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학습의 과정 - 6 음악에 대하여
다음의 글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문, 「음악에 대하여」의 1권 첫 부분에 나오는 것으로서 교사(아우구스티누스)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느 학생간의 대화형식이다. 이 글은 음악을 “좋은 調音에 관한 지식”(scientia bene modulandi)이라고 정의하면서, 예술과 모방의 분명한 구별을 통하여 그 정의를 잘 다듬으려 하고 있다. 예술은 지식을 함의하며, 지식은 신체가 아닌 마음에 관련된 것이다. 반면에, 모방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신체적 반응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음악의 정의에 지식을 포함시킨다는 것은 음악을 예술로 보면서 그것을 실천적 연주활동보다도 지적인 지식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것이 된다.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실천적 활동으로서, 더 낮은 차원에 속하지만, 음악을 “안다”는 것은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음악연주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의하면, 數的인 關係에 의해 결정되는 음악의 제 1원리를 “아는” 사람이라고 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은 심신이원론 즉, 생각과 실천적 활동을 구별하는 것은 實在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본적인 아이디어이다. 교육에 대한 그의 이러한 생각은 현대에 와서 현실주의적 교육사상가 존 듀이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다.
교사 : 우리는 이제, 음악의 정의에 왜 “지식”을 포함시키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학생 : 그렇습니다. 우리의 토론이 그런 것을 논할 순서가 된 것 같습니다.
교사 : 그러면, 이제 자네는 봄철에 노래하는 나이팅게일이 자기 목소리를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것부터 말해보게. 그 목소리는 리듬이 있어서 참 듣기가 좋거든. 게다가, 내가 잘못 생각하 는 것이 아니라면, 그 소리는 계절에도 잘 어울리는 소리야.
학생 :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교사 : 그러니까, 그 새는 이 교양학과(음악)의 수련을 받은 셈인가?
학생 : 아닙니다.
교사 : 그렇다면, 자네는 “지식”이라는 것이 음악의 정의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학생 : 그렇습니다.
교사 : 좋아. 그러면 그 점에 대해 말해 보게. 자네는 감각의 자극을 받아서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 즉, 리듬도 좋고 목소리도 좋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모두 나이팅게일과 똑같다고 생각하는가? 그 사람들에게 리듬, 고음과 저음의 간격 같은 것에 대해 물으면 아무 대답도 못하면서도 노래는 신통하게도 잘 부른단 말일세.
학생 : 저는 그 사람들은 정말로 나이팅게일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교사 : 그렇다면, 이제, 그들은 그런 지식은 없지만 음악을 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새들하고 똑같다는 것 아닌가? 새들이 애써서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 이유, 거기서 쾌락을 얻는다는 것뿐이거든.
학생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건 거의 모든 인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하는 것입니다.
교사 : 그렇지 않네. 위인들 역시, 음악적인 지식이 없고 동물들과 별로 다름이 없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과 어울리기는 하네. 그렇지만, 그들은 겸손과 예의로 그러는 거라네. 그리고, 일이 끝난 후에 휴식을 취하고 정신을 다시 가다듬기 위해서, 절도 있는 방식으로 음악의 즐거움을 가지기도 하지. 음악의 포로가 되어버리는 것은,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비천하고 보기 흥한 일이 되겠지. 아무튼 한 번씩 음악에 빠져 보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지.. 그런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플루트, 라이어 같은 악기를 잘 하는 사람은 나이팅게일에 비길 만한 것인가? 비교해도 되는 건가?
학생 : 아닙니다.
교사 :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가?
학생 : 그런 연주자들에게는 예술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나이팅게일에서는 단지 자연적인 본능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교사 : 자네 말이 옳은 것 같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의 연주가 일종의 모방에 불과할 때에도, 자네는 그것을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학생 : 왜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는 모방이라는 것이 예술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빼놓으면 예술은 거의 안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선생님들도 자기들을 모방하도록 학생들에게 시범을 보이고, 그것은 소위 가르친다고 하는 일의 본질이 아닙니까?
교사 : 자네는 예술도 이성의 일종이고 예술을 하는 사람은 이성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자네는 다르게 생각하는가?
학생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사 : 그렇다면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
학생 :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사 : 그러면 자네는 까치, 앵무새, 또는 갈가마귀 같은 새들을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모방”을 가지고 성급하게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이든지, 둘 중의 하나일세. 그런 새들은 노래를 곧잘 부르고, 게다가 사람의 발성기술을 거의 그대로 다 쓸 뿐 아니라, 그나마 거의 모방만으로 해 내지 않는가? 아니라면 자네는 달리 생각하는가?
학생 : 저는 아직도 선생님이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에 이르렀고, 그것이 또 어떻게 저의 대답과 모순되고 있는지를 확실히 잘 모르겠습니다.
교사 : 나는 자네한테 라이어, 플루트 또는 그런 종류의 악기들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방으로만 해 내고 있을 때에도 예술을 하고 있다고 하느냐고 물었네. 자네는 그것을 예술이라고 하면서, 모방은 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그것을 빼버리면 예술 전체가 위태롭게 되는 것으로 말했지. 거기에서 우리는 모방에 의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되는 사람들은, 물론 예술을 하는 사람 모두가 모방으로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모두 다 예술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네. 그렇지만, 비이성적인 동물들은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따라서 예술을 할 수가 없는 것이네. 동물들은 모방을 할 수 있고, 예술은 모방이 아니란 말일세.
학생 : 저는 많은 예술이 모방을 포함한다고 했지, 모방 자체만으로 예술이 된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교사 : 그러면, 모방을 필요로 하는 그 예술에 이성이 포함된다고 생각하는가?
학생 : 예, 예술은 둘 다를 필요로 합니다.
교사 : 나는 자네와 입씨름을 하려는 것이 아니네. 그렇지만 자네는 지식은 어디에서 볼 수 있는가? 이성인가, 모방인가?
학생 : 양쪽 다입니다.
교사 : 그러면 자네는, 자네도 인정하다시피, 모방을 할 줄 아는 저 새들에게도 지식이 있다고 하겠네?
학생 : 아닙니다. 저는 그 두 가지 다에 지식이 있다고 했으니까, 모방 한 가지로는 지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교사 : 그러면, 이제 지식은 이성 한 가지에만 있다고 생각하는가?
학생 : 그렇습니다.
교사 : 그러니까, 자네는 지식은 이성에서만 볼 수 있고, 예술은 모방과 이성을 합치는 것이므로, 예술과 지식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겠네.
학생 : 저는 아직 그런 결론은 인정이 안됩니다. 저는 모든 예술이 다 이성과 모방을 합치는 것이라고 한 것은 아니고, 많은 예술이 그렇다고 한 것입니다.
교사 : 자네는 그 두 가지를 합친 것에다가 “지식”이라는 이름을 붙일 건가, 아니면 이성의 작용 한 가지에만 붙이겠는가?
학생 : 이성에다가 모방이 합쳐졌다고 해서, “지식”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교사 : 우리가 지금 라이어와 플루트 연주자, 즉,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나는 자네가 이 점에 대해 말해 주면 좋겠네. 자, 그 연주자들이 모방에 의해서 어떤 것을 연주해냈다면, 우리는 그것을 신체적 기능으로 간주하고 신체가 마음에 복종한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이 말일세.
학생: 저는 그것을 신체와 마음 양쪽의 기능이 다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신체의 복종” 이라고 하신 것은 잘 말씀하신 거라고 봅니다. 신체는 마음의 명령이 없이는 아닌게 아니라, 복종할 수조차 없을 테니까요.
교사: 자네는 정말, 모방이 신체에만 속한다고 물러서기가 꺼려져서, 매우 조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네. 그러면, 자네는 지식도 마음에만 속하는 것임을 부정하겠나?
학생: 그걸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교사: 그렇다면, 현악기와 플루트의 경우, 자네는 지식을 이성과 모방 양쪽에 동시에 속한다고는 말할 수 없게 되었네. 자네는 신체 없이는 모방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를 했음면서, 지식은 마음에만 속한다고 하지 않은가 말이네.
학생 : 제 말대로라면, 그런 결론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러면 어떻습니까? 플루트 연주자도 역시 마음 속에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신체에 속한다고 했던 모방에만 그가 열중해 있을 때라도,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지식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사 : 그렇지, 그것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네. 나는 그런 악기들을 연주하는 사람 모두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 것은 아니고, 그들 모두가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한 것이라네. 우리의 이 논쟁은 결국,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음악의 정의에 “지식”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어떤 충분한 이유가 있는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끌어져 가고 있네. 만약 모든 플루트, 라이어 등의 연주자가 이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보다 더 쓸 데 없고 가치 없는 논쟁이 어디 있겠나. 어쨌든, 이제 정신을 가다듬어, 우리가 지금까지 이토록 오랫동안 애써온 문제가 무엇이었나를 분명히 해 보도록 하세. 자네는 분명히, 지식은 마음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지.
학생 : 그랬습니다.
교사 : 자네는 청각이라는 것이 마음에 속한다고 보는가, 신체에 속한다고 보는가, 아니면 양쪽 다인가?
학생 : 양쪽 다입니다.
교사 : 기억은?
학생 : 마음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 무엇인가를 받아들여서 기억에 갖다 맡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억이 우리 몸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교사 : 그건 큰 문제이긴 하지만, 이 문제와는 사실 상관이 없는 문제지. 그렇지만,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우선 자네도 부인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네만, 동물들도 기억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걸세. 백조들은 1년 만에 자기 보금자리로 돌아오고, “염소들도 기억이 있어서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버어질, 고르기아스, ⅲ, 316)고 정말, 그러지 않던가. 개도, 자기 백성들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영웅적인 옛 주인을 알아 보았다는 말을 들었네.(호오머, 오딧세이, xxiii, 291)내 말에 대한 증거를 찾아보려고 하면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지.
학생 : 저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지금 우리 이야기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빨리 알고 싶습니다.
교사 : 이게 포인트일세. 만약 자네가 지식을 마음에만 속한다고 하고, 모든 비이성적인 동물들에게는 그것이 없다고 하면, 자네는 지식을 감각에도 두지 않고 기억에도 두지 않는다는 것이며(전자는 신체 없이는 존재하지도 않고 동물들은 감각과 기억 둘 다 가지고 있으니까), 오로지 이해에만 둔다는 것이 되네.
학생 : 그러니까, 그것이 선생님의 이야기와 무슨 관계인지, 그걸 알고 싶습니다.
교사 : 이 말일세. 감각을 추구하면서 거기에서 얻는 쾌락을 기억에 저장해 두고, 모방능력을 동원해서 쾌락에 취해 몸을 흔드는 그런 사람들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런 사람들이 아무리 기술적으로 배운 솜씨로 많은 것을 해 내는 것 같아도, 지적인 순수성과 진리에 입각해서 자신이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지식이 있다고 나는 보지 않겠네. 이성적으로 보아서 그들이 그것을 파악했다고 할 수 없다면, 그들에게 지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주저할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그들이 調音의 “지식”인 음악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일세.
학생 : 어째서 그런지 말씀해 주십시오.
교사 : 자네는 손놀림이 빠르거나 늦다는 것은 지식이 아닌, 연습 탓으로 생각 할 것으로 나는 믿네.
학생 :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교사 : 자네는 지식을 마음에만 속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손놀림은 물론, 마음의 지시에 따라 한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신체적인 문제이고, 그러니, 말일세.
학생 : 그렇기는 하지만, 지식을 가지고 있는 마음이 그 신체에게 지시를 한 것이니까, 그 행위는 마음의 하수인에 불과한 신체의 것이 아니라, 마음의 것으로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교사 : 자네는 분명히 지식에 관한 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지식이 모자라는 그 사람은 물론 손가락을 더 정교하고 쉽게 움직일 수 있기도 하겠지만 말이지.
학생 : 그렇습니다.
교사 : 빠르고 정교한 손동작이 지식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손동작이 더 훌륭할 걸세.
학생 : 그렇겠지요.
교사 : 이 말도 좀 들어 보게. 자네는 일꾼들이 도끼나 망치 같은 걸 가지고 한 곳을 계속해서 때리면서, 자기들이 마음먹은 그 지점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을 본 적이 있겠지.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해도 잘 안되어서, 그걸 보는 사람들이 막 웃고 그러지 않나.
학생 : 말씀 그대로입니다.
교사 : 우리가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어느 곳을 쳐야 되는지, 혹은 목재를 어느 만큼 잘라 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인가?
학생 : 어떨 때는 모르기도 하지만, 알 때도 있습니다.
교사 :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일꾼이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은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완전하게 알고 있지만, 단지 그 일에 서투를 뿐이라고 생각해 보게. 또, 그러면서도, 그 사람은 사실상, 제일 기술이 좋은 사람에게도 아주 예리한 지시를 내릴 수 있다고 해 보게. 자네는 그 기술이 연습의 결과라는 것을 부정하는가?
학생 : 아닙니다.
교사 : 그러니까, 손동작이 얼마나 빠르고 부드러운가 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체적 기술이라는 게 다 지식이 아닌 연습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연습을 많아 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경험이 많은 사람도 손가락을 더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하네. 그러니까, 우리는 손가락과 관절들을 가지고 플루트나 라이어를 잘 하는 것이 어렵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꾸준한 연습과 모방의 결과라고 보지 못하고 어떤 지식의 결과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
학생 : 저는 그에 반대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학식이 많은 어떤 의사들은 사지를 잘라 내고 묶고 하는, 즉, 손과 칼을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는 오히려, 학식이 짧은 사람들보다도 더 못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고 있으니까요. 이런 의술작업을 “수술”이라고 하고 그것은 손에 달린 실천적인 치료기술을 지칭하지 않습니까. 이제 넘어가서, 우리가 생각해 온 것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 되겠습니다.
교사 :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좋은 소리를 내지 못하는 플루트 연주자에게는 야유를 보내고, 훌륭한 소리를 내는 연주자에게는 박수를 보낸다고 생각하는가? 소리가 좋을수록, 사람들은 더 깊고 강렬하게 감동을 받게 되지. 우리는 이것을 그 사람들의 음악예술에 대한 “지식”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학생 : 아닙니다.
교사 :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가?
학생 : 저는 그런 감상능력은 우리에게 청각기능을 있게 해 준 자연적 본성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런 소리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사 : 맞네. 그런데, 이 점은 어떤가? 그 플루트 연주가도 역시 그런 감각을 타고난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하면, 그가 연주를 할 때에는 손가락을 자기가 제일 좋다고 생각한 방법대로 움직일 것이고, 또 자기가 가장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소리를 골라서 기억에 남겨 둘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런 소리를 계속 반복함으로써, 우리가 말했던 본능적 감각의 안내와 승인에 의해 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아들였거나 자기가 작곡한 것이거나 간에, 손가락의 머뭇거림이나 더듬거림 없이 그 연주곡이 항상 제자리를 찾도록 습관화할 것이다. 그래서, 기억은 감각을 따르고, 손가락들도 연습으로 잘 훈련되어 기억의 지시대로 따를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우리가 이야기했던, 인간이 동물들과 똑같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 즉, 보고, 모방해 내고, 감각하고 기억하는 그런 능력들을 가진 정도만큼, 정확하고 아름답게 연주해 내게 될 것이다. 자네는 여기에 대해 할 말이 있는가?
학생 :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이 학문(음악)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이제 알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 선생님은 분명히 그것을 비천한 사람들의 마음에 관계된 것만은 아닌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교사 : 우리가 이야기한 것만으로는 사실 그런 것을 알기에 충분치가 않네. 우리는 이제 음악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연주자들은 대중의 귀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알아내야 하네. 그러지 않고는 학문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네. 그런 주장은, 곧, 연주자들은 음악학도가 되거나 음악학에 능통할 수가 없다고 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지. 자, 우선 다음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지 말해 보게나. 음악에 대해 우리 스스로 이해하게 된 지식인가, 아니면 음악에 대한 문외한들이 제멋대로 우리에게 던져 준 지식인가?
학생 : 누구든지, 전자가 물론 더 훌륭하다고 할 것입니다. 후자는 결코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교사 : 그러면, 모든 지식은 우리의 이해 안에 간직된다는 것을 부인하겠는가?
학생 : 그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교사 : 음악도 이해의 대상인가?
학생 : 음악의 정의가 그렇습니다.
교사 : 그리고, 나는 대중의 박수소리나 무대 위에서의 모든 보상은 행운이 따라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고, 그런 행운이란 문외한들의 판단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것에 자네도 동의하리라 믿네.
학생 : 제 생각에는, 이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 예측이 불가능하고 우연적이며, 대중의 변덕에 휩쓸리는 것은 없다고 봅니다.
교사 : 그러니, 만약 연주자들이 음악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대가로 음악을 팔 것 같은가?
학생 : 저는 그런 결론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대답으로서 할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음악가가 금화를 파는 사람과 같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음악가가 박수를 받거나 돈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대중을 기쁘게 해 줄 수 있었던 그의 지식을 잃어버리게 되지는 않습니다. 돈도 듬뿍 받고 사람들의 칭송에 기분도 우쭐해져서 집으로 돌아오지만, 그의 예술은 여전히 온전하게 그에게 남아 있습니다. 상을 받는 일이 없다면 명성도 떨어지고 수입도 줄어들겠지만, 어쨌든, 상을 경멸할 것까지야 없을 것입니다. 그 상을 받는다고 해서 그의 예술이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사 : 우리의 이 논의가 우리가 원하는 결론까지 가게 될 지, 어디 좀 보세. 자네는 우리가 어떤 활동에 참여하는 목적이 그 활동 자체보다 훨씬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믿네.
교사 :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순전히, 대중의 칭송을 받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거나 노래를 배운다면, 그 사람은 노래부르는 것보다 칭찬 받는 일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이겠지?
학생 : 그렇습니다.
교사 : 그러면, 자네는 어떤 학과에 대해 그렇게 옳지 못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그 학과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학생 :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뇌물을 받고 그러지 않는 한 말입니다.
교사 : 그러니까, 확실히 가치가 덜한 어떤 것을 가치가 더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인 셈이지.
학생 : 그렇습니다.
교사 : 그러니까, 자네가 어떤 음악가가 매우 재주가 있고, 단지, 대중을 기쁘게 하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유명해지기 위해서 그 재주를 키워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에게 설득하거나 증명해 보인다면, 나도 한 사람이 음악적 지식도 갖추고 동시에 연주가도 될 수 있다는데 동의를 하겠네. 그런데, 연주자들이 대체로, 그 전문적 활동의 목표를 돈이나 명성에 두기 때문에, 우리는 음악가들 중에는 음악적 지식이 없는 사람, 명성과 포상을 지식 그 자체보다 더 가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하게 되는 걸세.
학생 : 저도 그 앞의 이야기에 동의를 했으니까, 이번 이야기도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로서는, 외적인 보상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고 예술 그 자체만 사랑하는 무대연주가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현재로 존재한다거나 존재한다면, 음악가들도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로 생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