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Augustine의 교육론(번역)

제 6 장 교사의 과업 - 1 기독교 교사교육의 성격

해선녀 2009. 4. 21. 03:15

 

 

제 6장 교사의 과업 

 

 

 

이 장에 발췌된 글들은 세속사회에서 기독교 교사가 해야 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 관한 지식을 탐구하고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려면, 기독교 교사는 무엇보다도, 신과 동료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그는 신을 사랑하는 만큼 진리를 사랑하고, 또한 진리를 사랑하는 그 만큼 선한 사람이다.

 

知的인 理解는 절대적으로 善하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이 가르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보나마나, 학생들의 교육을 그르치게 할 뿐이다. 그 사람은 학생들을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서, 실재를 왜곡하는 빗나간 길로 인도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사가 해야 할 실질적인 일은 성서를 해석하는 일이며, 그것은 기독교 교육과정의 핵심이 되는 일이다.

 

「기독교 교육론」(De Doctrina Christiana)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가지 신호들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기본 원칙을 세움으로써, 언어와 상징을 구별하는 중요한 단서를 마련하였다. 언어는 오직 실재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관련성이 있지 않다. 다양한 지식들에 대해서도, 그것들이 실제로 목적과 수단의 어느 것에 속하는가를 구별해야 한다. 즉, 지식에는 그 자체를 넘어서는 다른 어떤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의 지식과,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목적으로서의 지식이 있다. 후자의 지식들에 있어서, 지식의 최종 목적은 결국 神이다. 기독교 교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학생으로 하여금 이러한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잘 구별하도록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神性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이다.

 

교사는 성서의 의미를 설명해 주기 위해, 온갖 출처로부터의 다양한 정보들을 접하는 가운데 의미 깊은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위한 전통적인 자유교양학과와 고전학문의 최고수준에 이르는 폭넓은 교육과정을 마련하고 있다. 예컨대, 수사학이나 변증법은 진리를 위해서나 거짓을 위해서, 다같이 사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사의 손에는, 不可知論者들의 교묘한 논쟁에 맞서는 진리를 세우기 위해, 항상 그러한 학문들을 필요불가결의 무기로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보조도구를 갖추지 못한 기독교 교사는 자기가 수호해야 할 진리의 적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끊임없는 전쟁의 어느 과정에선가 매우 불리한 지경에 이를 것이 뻔하다.

 

 

 

 기독교 교사교육의 성격

 

 

38)에보디우스 : 나는 죄를 짓는 일이 우리가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인지, 그걸 잘 모르겠네. 죄도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우리에게 악을 행하도록 가르쳐 주는 사람은 누구인지 알고 싶네.

 

          아우구스티누스 : 교육은 선한 것이라는 견해를 자네는 믿는가

         에보 : 교육이 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아우 : 혹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까?

 

        : 나는 선이라고만 생각하네.

 

아우 : 자네의 말은, 지식은 교육에 의해서 전달되고 촉발되는 것이며, 교육 이외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맞는 말이네. 자네 생각은 혹시, 다른가?

 

          에보 : 나는 오로지 선한 것만이 교육을 통해 학습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아우 : 그렇지만, 교육(disciplina)이라는 말은 “학습하다”(discere)에서 나온 말이므로, 악도 역시 학습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39)**

 

에보 : 그렇게 학습될 수 없는 것이라면, 하기야, 사람이 범죄를 어떻게 저지를 수 있겠는가?

 

아우 : 그건, 그 사람이 교육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자신을 차단시켜서, 즉, 학습으로부터 단절되어서 그렇게 되는 것 아닐까. 아무튼 그런 설명이 옳든 그르든 간에, 교육이라는 것은 선한 것이고 그것이 곧 학습을 의미한다면, 악이라는 것은 학습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네. 악도 학습되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교육의 범주 안에 들어오는 것이고, 따라서 교육은 반드시 선이라고 할 수 없게 되니까. 그런데, 자네는 그것이 선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악은 학습되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르도록 가르쳐 줄 사람을 찾아 나서 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이지. 그리고, 악이 학습된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 대신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배운다는 말이 되네. 그렇다면, 우리는 악행을 한다는 것은 교육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에보 : 나는, 교육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네. 한 가지는 선을 행하도록 배우게 되는 교육이고, 다른 한 가지는 악을 행하도록 배우게 되는 교육이지. 자네가 교육이 선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얼른, 선행과 관계되는 교육만 생각했던 것이고, 그래서, 교육은 선이라고 대답했던 것일세. 그런데, 이제 자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분명히, 의심할 여지 없이 악에 해당되는, 또 다른 종류의 교육이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일세. 이제, 그런 교육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묻고 싶네.

 

아우 : 그건 잠시 접어 두고, 자네는 이해한다는 것은 선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건가?

 

에보 : 나는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그 이상 더 훌륭한 것이 있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선이라고 확신하네. 이해가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네.

 

아우 : 그렇다면, 모든 이해는 선이라고 한다면, 더구나, 이해 없이는 아무도 학습할 수가 없다면, 학습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선행을 하고 있게 되지. 그래서, 만일 우리 중에서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상담자를 찾아 나선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무엇인가 선한 것을 행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되네. 그러니, 자네는 악한 교사를 찾아 나선다는 것을 포기해야 하네. 누구든지 악한 사람이면 교사가 아니고, 교사라면, 악한 사람이 아니니까.

 

40)아무리 말솜씨가 좋은 사람이라 해도, 그의 말이 청중에게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결국 그의 삶이 어떤 삶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실제로, 말을 잘 하는 사람이 교활한 삶을 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더군다나,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하는 열의에 가득 찬 사람에게는 그의 말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다. 다만, 성서에도 있듯이, “그 자신의 영혼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전도서 37:21)는 것이 그에게 문제로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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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자기 자신은 행하지 않는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이득을 주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설교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스스로 그것을 행한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이로움을 줄 것이다. 그에게는 자기보다 훌륭한, 자기에게는 스승이 되는 사람의 행위에 비추어 가면서 자신의 교활한 삶을 그럴 듯하게 방어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물론이고, 때로는 실지로 자기 입으로도, “왜 너는 네가 가르치고 있는 대로 실천하지는 못하는가?”라고 자문하기도 한다. 이런 형편이니, 더구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도 않는 그의 말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가겠는가?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런 교사를 우습게 여기는 것만큼, 그 교사가 가르친 것, 즉, 하나님의 말씀 자체까지 경멸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도께서는 디모데에게, “당신의 젊음을 아무도 경멸치 않게 하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경멸을 피할 수 있도록 충고를 써서 보낸 바 있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의 말이나 대화, 자비심, 영혼, 그리고 순결에 있어서 스스로 모범이 되도록 하라.”라고.(디모데서 1권, 4:12)

 

사람들은 대체로 교사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 비난하는 것을 꺼린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가 높든 낮든, 그의 태도가 온화하든 위엄을 갖추고 당당하든 간에, 그의 말은 청중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가 있다. 그는 그의 평판을 두려워하여, “주님의 눈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눈앞에서도 매사를 정직하게 처리하는” 사람으로서의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고린도서 2권, 8:21) 한다. 그는 신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사려하기 때문에, 힘을 다해서 실제로 그런 생활을 하려고 애쓴다. 이런 교사는 또한, 자기가 하고 있는 말의 내용을 그 스타일보다 더 중시하고 있다. 그는 진리만 말하면 그것으로 말을 잘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사로서의 그는 말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기는 할 것이다.

 

언어에 대한 관심은 진리에 의해서 어떻게 거짓이 극복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제껴 놓고, 어떻게 하면, 말하는 스타일이 다른 사람의 말보다 더 설득력이 있게 되는가 하는 관심에서 온다. 그러나, 언어에 관심을 쓰지 않는 사람은 오직 진리를 밝히기 위해서,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것이 즐겁고 거기에서 우리가 자극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으로만 말하는 사람이다. 그의 목소리가 낮든지, 적절하든지, 또한 웅장하든지 간에, 그가 말을 하는 것은 오직 그 때문인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도, 사실상, “성서의 가르침의 최종 목표”이자, “율법의 완성”(디모데서 1권, 1:5, 로마서, 13:10)이기는 하지만, 그 사랑의 대상이 참이고, 거짓이 아니어야만 올바른 사랑이다. 신체는 건강하면서 마음이 망가진 사람은 차라리 그 몸이 망가진 것보다도 더 딱한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거짓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보다도 더 불쌍한 사람이다. 따라서, 웅변적이면서도 지혜로운 말을 한다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귀를 기울일 가치가 있는 진리가 담겨져 있는 말을 할 때뿐이다. 그러한 목적은, 목소리가 낮아도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 중간 정도의 목소리로도 물론 진리를 잘 밝혀 내어 빛을 발하게 할 수 있지만, 거기에다 웅변적인 스타일까지 갖추어진다면 열정까지 보탤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웅변적이기는 하되 현명하지 못한 말을 하는 것은, 웅변적이지는 못하되 현명한 말을 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그러나, 만약 그러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상을 줄 만할 뿐 아니라, 남에게도 모범이 될 만한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 그 자체가, 말하자면, 하나의 웅변과도 같은 것이다.

 

말은 잘 하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 낼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이 써 놓은 웅변적이고 현명한 말을 보고 그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말한다고 해도, 그들이 그 사실을 일부러 숨기려고 하지 않는 이상, 그것을 부정직한 행위라고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진리의 전도자가 되어 왔고, 그것은 오히려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 훌륭한 교사가 써 놓은 대로 많은 사람이 전달만 하고 있을 뿐이고 그들이 다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 중에 진정한 교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선지자 에레미아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한마디 한마디, 하나님의 말씀을 모조리 훔쳐다 쓰고만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나무라셨도다(에레미아서, 23:30)라고 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그들은 그리 큰 잘못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은 남의 것을 훔치지만, 신의 언어는 그에 복종하는 모든 사람의 재산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훔친다고 할 수 없다. 진실로 다른 사람의 재산이라고 할 말을 하는 사람은, 말만 잘 하고 삶은 악하게 사는 그런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고 있는 善은, 실제로는, 그의 삶의 방식과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자신의 사고의 산물인 척, 가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실제로는 악하면서도 선한 사람인양, 하나님의 말씀을 읊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말씀을 훔치고 있다고 한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행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것(즉,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다.

 

이 문제를 좀 더 들여다보게 되면, 그런 사람들은 그들이 말하는 善이 실제로는 말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들이 자기 자신의 행위로서 부정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다고 하겠는가? 사도께서 그런 사람을 보고,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다.”(티투스 1:16)라고 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는 이런 사람들은 말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못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의미는 모두 진리인 神, 그래서 항상 옳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대로 행하라.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행하고 있는 그것을 따르지는 말라”(마태, 23:3)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입으로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듣는 그대로 하되, 그들의 생활에서 우리가 보는 것 그대로를 행하지는 말라는 뜻이다. “그들은 말하는 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변함 없이, 실천은 하지 못하면서, 말은 계속 해 나간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예수는 이들을 나무라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 이 위선자들, 그렇게 악하면서, 선을 말하다니?”(마태, 12:34). 이것은 곧, 그들이 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의 마음이나 행동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들 자신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웅변적이지만 사악한 어떤 사람이 쓴 진리가 담겨 있는 연설문을, 웅변적이지 못한 선한 사람이 연설하게 되는 수도 종종 있다. 말하자면, 그 글을 쓰는 사람은 남의 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끌어내고 있는 것이고, 말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두터운 사람들이 역시 신앙이 두터운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면, 양쪽 다 자기 자신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것이고,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고자 하는 것을 글로 쓸 줄은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그에 맞는 삶을 충실리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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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자유의지」, ⅰ, 2-3.

39)** 역주:에보디우스는 교육과 학습은 다 같이 그 자체로서 절대적으로 善인지적  이해를 통한 활동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범죄를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이 잇다는 사실에 대한 생각의 끈을 놓지 못하고 결국, 악을 가르치는 교육도 잇다고 말한다.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교육현실이나 종교현실에 대한 비판을 교육과 종교의 개념  자체에 대한 비판 과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는, 즉, 사실과 개념을 혼동하는 일반적인 예를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은 이해를 통한 지식에 도달하는 일이 아니므로 교육이 아니며 따라서 그런 것을 가르친다면 교사도 아니라는 것을 재확인하게 함으로써 에보디우스가 교육과 학습의 개념애 대한 논리적 일관성을 회복하도록 도와 주고 있다.

 40) 「기독교 교사」, ⅳ, 5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