공일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욱하고도 유치한 자존심이기도 햇지만 그 때의 나로서는 진지한 고민이 되기도 햇다. . 홍일점이야, 또 누군가가 편입해 들어 올 수도 잇겟지만, 그래도 사대에서는 한참 학문발전의 깃발을 올리고 잇다는 자부심에 가득 찬  학과를 버리고 그까짓, 꼭 영문학자가 되겟다는 자신도 없으면서 인기만 따라 과를 옮긴단 말인가? 영어야, 어느 과를 공부하더라도 기본일 뿐이다...

 

 교육학에서의 길을 아직 찾지도 못햇으면서도  그런 막연한 감만따라 그대로 남은 것은 순전히 자존심의 문제였다.  지금 와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 수석 운운까지 하는 것이 좀 우습지만, 나는 특히 그 점이 더 마음에 걸렷다.  진원중 선생님은 바로 그 사실 하나로 나를 찍어서 그 방에 데려다 놓으시고는 드나드는 사람들마다에게 이 학생은...하고 그 태그를 꼭 붙이셧을 뿐 아니라 정말로 나를 아끼시는 분이셧는데, 내가 그 분을 저바리고 같은 층의 다른 과 교수방을 드나들더니 급기야 그리고 가버리는 배신을 내가 감히 어덯게 한단 말인가.....

 

그러나, 다행히  4하년이 되엇을 무렵부터 교육학에서의 내가 갈 길의 감이 잡히기 시작햇다.. 내가 그 길을 지금까지 제대로 걸어 오지 못햇다는 건 별도로 하고... 그 동안 나에게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는 건 고사하고 인간행동에 대한 과학적 접근에 대해 늘 회의만 들게 하엿던 온갖 심리학과 사회학, 통계학들로부터 벗어나 좀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잇게 하는 학문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랫다. 나는 아무래도, 어느 쪽인가 묻는다면,  과학보다는 철학쪽 '무끼'엿다.. . 당시, 교육의 과학화 제일 선두에서 그 사단을 이끌어 가시던 정범모 교수님이 처음으로 강의하신 과학철학에서 시작해서, 문리대의 이상철 교수님의 비트겐슈타인 철학이 나에게 그 방향을 보여 주엇고, 그 때부터는 교육학이고 영문학이고 집어 치우고 시알도 잘 먹히지 않을 것 같은 독일어 원본을 놓고 밤새 씨름해 가며 무모하게도 비트겐시타인 철학을 졸업논문으로 섰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 콜럼비아 대학에서 막 공부를 마치고 오신 잉홍우 선생님의 출현으로 아, 이거구나, 그 때까지  졸리기만 하엿던 사상사를 줄줄이 꿰는 교육철학을 넘어선 교육철학의 새로운 길이 확실히 보이기 시작햇다.  나뭇꾼이나 나나, 한 학기씩 늦추어 졸업하게된 72년 여름이엇다..  바로 우리가 원하던, 아무리 '명강의'라고 해도, 일방적인 교수의 강의만 듣고 앉앗다가 마지막에 질문이나 한 두 개 하면 그 대답이나 듣고 마는 그런 강의가 아닌 강의, 철학의 근원적인 문제에서부터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함께 질문하고 토론하며 탐구하는, 그야말로 Philosophizing, ''철학을 하는' 수업이엇던 것이다. 우리는시간마다 눈을 빛내며 함께 토론에 집중하엿다.

 

나뭇꾼과의 결혼도 바로 그 길에서 앞뒤 아무 조건도 따지지 않고 작정한 후 두 달만에 결행한 일이엇다. 오로지, 그 때, 다른 학생들이 다 졸업하고 떠난 스산한 캠퍼스에서, 한 사람은 데모로 다른 한 사람은 게으름과 방황으로,  졸업이 한 학기 늦어져서 남은  두 사람이 늦은 학구열에 불타서 매일  선생님이 이끄는 대학원생들의 세미나 팀에서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재미에 빠지기 시작햇을 무렵,  어느 날 몇 사람들이 함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선생님이 불쑥 우리 두 사람을 바라 보며, 어이, 두 사람, 결혼하지? 이러셧던 말 한 마디에 무슨 계시처럼 감전되어서...ㅎ

 

 주변의 강요가 심하다 보니, 나는 장난삼아서라도 몇 번의 선을 본 끝에 거의 누구와든 간에 결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기 시작햇을 때엿는데,  꿈에도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은 이 말 한 마디에 다른 사람들은 와하 웃엇지만, 나는 아, 이거구나, 공부를 하려면 공부하는 사람과 결혼해야지 스스로 정답을 찾앗던 것이다. ..그 때까지 손 한 번 잡아 본 적이 없었고 다만 같은 과의 맏형이어서 나를 공주처럼 잘 대해 주엇던, .선보고 다니던 그 사람들에 비해 소위, 결혼조건으로는 한 가지도 갖춰지지 않았지만, 오로지, 여자가 공부하려면 남편이 그걸 이해해 주는 사람이어야 하고, 진실로 이해해 줄 수 잇는 사람은 똑같이 공부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라는 판단 하나로.., 이 단순논리 하나로 난느 그와 결혼햇던 것이다. .그 때 그 학장님의 주례로...오오, 저 천재적인 영감과 지성과 감성까지, 그 선생님의 모든 것이 우리를 매료하엿던 저 이홍우선생님의 한 마디 말씀이 우리들의 운명을 결정할 줄이야.....선생님은 아마, 그런 일을 기억도 못하실 것이리라... 

 

물론, 모든 것은 내가 찾은 결론이엇지만, 내가 그 정답을 찾게 도와 준 사람이 또 한 사람 잇엇다. 그는 내가 맞선을 본 사람 중에서 두 번 만난 유일한 사람이엇는데, 그 때 청와대 경제비서실에서 잘 나가고 계시던  형부의 후배로, 나는 그 아자씨가 일곱살이나 위라는 것도 무조건 싫었지만, 형부도 언니보다 일곱살 위다...만난 첫날에, 포크와 나이프를 너무 열심히 움직이며 식사를 하면서 말을 너무 많이 한다든지, 아무 거나 보지, 뭐, 피며 데리고 들어간 피카디리 극장의 그 알 수 없는 스릴러물 영화라든지, 데이트를 무슨 익제큐티브의 업무수행하듯 하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도무지, 게으르고 한가하게 이야길르 나누고 싶은 내 취향이 아니엇다...오죽햇으면, 심지어, 그 날 그 레스토랑에서 처음 들엇던 관타나 메라...그 때는 그 의미를 몰랏던 그 순박한 시골처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노래까지도 그 후로 내내 듣기 싫엇다...ㅎ   

 

다만, 한 가지, 종종 떠오르는 낭만적인 기억이 있다. 만난 지 두 번만에 그는 닷짜곳짜, 나를 수유리의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오버 헤드 프로잭트로 세계여행의 슬라이드들을  보여 주엇는데, 나는 그의 자랑스러운 증명사진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방에 들어가 잇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 거북하엿지만, 조신한 한복차림으로 찻상을 들고 들어 오셧던,  풍문여고 나오셧다는 그 교양잇어 보이던 그의 어머니의 모습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엇다. .그 어머니는 , 내가 벌써 그 집 며느리로 오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보엿는지, 학생은 공부만 하면 돼요...유학도 보내 줄 거예요...살림은 내가 다 ㅏ할 테니...이러셧다. 아니, 시어머니는 밥하고 빨래하고 며느리는 가방 들고 학교 다니고? 거기다 유학까지? 오오..

 

그건 내가 생각해 온 고부간의 관계와는 너무 멀었다. 가지가지 예쁜 장미꽃이 지천으로 피어 잇던 그 햇살 가득한 너른 마당집을 말없이 인사만 꼬박하고 나온 .나는 그 다음 일요일, 낚시를 함께 가자는 그의 전화를 거절하고 말앗다. 핑계엿지만, 진원중 선생님 방에서 그 때 막 출판 준비 중이던 교육사회학 책 교정을 보러 학교를 가야 한다는 나의 말에, 그는 ..'교육하고 사회하고 무슨 상관이 잇다고 일요일에도 학교를 갑니까?''하엿고, 나는 마지막 입을 닫아 버린 것이엇다. .그는 상대를 나와서 세계시장을 무대로 뛰며 막 출세길로 접어 들고 잇었지만 그 바람에 장가를 못가서 저리 어머니를 노심초사하게 만들고 잇었던 것이다. 그래, 사회는 경제하고만 상관잇단 말이지?  ㅎㅎ  형부와 언니는 공부박에 모르는 처제를 칭찬 반 나무람 반으로 어찌 어찌 달래 보려 햇지만 별무소용...나는 이 쪽 정답으로 달려 갓던 것이다. 오오...실낙원이여...ㅎㅎ

 

그 사람과 결혼햇다면, 나는 그 후 내내 잘 벌고 잘 놀고 착한 사람이지만 도대체 '대화가 안통하는 답답한 남편''이라며 내 친구 누구못지 않게 불만하면서 더 방황하엿을까? ..아니면, 이 나이쯤이 되어서는, 나도 그런 남편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지를 깨닫게 되엇을까?  그 참한 시어머니 밑에서 고분고분, 지금보다는 더 양전한 며느리가 되어...아니, 이젠 시어머니가 되어 곱게 곱게 살고 잇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지 않은 길을 내가 갓더라면 내가 어찌 갓을지...아니,  어찌 갓어도,또 역시, ' 나는 나', 지금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지나놓고 보면, 너무나 작은 꼬투리 하나로 사람의 전체를 평가하고 평가받는 일 투성이인 것이 인생인 것 같다. 아무리 오래 사귀어도 그런 일 때문에 순간순간 서로 깊이 마음 다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마는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의 안마당의 무성한 꼬투리들도 제대로 들여다 볼 겨를도 없이 닥치는대로  신호로 받아들이며 일희일비 정신없이 운전을 해나가고 잇지 않은지....음주운전자처럼...ㅎ 꼬투리들로만  만나서는 결국 어그러지기 십상이고..꼬투리들만 많이 볼수록 어지러워지기도 하는 것을...며칠 전, 순례자님 방에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그러다가 마지막엔 나  자신과도 헤어지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그 땐 나도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처럼 가고 싶다고 댓글을 썼을 때 술례자님은 동감하시면서, 그런데, 정말로 내가 나를 만나기나 햇는지, 그걸 모르겟다고 하시더니......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