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Augustine의 교육론(번역)

제 4 장 학습의 과정 - 2 독백

해선녀 2008. 11. 29. 19:28

 

 

 

 6) 理性 : 나, 理性은, 너와의 대화를 통해서, 너의 눈에 태양이 보이듯이 그렇게, 너의 마음에 神이 보이게 되도록 해 줄 것을 약속한다. 마음에는, 말하자면, 그 자체의 눈이 있다. 자유교양학과에서의 진리들은 따라서, 태양에 비추어진 사물들 즉,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것들에 해당한다. 그러한 만물을 비추어 주는 것은 오로지 신이며, 나, 이성은 마음에 대해서, 마치 눈에 대한 시력과도 같다. 눈을 가졌다고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본다는 것(looking)은 안다는 것(seeing)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영혼은 우선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 째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육체의 눈이 있어야 하고, 볼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영혼의 눈은 육체의 모든 오욕으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마음으로서, 현세적인 모든 것들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돌아서서 깨끗하게 순화된 눈이다. 

 

 처음에는 믿음 하나만 있어도 우리는 이런 상태가 될 수 있다. 마음은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오염되고 병든 마음에는 신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의 건강이 앎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아직 믿지 않고 있을 때, 마음은 건강에 관심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그것을 진실로 믿게 되었을 때, 그래서 그 자신이 건강하게 되어야만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믿게 되었을 때에도, 이제는 그 병이 치유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자포자기한 마음은 의사의 충고에 따르려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 정말 그렇습니다. 특히, 그 병의 성격상, 마음은 우리들의 충고를 고통스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성 : 그렇기 때문에 이제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에 소망이라는 것이 더 보태어져 야 된다는 것이지.

 

아우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성 : 그런데, 마음이 만일 그 모든 것을 믿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병이 낫게 된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가 그처럼 약속된 빛을 사랑하고 있지 않는다면 어떨 것 같은가? 지금까지 익숙해져 있었던 어둠의 습관 때문에, 현재 그대로만 만족하고 있다면 말이지. 여전히 의사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지 않겠나?

 

아우 : 그렇겠지요.

 

이성 : 그러니까, 이제 세 번째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우 : 정말, 그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성 : 그래서, 이 세 가지가 없이는 어떠한 영혼도 그 병이 다 나아서 신을 볼 수가, 즉, 신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 육체의 눈은 건강하다면, 어떻겠는가?

 

아우 : 사물을 볼 수는(look) 있습니다. 

 

이성 : 이성은 영혼의 시력이다. 그러나 볼 수(look) 있다고 해서 다 알게(see)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똑바르고 완전하게 보는 것, 즉, 영혼의 시력을 가지게 되는 것을 德性(virtue)라고 한다. 덕성이란 단지, 바르고 완전한 이성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한 그 세 가지가 다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아무리 건강한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그 눈이 빛을 향하고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우선 우리는 바라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해 주는 믿음만 있다면, 충분히 행복해 질 수는 있다. 그 위에, 소망이 있다면, 우리는 똑바로 보아야 앎을 얻게 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거기에 사랑이 보태어지면, 영혼은 앎을 갈구하면서 또한 그것을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있을 때, 우리는 바라보는 것마다에서, 곧 신을 보게 된다. 신은, 우리가 신을 보게 된 후에는 더 이상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영혼이 지향해 나아갈 대상은 바로 신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뜻에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모든 대상들 중에서 최종목표이다. 진정하고 완전한 덕성은 이성으로서 이 당연한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바로 행복한 삶이 가야 할 행로이다. 영혼의 시력이란 영혼의 이와 같은 이해능력을 말하며, 모든 이해는 앎을 추구하는 사람의 지성과 그 앎의 대상이 만났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신체적인 시력의 경우에 시각과 가시체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똑같다. 둘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없이는, 우리의 영혼은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

 

    이제, 영혼이 신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즉, 신에 대한 앎을 얻게 되었을 때에도, 앞의 세 가지가 여전히 필요한가하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영혼이 이미 신을 보고 있다면, 다른 무엇을 더 이상 믿을 필요가 있겠는가? 혹은, 이제 소망하던 그것을 얻은 바에, 무슨 소망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오직 사랑만은 그 필요성이 감소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랑은 더 커져갈 지도 모른다. 영혼이 그 특별한 아름다움을 보게 되어, 이제 더욱 그것을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도, 우리의 영혼이 크나큰 사랑을 가지고 계속해서, 눈 한 번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지 않는 한, 영혼은 그 최상의 행복한 시력을 계속 유지할 수가 없다. 영혼이 신체 속에 머물고 있는 한, 신에 대한 앎의 노정에 있는 그 영혼은 그러한 시력을 향유할 수 가 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신체감각이라는 것이 항상 그 기능을 수행중임을 고려해야 한다. 감각은 우리 영혼을 일부러 기만할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착각이라는 것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러한 착각을 견제하는 저항력으로서, 마음의 세계가 더 훌륭한 세계라고 우리를 설득한다. 그 때문에, 영혼은 현세에서도 신에 대한 앎 가운데에서 행복해질 수가 있다. 

 

그러나 영혼은 신체적인 고난을 응당히 겪어내야 하며, 그래서 죽음 이후에는 그 모든 고통이 끝나 주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므로, 소망은 이 生에서 내내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이제 우리 영혼이, 이 生이 끝나서 신 앞에 나아갔을 때에는, 사랑만 거기에 남아서 영혼을 지켜준다. 영혼은 이제 더 이상 어떤 오류도 침범할 우려가 없는 그 곳에서,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필요조차 없는 그런 상태로 된다. 모든 것을 다 누리면서, 안전하게 휴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더 이상 소망할 것이 남아 있지 않는 것이다. 영혼은 건강해야 하고, 볼 수 있어야 하며(look), 또한 알아야(see)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세 가지의 기본요소가 있는 것이다. 곧,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서 첫 번째, 두 번째 것은 이 生에서 영혼이 건강하고 볼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영혼이 이 生에서 알기(see) 위해서는 그 세 가지 모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生이 끝난 뒤에는, 사랑만이 있으면 된다.

 

   여기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제 지적인 이해와 감각적인 인식을 비교함으로써 신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 신이야말로 지성을 통해서만 이해되는 존재이며, 과학적 지식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둘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세상은 가시적인 대상이다. 빛도 역시 그렇다. 그러나 진리는 빛으로 밝혀지지 않고는 보이지 않는다.과학적 지식이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 없는 진리라는 것은 누구든지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과학적 지식이, 태양과 유사한 어떤 것에 의해 비추어지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태양에 관한 한, 세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태양은 존재한다는 것, 빛이 난다는 것, 그리고 사물을 밝혀 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네가 이해하고자 하는 초월적인 신에 대해서도, 세 가지 사실이 있다. 즉, 신이 존재한다는 것, 우리 앞에 이해의 대상으로 항상 열려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물들에 대해 알게 해 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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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독백」, ⅰ 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