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님께 / 신정과 구정 사이, 이 어정쩡한 즈음에...
어젯밤에, 제 4장 학습의 과정 - 10 에대한 미루님의 댓글에서 언급해 주셧던(제가 처음엔 좀 어정쩡하게 번역하여 뜻이 애매햇서 오해가 좀 잇엇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 본다는 것은 그 자신의 내면에 가지고 잇던 이미지들 중에서 어떤 것을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발견하는 일이다'라는 부분(둘째 문단 첫줄)에 대해 설명을 좀더 드리려다 말고,. 나뭇꾼 저녁모임 나갓으니 자유시간 누리리라, 혼자 느긋이 저녁밥을 먹고 소파에서 잠시 잠든 것이 내쳐 자버렸네요. 늦게 들어 온 나뭇꾼과 요즘 저 사람이 무척 힘들어 하고 잇는 팔통증 이야기를 하며 몇 잔의보이차를 나누다 보니 너무 늦어서 어영버영하다가 또 그대로 자버렷어요. 지금은 또 좀 나아서 또 노트북 앞에 앉앗네요. 오늘밤엔 세미나 때문에 또 늦게 오지요...미루님 팔은 요즘 좀 어떠세요?.
어거스틴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 본다는 것은, 우리 속에 없었던 어떤 새로운 미지(영상)로 그 사람을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외적 대상들에 대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기억고에 이미 저장되어 잇는 많은 이미지들 중의 어떤 것과 그 사람을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햇지요. 그리고 그 영상의 기억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것이 보태어진다고도 했지요...그러고 보니 언젠가, 어거스틴의 기억에 관련하여 '새미님 전상서''라는 편지형식의 글을 썼던 기억이 또 나네요. 아쉽게도 그 글은 수정하는 과정에서엿던가, 어쩌다가 날려 버렷고 지금은 그 댓글들만 남아 잇지만.그 때도 그의 논리는 비슷햇어요. 기억은 수많은 영상으로 샇이면서 계속 보태어지고 빠지고 변형되어 가는 것이라고...그리고 모든 새로운 생각들은 모두 그 기억을 바탕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될 수 잇는 것이라고 했지요....
아무튼, 그러니까, 동일시되는 그 이미지는 '자신에 대한'어쩌면유일한 이미지가 아니고 ,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들에 대한', 그러면서도 자신으로부터 나오고 변형되는' 이미지들 중의 어떤 것이지요. 그래서, 그 자신은 그것이그 동일시의 대상인 사람을 "어떤 '종류로' 알아 보는 것이라고 햇던 것이지요 그런데, 정작, 자기자신은 어떻게 알아 보는가? 저 글에서 어거스틴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지요.
우선,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는, 내가 그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 갈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내 안에 들어 앉힐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신체의 눈처럼 마음의 눈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볼 수도 없어서 저렇게 자신이 언제부터인가 마음 속에 저장해 두엇던 이미지들의 기억들 중 어떤 것을 꺼내어 그 사람의 새로운 이미지에 보태거나 동일시해서 알아 보는 수밖에 없어서,그 과정에서 무엇인가가 잘못될 수도 잇다고 하고 잇는 것이엇지요. 여기서 일일이 예를 들지는 않앗지만,
예컨대, 요즘 우리가 새미님 방에서 거론한 바 잇는 저 '실금이 간 화병'의 이미지만 해도, 새미님은 어떤 경험을 통해 저 이미지를 기억하고 잇고 현재 어떤 경험을 그것과 동일시하고 잇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역시 각자 다른 경험에서 얻은 저 이미지를 또한 각자 다른 현재의 경험과 동일시하고 또한 그것을 또 각자 다르게 해석하고...그러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엇던 것이지요 어거스틴이 우려한대로, 이미지는 어던 사람일 수도 잇고 그 사람과의 관계일 수도 잇고 그 관계어서 얻은 자신의 마음일 수도 잇고...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더 많은 풍부한 해석을 통해 또 다른 이미지를 쌓고 서로 주고 받는 과정에서 서로를 새로이 알아 보기도 하고 상처를 주고 받기도 하고 자신을 돌아 보기도 하엿겠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엇는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가 없었던 것이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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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거스틴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에 관한 한, 저런 외적인 대상들의 이미지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이 자기자신 안에서 직접 들여다 보면서 자신을 이미지가 아닌 실체로 만나므로, 자신을 알아 보는데 실수가 잇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내가 무엇인가를 알고 잇다는 걸 가장 잘 알 수 잇는 사람은 바로 나이고 내가 나를 알면 아는대로 잘 알지 못하면 못하는대로, 그대로를 내가 안다는 것이지요.말하자면,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하는 사람이 잇다면, 그 사람은 그런 자기를 알고 잇다는 것이지요' 설사 '내 마은은 하나님만 알아라고 한다고 해도 그는 그렇게 알고 잇는 자신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도 몰라'라고 한다고 해도, 그는 아무도 모르는 그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알아 봄으로서 거기에는 오해란 잇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명상하거나 기도할 때는 그런 내성적 자기성찰에 순조롭게 이르는 듯하다가도,순간순간 욕망과 감정의 변덕에 휘둘려 너무 많은 경우에, 자기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직면하지 못하고 바깥쪽으로 마음의 눈을 돌리면서 어떤대상적인 이미지에 매달리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면서이미지 놀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지요...누가 나를 깨어진 화병이라고 한들,돼지저금통이라고 한들, 혹은, 백설공주라고 한들선녀도사라고 한들....왜 그것이 곧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겟어요? .그것들은 내 실체가 아니고 다만,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내 이미지, 영상, 내 그림자일 뿐이니, 그것을 나 자신을 되돌아 보고 반성하기 위한 좋은 자료로 쓰지 못하고..
그것은 마치, 그 어느 캐릭터와 자신을 진짜로 동일시하는 배우처럼, 남의 작품을 모방만 하는 예술가처럼, 혹은 반대로, 그 이미지에 대한 무조건 반사적인 거부반응에 휘둘려...자기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 현대심리학에서 말하는 투사(projection)는 바로 저 이미지를 통한 동일시 현상을 특화해서 발전시킨 개념이아닌가 해요. 자기 내면의 나쁜 이미지를 다른 사람의 마음과 동일시(다른 사람의 마음에 투사)함으로서 자신을 방어하는 기제...그것이 심해지면 환각과 환청과 환상, 과대망상과 현실도피와 공격성, 등등 더 많은 방어기제들로 지전하는 것이지요...
자기인식에 관한 저런 관점과는 달리, 문학에서는 저 이미지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닌지요? 이미지 빼고 나면 문학에서 무엇이 남을까 싶을 정도로...ㅎ 제가 이렇게 무얼 몰라서 하는 소리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는 제가 저를 아는 것, 맞지요? 제가 지금 '누구처럼'이라든가, '무엇처럼',이라는 말로, 혹은 다른 어떤 이미지로 저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잇지는 않잖아요...ㅎㅎ 에이, 그래도 그렇지, 그러니까 너무 삭막해...인간에 대한 이해는 문학이 최고라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이미지 없는 이야기는 이파리 없는 나무처럼 쓸쓸해라....아니, 무엇보다도 문학은 인간심성의 이해에 가장 좋은 길이라고들 하잖아요...거기에 저 이미지즘은 어느 정도로 기여하고 잇는지,내가 의문을 가진 존재라는 걸 아는 존재가 되어...ㅎ 아니, 사실은, 미루님은 이미지즘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잇는지, 갑자기 그게 궁급해집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우리의 화두는 우리는 각자 어떤 실금이 간 화병을 끌어 안고 언제까지 메우고 매개하며 살 것인가, 언제, 어떻게, 머리를 들고 하늘을 보라, 확 털고 일어나 던져 버리고...새로운 화병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 하는 것 이네요...우리 모두 의문을 가진 존재들임을 아는 어정쩡한 존재들이 되어...
오늘은 이번 방학 도자기 동아리 마지막 시간인데, 아마, 나는 또 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된 실금으로 인해 터져 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항아리 한 넘을 기어이 집에까지 안고 와서 붙들고 앉을 것 같아요. 도이치 그라마폰 이미지의, 나팔 주둥이 화병인데, 작업실 .내부공사 관계로 한 달을 쉬어야 해서 그 동안 너무 말라 버리면 안되거든요... 마침, 신정은 지나고 구정이 다가 오는 이 즈음에도 무언가 새로운 마음으로 털고 일어서지 못하는 우리들 불친구들의 마음이 모두 내 마음 같지 않을까 하며...저 양반도 아직 털고 일어서서 학교로 가지 못하고 잇지만, 난 나가는 길에 연말정산 관련 일도 좀 보아야 하고, 어서 털고 일어 나려고 해요.아, 참, 오페라 구경 갔다 왓다는 재재님 방에랑...마실도 한 바퀴 돌고 싶은데...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