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Augustine의 교육론(번역)

제 4 장 학습의 과정 - 3 자유의지

해선녀 2008. 11. 29. 19:31

 

 

 7) 아우구스티누스 : 우리는 지혜라든가, 지혜로운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네. 우리는 또한, 모든 사람은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을 인정하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자네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네. 그렇다면, 자네는 그것을, 자네의 생각을 자네가 나에게 말해 주지 않으면 내가 그것을 알 리가 없는 것이라는, 그런 식으로 알고 있는가, 아니면, 자네는, 자네가 그것에 대해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아도, 나는 그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에보디우스 : 자네가 그것을 이해해 줄 것을 내가 바라지 않아도, 자네도 역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네.

 

아우 :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각자의 마음으로 알고 있는 그 한 가지의 진리는, 우리 두 사람에게 똑같은 진리인가?

 

에보 : 그렇지.

 

아우 : 그것을 더 연장해서 이야기한다면, 자네는 지혜란 우리가 반드시 찾아내어야 하는 그런 것으로 생각할 것이네. 자네는 이 말이 진리라고 생각하겠지.

 

에보 : 나는 정말 그렇다고 확신하네.

 

아우 :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다 각자, 자신의 마음으로만 그것을 볼 뿐이라는 것이지. 내 마음이나 당신 마음, 혹은 다른 어떤 사람의 마음도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해도, 그 진리는 하나로서,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다같이 공유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볼 수 있도록 열려 잇다는 것은 틀림없으니까.

 

에보 : 그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네.

 

아우 :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셈이네. 한 마디로, 우리는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 악을 선보다 더 좋아해서는 안된다는 것, 말하자면 좋은 것은 더 좋은 것에 비교되기 마련이니까. 사람은 누구든지 자업자득으로, 결국은 자기 자신이 본 만큼 얻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 자네는 이 말이 진리로서, 자네나 나나, 그리고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이 다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열려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에보 : 그렇다고 생각하네.

 

아우 : 자네는 부패하지 않은 것이 부패한 것보다 낫고, 영원한 것이 찰나적인 것보다 나으며, 더럽혀질 수 없는 것이 더렵혀질 수 있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부정하겠는가?

 

에보 : 누가 그런 말을 부정하겠는가.

 

아우 : 그런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항상 열려 있는 것이니, 그런 진리를 누가 자기 개인만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나.

 

에보 : 그런 진리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일세. 그것은 진리일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똑같은, 모든 사람의 공유물이니까.

 

아우 : 다시 말하지만, 영혼은 부정한 것으로부터 등을 돌려 청렴한 것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 즉, 부정이 아닌 청렴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겠는가? 우리가 이 진리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개방된 불변하는 진리임을 깨닫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에보 : 정말 그렇지.

 

아우 : 더 나아가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바르고 정직한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이, 일시적인 불행 앞에서 쉽사리 부서지고 무너져버리는 삶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이 있겠는가?

 

에보 : 아무도 없지. 

 

아우 : 이제 이런 질문은 그만 하겠네. 자네가 이런 도덕률이랄까, 빛이랄까 하는 그런 것을 확고부동하게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나와 동감하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네. 우리는 이제, 그것들은 진리이면서 동시에 불변한다는 것, 그리고 따로따로든지 전체적으로든지,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다 자신의 이성과 심성대로 언제든지 볼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는 생각을 함께 나누게 되었네. 그렇지만, 나는 자네가 그런 진리들을 지혜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묻고 싶네. 나는 자네도, 현명한 사람이란 지혜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하는 데 동의할 것으로 생각하네.

 

에보 : 동의하지.

 

아우 : 그렇다고 하면, 이제 우리는 휼륭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the superior and 섣 inferior)을 잘 판단해서 분별있게 그것들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이 정의로운 삶을 계속해 나갈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 어떤 속성인지, 그런 개념이 없는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그 각각의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에보 : 그럴 수 없을 걸세.

 

아우 : 그러면, 자네는 그런 것을 아는 사람을 현명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겠는가?

 

에보 : 그러지 않겠네.

 

아우 : 사려 깊게 살아가는 사람은 확실히, 부정하지 않은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부정한 것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지.

 

에보 : 정말 그렇네.

 

아우 :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일단, 모든 사람이 옳다고 인정할 것을 향해서 자기의 영혼의 머리를 돌리기로 작정했다면 그것은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있겠나?

 

에보 : 부정할 수가 없겠네.

 

아우 : 또 현명하게 선택한 것을 향해 마음을 돌릴 때, 그는 틀림없이 지혜를 보여 줄 걸세.

 

에보 : 그렇겠지.

 

아우 : 그렇다면, 그 현명한 사람은 어떠한 공포와 벌로서 위협을 받아도, 그가 현명하게 선택해서 마음을 둔 그것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에보 : 절대 의심할 수 없겠네.

 

아우 : 그러니까, 우리가 “도덕률과 빛”이라고 했던 것이 지혜에 해당한다는 것이 분명하네. 삶을 살면서, 그 행위 가운데 그러한 것들을 더 많이 적용하고 거기에 일관되게 사는 사람일수록, 그의 삶과 행위는 더 현명한 것이지. 무엇이든지 지혜와 떨어져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현명하게 해낸 것이라고 할 수 없네.

 

에보 : 맞았네.

 

아우 : 그러니까, 자네도 말했다시피, 數의 원리와 진리들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항상 변함 없이 제시되고 공유되는 것으로서 진리이고 불변하듯이, 지혜의 법칙들 역시 항상 진리이고 불변하는 것이지. 내가 자네에게 그 법칙들 중에서 몇 가지를 하나씩 물어 보았을 때, 자네는 그것들이 다 진리이고 자명한 것으로서, 누구든지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다 볼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다고 대답하였지.

 

에보 : 나는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네. 그렇지만, 數와 지혜가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네.  그러고 보니, 그 두 가지가 성경책에서 한꺼번에 언급되어 있는 구절이 생각 나네.8)  말하자면, 數가 지혜에서 나왔든지, 아니면, 數가 지혜에 포함된다든지, 그런 것 말이지. 數는 지혜에서 나온다든지, 지혜 속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도저히, 지혜가 數 속에서 나온다든지 數 속에 들어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네. 예를 들면, 이런 경우에 대해 설명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자네는 그들을 무엇이라고 부를 지 모르겠네만, 예컨대, 셈을 잘하는 사람들, 계산하는데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이,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왜 드문가 하는 것 말일세. 그래서, 나는 數보다도 지혜라는 것이 훨씬 더 고귀한 것으로 존중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네.

 

아우 : 나도 그런 사실에 놀란 적이 있네. 數의 불변하는 진리와, 뭐랄까, 그 안식처 즉, 數가 살고 있는 곳, 자네는 그걸 뭐라고 부를지 모르겠네만, 數의 성역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나는 나 자신이 물리적 대상들의 세계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네. 그걸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었지만, 우리는 분명히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일단, 우리 주변의 사물들의 세계로 돌아 와서 무엇인가 표현해 보려고 하고, 우리 눈앞에 있는 것들에게 단순히 일상적인 이름을 붙여보기도 한다네. 그런 일마저도,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다 해서, 주의 깊고 세심하게, 지혜에 대해 생각을 집중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거라네.

 

數와 지혜는 신비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진리라는 것은, 내가 말했던 대로, 그 두 가지를 함께 연결시켜 놓은 성서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는 걸세.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사람들이 지혜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數에 대해서는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이상해. 그렇지만, 그렇게 되는 이유도, 사실은, 그 두 가지가 결국 동일한 것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네. ...

 

 

신은 세상 모든 것에 數를 부여 했다네.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나 조그만 것에도 말일세. 모든 물리적 대상들도, 창조물 중에서 맨 끝에 존재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 자체의 數를 가지고 있네. 그러나 그것들은 지혜를 부여받지는 못했어, 영혼을 받은 존재라 해도, 모든 영혼이 다 지혜를 가진 것은 아니고, 단지 지적인 영혼들만 그럴 뿐이지. 마치 신이 그 안에서 거주하고 있어서, 그것으로 인해서 모든 다른 것들, 數를 부여해 준 모든 미미한 존재들까지도 통제해 나갈 수 있게 해 놓은 듯이 말이지. 물리적인 대상들을 창조물들 중에서 가장 낮은 차원으로 평가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 우리는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수를 발견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우리 자신보다 낮은 차원의 대상들이기 때문에, 그 數에 대해서 높은 평가를 하지 않게 되지.

 

그러나, 數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아닌게 아니라, 數라는 것은 우리 자신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며, 진리 그 자체 속에서 변함 없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네. 그리고,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셈을 할 수는 있지만, 지혜를 가진 사람, 현명한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혜를 찬양하면서 數는 경멸한다네. 그렇지만, 학식이 많고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부정한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수록, 數와 지혜를 진리 그 자체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지. 그런 진리에 비추어서 본다면 사람들이 얻으려고 애쓰는 금은보화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자신들마저도 그들의 눈에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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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자유의지」, ⅱ, 28-31.

8)* : 「전도서」, 7:25, “나는 지혜와 사물의 이치를 알아내고 탐색하기 위해 내 마음을 다하였도다.” 여기서 이치(reason)로 번역된 라틴어 ratio는 “셈하기”, “산정하기” 등의 원래 의미로 사용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