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학습의 과정 - 4 영혼의 위대성
9) 우리 두 사람이 10 )* 이 문제에 관해서, 학식이 높고 웅변력도 뛰어나고 또한 지극히 현명하고 완벽한 그런 사람에게 물어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사람은 우리에게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영혼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 그 자신을 다스리는 능력, 그리고 영혼이 가장 순수해질 때, 가까이 갈 수 있으며 그 안에서 가장 고귀하고 완전한 善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신과 그 영혼의 관계, 이런 것들에 대해 잘 설명해 줄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지금 현재 그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에 없으니까, 나라도 자네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용기를 내어 이야기해 보겠네. 그 대신, 이렇게 무지의 상태에서나마 영혼의 능력에 대해 설명해 본다는 것은, 나 자신의 영혼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시험해 본다는 잇점이 있겠지. 그렇지만, 아예 애초부터 나에게 너무 과장된 기대 같은 것은 하지 않도록 말해 두는 것이 좋겠다. 자네는 내가 모든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이네. 인간의 복지에 관해 생각하려면,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특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지.
첫 번째로, 흙으로 돌아가서 죽게 되는 이 육체에 영혼이 있다는 것은 거기에 생명이 있다는 의미임을 쉽게 알 수 있다는 것. 영혼은 육체를 하나의 온전한 유기체 즉, 한 덩어리로 유지하면서 썩지 않게 해 준다네. 생명은 육체의 모든 부분에 영양을 골고루, 각 부분마다 그에 합당하게 분배해 주지. 또한 아름다움이라는 면 뿐만 아니라, 성장과 번식의 면에서도 생명은 육체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시키지. 물론, 그런 능력은 인간과 식물이 다 마찬가지로 소유하는 것임은 틀림없다네. 우리는 식물도 그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영양을 취하고 성장하며, 번식한다는 것을 보아왔고, 또 그렇게 주장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식물이 살아있다고 말하지.
두 번째 단계로 올라가서, 영혼의 감각적 지각능력 즉, 생명의 기능이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살펴보세. 우리는 포도를 따낼 때 포도나무가 아픔을 느낀다는, 그리고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실제의 나무보다도 더 “나무답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옹호하는 그런 잘못된 개념에 대해서는 물론 신경쓸 필요가 없네. 사람들은 심지어, 그것들이 절단될 때에는 통증을 느낄 뿐 아니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고까지 말하지. 지금 우리는 그런 신성 모독적인 이단에 대해 논의할 겨를이 없어. 나는 지금, 내가 제안한 대로, 감각적 지각과 고차원적 존재로서의 생명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운동에 나타난 영혼의 능력에 대해 검토해 보자는 것이지. 이 능력 때문에, 우리와 땅 속에 뿌리를 박고 사는 것들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그어지는 것이니까.
영혼은 그 촉감으로 인해 찬 것과 더운 것, 거칠고 부드러움, 단단하고 무른 것,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등을 감지해 내지. 영혼은 또한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맛과 냄새, 소리, 모양 등을 미각, 촉각, 청각, 시각으로 구별해 내지. 그러는 가운데서 영혼은 자기의 신체의 성질과 조화를 이루는 것들을 찾아내서 받아들이고, 해로운 것은 거부하고 회피하지. 때때로 영혼은 감각으로부터 물러앉아서, 감각들에게 휴식시간 같은 것을 주면서 그 기능을 재활 시키기도 하지. 그와 동시에, 영혼은 감각을 통해 끌어들인 사물의 이미지들을 여러 가지로 조합하고 연상시킴으로써 그것들을 변형시키기도 하지. 이 모든 일들은 영혼이 잠들어 있을 때, 꿈을 꾸고 있을 때 일어나기도 하지.....
영혼은 또한 운동을 즐길 때도 있다네. 즐거운 몸짓을 한다든가, 자의적인 움직임에 몰두한다든가, 신체의 각 부분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조정해 나갈 때. 性的인 결합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능과 능력을 발휘하여 두 개체의 성질을 한데 엮어 사랑을 할 때. 영혼은 자손을 얻는 일에서 뿐 아니라, 그들을 키우고 보호하고 영양을 공급하는 일을 위해서도 협동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지. 영혼은 신체가 움직이고 있는 곳이자, 신체를 부지시키고 받들어 주는 환경에 대해 스스로 적응함으로써, 환경이라는 것이 마치 그 자신의 일부인 양, 그로부터 떨어져 나가기를 원치 않게 된다네. . 그렇게 이루어진 연결상태를 떼어놓는다고 해도, 또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그 적응능력 자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데, 우리는 그것을 “기억”이라고 부르지.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능력은 동물들의 영혼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네..
이제 세 번째 단계, 인간 특유의 수준으로 올라가서, 기억이라는 것을 영혼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생긴 습관이 아니라, 관찰과 교습에 의해 개발되고 보유되는 능력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해 보게. 장인들의 온갖 솜씨, 논밭을 경작하는 기술, 도시를 건설하는 기술, 그리고 온갖 종류의 다양한 놀라운 기술들에 대한 기억들이 있지. 언어와 몸짓, 온갖 종류의 소리들, 그림들 그리고 벼라별 창작품들로 구성된 신호체계들이 거기에 축적되어 있지. 언어와 관습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게 중에는 독창적인 것도 있고 재창작된 것도 있겠지. 과거의 기록을 보존하기 위한 책, 미래세대를 위한 모든 관심에 대한 책들도 기억될 수 있고. 가족과 공동생활의 영역에서도, 민간차원이든 군대 관계이든, 혹은 세속적 제도이든, 혹은, 종교제도의 차원이든 간에, 수없이 많은 의무와 관계, 특권과 계층의 구도들을 우리는 기억하지.
또한 우리는 추리와 반성적 사고능력, 화려한 웅변술, 온갖 노래들, 언젠가 공연하게 될 지도 모르고 재담으로 써 먹게 될지도 모르는 숨은 재주들도 가지고 있어. 음악적 재능, 정밀한 측량기술, 산수교과의 능력, 현재로부터 과거와 미래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도 말이지.11)* 이 모든 것들은 다 특별히 인간에게만 있는 위대한 능력들이지. 그러나 이런 수준의 능력까지는 사실,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어떤 사람이든지, 구별없이 누구든지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겠나.
이제 더 위로 뛰어 올라가서, 네 번째 단계, 善을 포함한 모든 진정한 가치들이 시작되는 단계로 가 보기로 하세. 영혼이 이 우주 속에서 그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신체만이 아니라 우주전체의 물리적 한계를 뛰어 넘는 시도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단계에서일세. 영혼은 세속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자신의 요구들을 자기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에 비교하면서 그 요구들을 스스로 경계하고 축소시키면서 절연해 나가는 걸세. 그리하여, 영혼이 자기 자신에 심취하면 할수록, 부정한 것들로부터 더욱 더 자신을 멀리 함으로써, 어떤 것에도 우롱 당함이 없이 깨끗하고 단정한 자신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지.
또한 영혼은 그 결심과 목표를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는 힘을 스스로 키우면서 인간적인 가치를 소중히 여김으로써,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한다네. 그리하여 이제, 현자들의 권위와 교훈에 순종하면서 그들에게도 그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게 되지. 그렇지만, 이 고귀한 자세도 노력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세상의 온갖 잡음과 유혹에 맞서는 위대한, 쓰디쓴 투쟁이 있어야 하네. 그러한 순화의 과정에서,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 모르나, 때로는 매우 심각한 죽음의 공포가 배어 들기도 하지.
그러한 공포는 영혼이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기도 하지만, 죽음의 공포를 그렇게 넘는 것은 오직 순화된 영혼에게만 가능한 것일세.신의 섭리와 정의는 너무도 위대하기 때문에, 아무리 사악한 사람이 사주를 한다 해도, 결코 우리에게 그 악의 결과인 죽음은 오지 않는다네. 그러나 이 단계에서만은 죽음이라는 공포가 매우 강하게 되는데, 그것은 신념이 약한 상태일수록 그것을 찾기 위한 불안이 더욱 크기 때문이지. 어려운 문제를 푸는 데는 마음의 평화가 필수적인데도 불구하고, 공포 때문에 마음의 평화가 줄어들면 사리분별이 불분명하게 된다네.
영혼이 점점 예전의 오염되었던 상태와 순화된 상태간의 크나큰 차이를 깨달아가면서 그 차이를 두려워하면 할수록, 그가 그 몸을 신 앞에 뉘었을 때, 오욕으로 더럽혀진 그 자신을 견디고 있기가 어려워질 것이고, 신이 그런 그를 견뎌내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지.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영혼이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단호하게 이 세상의 모든 유혹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일보다도 더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일세. 영혼은 위대하므로, 최고선이자 진리인 신의 정의로움에 힘을 입어 그것을 이겨내고 만다네. 이 正義로 우주는 부지되고 지배되며, 바로 그것으로 인해서 모든 것들이 더 이상으로 좋을 수가 없는 최선의 상태로 존재할 수가 있는 걸세. 정의 앞에서 영혼은 겸손하고, 자신을 안심하고 의탁함으로써, 자기정화라는 그 험난한 과업에 끝내 성공하는 것이지.
영혼이 모든 부정한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이 세상 풍진을 다 씻어내고 나면, 이제는 오로지 그 자신만을 소유하면서 완전한 환희를 맛보게 된다네.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무 것도 괴로울 것이 없는 상태, 이 상태가 바로 다섯 번째 단계라네. 순수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도달한 후에 그것을 유지하는 것과는 다른 것일세. 영혼이 자신을 정화하여 순수성을 회복해 나가는 활동은 그 자신을 더 이상 더럽혀지지 않도록 막아내는 활동과는 다를 수밖에 없지. 이 단계가 되면 영혼은 그 자신이 모든 관점에서 얼마나 위대한가를 스스로 알게 된다네. 이것을 깨닫고 나면, 이제 영혼은 진실로, 높고 큰 신념을 가지고 신 앞으로 나아가네. 진리 그 자체와, 지금까지 그토록 열심히 추구해 온 그 높고 지극한 보상에 대해 명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
바로 이러한 활동 즉, 가장 진실되고 지고한 존재를 알고자하는 욕망은 영혼의 가장 고귀한 시력으로서, 그 보다 더 완전하거나 우수한, 또는 더 직접적인 능력은 없다네. 그러고 보면, 이제 여섯 번째의 활동단계, 영혼의 눈을 씻어내어서, 더 이상 나태하고 무심한, 비뚤어진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단계가 된다네. 그것은 단순히 눈의 건강을 돌본다는 것과는 다른. 시선을 한데 모아서 대상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지. 영혼의 눈을 씻어내고 병을 낫게 하지도 않은 채로 아무리 대상을 똑바로 쳐다보려고 해봤자, 그 사람은 진리의 빛에 눈이 부셔지는 사람으로, 그 빛 안에서 善을 알아 보기는 커녕, 오히려 더 많은 악을 발견하게 될 터이니.
그럴 때, 그들은 진리라는 이름을 거기에 붙이기를 거부하고 돌아서서, 천하고 음탕한 욕망에 가득 찬 채, 그들 앞에 놓인 악을 저주하면서, 병적인 상태가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상태, 암흑이라는 피난처를 찾아 숨어드는 것이라네. 계시를 받은 예언자는 이렇게 선언한 바가 있네. “내 마음 가운데 신이여, 순결한 심장을 만드시어 올바른 정신을 다시 북돋아 주옵소서.”(시편 50:12) 영혼이 진리를 탐구하는 길에서 벗어나 더 이상 방황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앗을 때, 정신은 “올바를” 수밖에 없다고 나는 믿네. 마음이 “순결”하지 않다면, 즉, 인간의 생각이 모든 욕망으로부터 물러나서 온갖 인간적인 찌꺼기들을 비워 내지 않고서는 정신이 “부활”될 수가 없는 것일세.
이제 영혼의 마지막 일곱 번째 단계로, 진리 그 자체의 시력이자 명상이 있네. 사실 이것은 단계라고 할 수조차 없고 차라리, 그 아래의 모든 단계를 거쳐 도달한 안식처라고 해야 될 것일세. 그 곳에 충만한 기쁨, 가장 고귀하고 진정한 善을 향수하는 우리들에게 숨결같이 다가오는 그 고요와 영원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나! 위대하고 뛰어난 영혼들이 있어서, 그에 대해 적절한 표현도 해 왔고, 또한 그런 사람들은 그것을 실제로 보아 왔고 지금도 계속 그것을 보고 있는 중이라고 나는 믿지만, 당장에는 이렇게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네. 신이 우리에게 마련해 준 과정을 꾸준히 지켜 나간다면, 우리는 신의 선함과 지혜로 인해 결국 최상의 원인, 만물의 창조주, 제1원리에로 다가가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그러한 신에 대해 그 위대한 實在에 걸맞는 어떤 이름이든지 가장 합당한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일세. 이러한 원리를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어째서 태양 아래의 모든 것들이, 다만 “공허 중의 공허”(전도서 1:2)에 불과한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네. 공허함이란 기만을 뜻하는 것으로서, 공허한 사람은 기만을 하든지, 기만을 당하든지, 혹은 양쪽 다인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지. 이러한 인식이 생기면, 이제 이 세상의 것들과 實在하는 것 사이의 크나큰 차이를 알게 되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겠지.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창조주 신에 의해 만들어진 이상, 그 자체로만 보면, 그것들도 다 굉장히 멋있고 아름다운 것이지. 그러나 영원한 것에 비교해 보면, 그것들은 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란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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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영혼의 위대성」, 70-76.
11)* :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세의 자유교양학과 즉, 문법, 수사학, 변증법(3학)과 음악, 기하학, 산술, 천문학(4학)에 대한 기능적 정의를 내리고 있다. 다음의 p.258, 「질서의 원리」에서 더 많은 목록이 제시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