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학습의 과정 - 10 自我認識의 確實性
自我認識의 確實性
37) 理性 : 너는 너 자신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고 있다. 그런데, 너는 너 자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나 하는가?
아우구스티누스 : 예, 알고 있습니다.
理性 : 어떻게 해서 그것을 아는가?
아우 : 어떻게 해서 아는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이성 : 너는 너 자신을 단순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복잡하다고 생각하는가?
아우 : 모르겠습니다.
이성 : 너는 너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아우 : 그것도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이성 : 너는 네가 생각할 수 있는지는 아는가?
아우 : 모르겠습니다.
이성 : 그러니까, 네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군?
아우 : 그것은 사실입니다.
38) 우리의 마음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중이지만 아직은 잘 모르고 있는 상태라면, 그 때 그 마음이 사랑하고 있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는 것은 분명하고, 그것은 사실, 우리 마음이 가진 큰 욕망에 속한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이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사랑인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인가? 그러나, 아직 마음이 자기 자신을 알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이고 누구든지 자기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을 사랑할 수가 없다고 볼 때, 과연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마음은 마치, 우리가 먼 곳에 있는 사람의 소식만 들을 수 있듯이, 자신의 본질에 대해 그저 소문으로만 알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마음은 어쩌면 자신을 사랑한다기보다도, 자신에 대해 실제와는 매우 다르게, 그저 상상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음은 자신과 비슷한 다른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있고, 그래서 진짜 자신을 알게 될 때까지, 그 유사품을 바라보면서 상상 속에서만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잇던 이미지들 중의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항상 어떤 종류 중의 하나로 알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자기 자신을 알아볼 때에는 왜, 자신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는 만큼 그렇게 잘 알아보지 못하는가? 자기 자신보다 더 생생하게 보이는 것은 없을 것인데 말이다. 만약 마음이 우리 신체의 눈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것보다 다른 사람의 것을 더 잘 알아 볼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마음은 결코 자신을 잘 알아볼 수 있을 가망이 없는데도 자신을 찾아다니고 있는 꼴이 된다. 신체의 눈이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은 거울을 볼 때뿐이다. 우리가 영원한 것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음은 우리가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쳐보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음은 그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영원한 진리에 대한 깨달음 속에서 그것을 알게 되는가? 마음은 그것을 아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와 같은 자아인식이 자기 내면에서 성장하게 되기를 갈구하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음은 아직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자신을 아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마음이 자신을 알기도 전부터 자신을 아는 일의 가치를 깨닫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정말, 마음이 어떤 신비스러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서, 예컨대, 마음의 안정이나 행복 같은 최고의 가치를 지향하는 그런 목표라는 것이 있다는 기억이, 옛날에 떠나왔지만 아직도 마음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까?
그러면, 마음은 자신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 최고의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인가? 그래서 마음이 그런 대상을 사랑하고 있는 한, 그 자신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며, 마음이 알고 사랑하고 있는 바로 그것 때문에,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는 그것을 찾아다니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그 자신의 본질에 대한 기억을 못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 자신의 행복에 대한 기억은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어째서, 그 목표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자기가 향해 나아가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면서, 그 자신이 무엇인지는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자기 자신을 알아내려고 애쓴다는 것은, 마음은 단지 알아내는 행위 그것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즉, 아직 알아내지 못한 그 무엇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싶어하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는 것, 이 때문에, 마음은 결국 지독한 회한에 빠지게 되지는 않을까?
정리하자면, 마음은 앎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앎을 사랑하고 있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또한 알고 싶어한다. 마음이 자기 자신을 모른다고 하면, 앎이라는 것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마음은 자신을,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알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그런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일까? 마음이 앎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틀림없이, 자기 자신을 알게 됨으로서만 가능하다. 만약 마음이, 자신을 모른다면, 자기가 다른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겠는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그f 자체는, 결코 자신의 마음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일 수가 없다. 따라서, 마음은 자기 자신을 알고 있다. 마음이 자신을 알려고 애쓸 때에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마음은 자기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자신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무지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서 이미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이 된다. 또 자신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자신에 대해 알려고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그 자신을 알려고 애쓴다는 것 자체가, 그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자신을 알기 위해 애쓰고 있는 동안 내내, 마음은 자신이 그렇게 애를 쓰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자신은 아직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마음은 자신을 어느 정도만 알 뿐이고 완전하게 알지는 못한다고 말할 것인가? 마음 전체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나는 마음이 자기가 알고 있는 전부를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전체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마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즉, 전체로서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마음은 자신이 어떠어떠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마음이 안다고 하면, 마음 전체로 아는 것이 아닌 것은 없다. 마음은 하나의 전체로서 자신을 안다. 그런데, 마음이 자기가 살아 있다는 사실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이 있는가 생각해 보라. 마음이라고 하면서 살아 있지 않는 존재란 있을 수가 없다. ... 마음은 하나의 전체인 이상, 그것은 항상 하나의 전체로 살아간다. 자기가 하나의 전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은 자신의 전체를 아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음이 자신에 대해 알려고 애쓸 때에는 자기 자신이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마음이 다른 것 아닌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어쩐지를 알 도리가 없으며, 그러다가 엉뚱한 대상을 가지고 그것을 알아보느라고 다른 길로 가고 있을 수도 있게 된다. ... 그러므로, 마음이 마음의 본성에 대해 탐구할 때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자신이 하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 틀림없다. 나아가서, 자신의 내면에서 자기가 마음이라는 것,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것은 자신을 하나의 전체로 알고 있는 것이다. ...
39)그렇다면, 마음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충고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그 말이, 마음은 그 자신에 대해 반성해야 하고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라고 믿는다. 마음은 자기의 본성에 일치되도록 즉, 마음이 종속되어야 할 神 아래에서, 그리고 그 마음에 종속되어야 할 만물 위에서, 자신을 가다듬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한다. 마음은 항상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神 아래에 서 있어야 하고, 또한 만물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그것들 위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변덕스러운 욕망 때문에 마음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 듯이 행동할 때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그 내면에는 저 神의 탁월한 본성에 속하는 아름다움을 항상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으며, 그러한 아름다움을 변함없이 향유하는 것이 마음이 지켜나가야 할 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그러한 아름다움을 오로지 자기 자신이 잘난 탓으로 돌리고 싶어하며, 자기가 神의 유사품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神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자기존재의 근원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神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멀어져 가게 된다. 마음은 자신이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계속해서 소멸되어가는 것들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을 뿐이다. 마음은 그 혼자만으로 충족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다가, 혼자만으로도 충족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神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한, 마음은 자기 자신 아닌 다른 무엇으로도 충족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그 자신의 그러한 부족감에 대한 염려를 떨쳐내는 행위에서 얻는 거친 쾌감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외부의 물리적 대상들에서 지식을 얻어 내고자하는 욕망에 가득 차게 된다. 마음은 그런 것들에 대해 끝없이 알아내려 하고, 또한 그것들을 사랑하면서, 자칫 한눈을 팔다가는 혹시 그것들을 놓쳐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조바심을 한다. 바로 그것 때문에 마음은 안정을 잃게도 되지만, 또한 그럴수록 마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이 드물어져 가고 있는데도,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잃지 않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과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것은 마치 특정한 학문분야의 지식이 풍부한 사람, 예컨대, 어떤 약학자가 지금 이 순간, 약학에 대한 생각에 골몰해 있느라고 문법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을 때, 그 사람은 문법을 모른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자신을 안다는 것과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다른 일이기는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일단 한 영혼이 오랜 시간 동안 애정을 가지고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 일은, 마치 거기에 풀칠이라도 되어 있는 것처럼 그 영혼에 들어 붙어 있어서, 다음에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해보려고 할 때에도 늘 그것이 영혼을 사로잡고 있게 된다. 말하자면, 영혼은 물질들에 대한 사랑에 빠져버려서, 신체의 모든 감각들이 다 그것들에 뻗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것에 휘둘려 있는 것이다.
영혼은 그 물질들 자체를 자기 내부, 다시 말해서, 비물질적인 본성이 들어 있는 마음의 영역 안에까지는 그 자체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자신 안에서 만들어지고 그 자신으로부터 이끌어낸 영상들을 대신 끌어 모아서 그것들을 붙들고 있다. 마음이 그렇게 영상들을 형성할 때에는 그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영상들을 보태어 넣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렇게 형성된 영상들에 대해 스스로 자유로운 평가를 내릴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것을 그 내면에 가지고 잇기도 하다. 그 “어떤 것”이란, 더 정확히 말해서, 合理的 知性이며, 그것은 知的 判斷을 내릴 때 언제든지 사용되도록 영혼 속에 간직되어 있다. 우리의 영혼에는, 동물들이 그렇듯이, 물질적 대상들의 유사품(영상)들도 그 한 부분으로서 각인되어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 자체도 이성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0)마음이 “너 자신을 알라”는 소리를 듣고 있을 때는, 실제로 자기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그 이상의 것을 더 보태서는 안 된다. 마음은 적어도, 그 명령이 자기 자신에게 내려졌다는 것 즉, 그 명령은, 존재해 있고, 살고 있고,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떨어진 명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시체도 존재하고 동물도 살아 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시체나 동물이 세상을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마음이 존재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곧, 이해하면서 존재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라는 것을 마음은 알고 있다. 예컨대, 마음이 자기가 공기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해도, 그 공기가 이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음은 자기가 공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고, 다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만, 어쨌든 자기가 이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안다. 이러고 보면 마음은, 순전히 생각한다는 것을 떠나서, 진실로 안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의심해 본 적이 없는 것들에 대해 면밀히 검토해 보아야 하며, 마음이 이러저러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래야 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모든 마음(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공기로 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불로 되어 있다고도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뇌로, 또는 이러저러한 물질로 되어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것은 어쨌거나 간에, 그들은 모두, 마음이란 이해하고,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존재한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은 절대적인 개념이므로 일단 접어 두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 이해의 대상과 관련을 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물론, 살아있지 않는 사람이 이해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존재하고 있으며, 생명이 없는 시체와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이며, 또한 합리적 이해의 능력이 없는 영혼들과도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이해하는 삶은 특별하고 뛰어난 부류의 삶이다.
사람들은 또한 마음이 의지력이라는 것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존재하지 않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의지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여기서도, 의지를 그 의지로 이루어내고자 하는 대상과 관련시켜서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또한 기억력이라는 것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존재하고 살아있지 않다면 기억 역시 불가능하지만, 사람들은 기억력에 대해서 기억하고자하는 그 대상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된다. 위의 세 가지 능력들 중에서, 기억력과 이해력은 많은 것들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종합하는 두 가지 기능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경험과 지식을 향유하거나 사용하는데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의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 가운데, 의지가 그 스스로 만족을 느끼게 되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향유한다”고 한다. 반면에, 어떤 대상이 그 자체와는 다른 대상들, 즉, 우리가 마땅히 향유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대상들과의 관련 하에서만 그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될 때,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한다고 하는 것이다. 타락되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할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잘못 사용하고 있거나 잘못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런 것이 어떤 삶인가에 대해서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마음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므로, 일단, 신체감각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지식들에 대해서는 고려를 하지 않기로 하고, 우리가 이야기해 온 것 즉, 마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집중시키기로 하자.아무리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 보아도, 우리의 생명, 기억력, 이해력, 의지, 사고, 지식, 판단력 등이 진실로 공기, 불, 뇌, 혈액, 원자, 그런 어떤 것의 작용 때문인지, 아니면 그 유명한 4원소 이외의 제 5의 원소가 있다는 것인지, 또는 그러한 모든 작용들이 우리 육체가 가진 물질들을 합성하거나 조화시킬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온갖 이론들이 만들어져 왔지만 적어도 인간은 삶을 살고 기억하고 이해하며, 의지를 가지고 생각하고 인식하며, 또한 판단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은 의문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여전히 삶을 산다. 의문을 가졌을 때, 그는 무엇이 그에게 그런 의문을 가지게 했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의문을 가졌을 때, 그는 자기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의문이 있을 때, 그는 확신을 가지고 싶어하고, 생각을 하며, 그 자신이 지금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다는 것도 알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함부로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사람은 어떤 이유로든지 의심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설사, 어떤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자기가 아무 것도 의심을 할 수 없다는 이유, 그것 하나만으로는, 그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마음이 물질로 되어 있다거나, 물질의 화합물 또는 혼합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위와 같은 모든 마음의 작용들을 다 그 물질적 실체가 가진 속성이라고 본다. 그런 견해에 따르면, 마음의 기초물질은 불, 흑은 그들이 마음이라고 믿는 어떤 물질이고, 이해라는 것은 결국 그러한 물질들이 가진 특질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물질이 그 실체이며, 따라서 특질이라는 것은 그 실체 속에 들어있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실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그들이 물질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이며, 따라서 이해라든가, 우리가 능력이라고 앞에서 언급했던 모든 작용들은 다 마음의 속성이 되는 것이다. 마음은 물질이 아니라 물질의 화합물 흑은 혼합물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견해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단지, 전자의 사람들이 마음 자체가 이해라는 것을 그 속성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물질이자 실체라고 믿는 데 반해서, 마음은 혼합과 화합의 원리를 가진, 물질인 실체의 속성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그 사람들 역시 이해란 그 실체인 물질이 가진 속성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대로는, 우리가 앞에서 설명해낸 사실, 즉, 마음은 그 자신을 알려고 애쓰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알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그 이유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알아내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것을 제대로 안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마음이 자기 자신을 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은 그 실체를 안 것이며, 그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신의 실체에 대해 확실히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은 마음이 자기 자신이 공기인지, 불인지, 흑은 어떤 다른 물질인지, 그 물질들이 모여 어떤 조합을 이룬 상태인지, 이런 것을 모르고 있는데도,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마음은 그런 물질들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명령의 취지는, 마음은 이제, 그토록 애써 봐도 아직 입증할 수 없는 그런 물질들 중의 어느 것도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고히 하고, 자신의 본질에 대해 확신할 수 있게 된 것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불이나 공기, 또는 다른 물질들에 대해 생각할 때 적용되는 원칙 그대로이다. 그러나, 마음이 자기 자신이 실제로 그것인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자기가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법과 똑 같은 방법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마음은 불, 공기, 흑은 다른 물질, 그리고 그것들의 어느 부분이나 화합, 흔합 등에 대해 생각을 할 때에는 정신적 영상들을 수단으로 동원한다. 그런데, 만약 마음이 그것들 중의 어느 것이었다고 하면, 마음은 그 물질에 대해서는 다른 물질에 대해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마음은 신체감각으로 경험했던 어떤 구체적인 물체나 그 종류들에 대해 생각하려면 정신적인 영상들을 동원해야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그것들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마음은 자기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일종의 內省法 즉, 영상이 아닌 실체 그 자체로서 생각을 한다. 마음에게는 그 자신보다 더 자신에 가까운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삶, 기억, 이해, 의지 등 자신의 기능에 대해 생각할 때와 똑같이 자신에 대해 생각할 것이며,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자기내부에서 그 해답을 찾아낸다. 마음은 모든 물리적 대상들을 경험할 때 그것들이 마음의 외부에 있어서 신체적 감각을 통해 그것들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래야 했던 것처럼, 별도의 영상들을 동원할 일이 없는 것이다. 마음이 이처럼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들로부터 얻어낸 것을 자기 자신에 적용시키지 않는 한, 그래서 자신을 그것들과 같은 종류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마음이 자신에 대해 생각한 것은 모두 다 실제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41)우리는 존재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안다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이 점에 관한 한,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속이는 기만적인 환상에 붙들려서 틀리게 되는 일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외부세계의 사물을 인식할 때처럼 신체감각을 통해서야 우리 자신에 관한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색깔은 눈으로, 소리는 귀로. 냄새는 코로 받아들이고, 맛은 혀로, 그리고 물체의 단단하고 부드러움은 촉감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감각적 인상들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는, 그것들은 물체의 영상들에 관한 것으로서, 물질적 대상 자체와 매우 가까운 것이기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물질적인 것이 아닌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러한 영상들이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어서, 우리는 그 물리적 대상 자체가 실제로 우리 앞에 있어서 직접 확인을 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에 관한 한, 우리는 그런 기만적인 영상들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말에 대해서, “당신이 무엇인가를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묻는 학문주의자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내 말은 틀리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고 나는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실수를 할 수는 없다. 내가 실수를 했다고 말하는 순간, 그와 똑같은 논리로,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실수한다면, 나는 존재한다.」 그러면 혹시, 나는 내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존재한다고 잘못 생각할(실수할) 수도 있는가? 내가 잘못 속고 있을 때에도 (실수할 때에도) 나는 존재한다고 하면, 언제든지 실수라는 것을 할 수 있는 내가, 실제로 실수를 했다고 해도(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한다고 잘못 알고 있을 때에도), 나는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아는 데 관한 한, 나는 실수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데 있어서도 실수할 수가 없다.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내가 알 때에는, 내가 알고 있다는 것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 두 가지의 확신을 사랑하고 있어야 비로소, 지식이라는 것도 그 두 가지와 똑같은 비중으로 세 번째 가치로 인식될 수 있다.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사랑을 내가 하고 있다는 것은 틀린 것일 수가 없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나 자신이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다 틀렸다고 해도, 내가 그 틀린 것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은 여전히 옳다. 도대체, 무엇이든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내가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 때문에 내가 비난을 받거나 금지를 당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이 사실이고 옳으므로, 누군가가 그것들을(내가 존재한다는 것과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안다는 것을) 사랑한다면, 누가 그 사랑은 사실이고 현실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모든 사람은 행복해지는 것을 바라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원한다. 존재하지 않고 행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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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독백」, ⅱ, 1.
38): 「삼위일체」, ⅹ, 5-6
39): 「삼위일체」, ⅹ, 7
40): 「삼위일체」, ⅹ, 13-16.
41): 「신의 도시」, ⅺ,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