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선녀 2008. 8. 20. 09:24

어제, 병원에 갔어요...내가 아니고, 호팻지양과 컴군이...ㅎㅎ
난 날씨 핑계 대기도 이젠 좀 그렇다 했는데, 마침 나뭇꾼이 점심 먹으러 왔길래...


이건 막내의 노트북이랍니다. 팻지는 어제 데려 왓고 컴은 오늘 데려 올 겁니다. 스피커가 안들려 음성 소프트웨어를 통애 읽을 수가 없는지 오래 되어서 벼르던 참에 병원에 보냈더니 이것 저것, 속탈이 많이 났다네요. 윈도우도 아예 새로 깔기로 했어요...오랫만에 음악이 들리니 좋습니다. 음성 소프트, 그런 건 여긴 물론 깔려 있지도 않고 자판이 달라 아주 어설프지만 그냥 몇 자 써 놓고 님들 방에 마실이나 댕길까 해요..

 

아, 소설 쓰라고요? 그거 아무나 쓰나요...새미님이나 락님즘은 돼야 쓰지..난 그저 저런 수다글이나 좋아 해요..그리고 난 별로 아는 것도 없어요. 자료를 수집해 본다? 그건 호기심 차원에서 그러고도 싶지만, 글세, 일부러 그러기 위해 나서게 될까 ...

 

어젠 그래도 오랫만에 지척에 사는 사촌 여동생한테 전화해서 신동 얘기 많이 햇네요. 걔는 나보다 더 많이 알지요. 서너 살, 작은 아버지 고시 공부하실 때, 작은 엄마가 그 뒷바라지 하시느라고 저 동생을 신동에 한참 맡기고 다녔는데, 요 영특한 것이 기억력도 비상해서 그 때 보고 들은 것들을 다 기억하는 것이 많고, , 그 후에도 두 고모님들이 작은집을 드나들며 작은엄마와 나누신 이야기들을 아무리 턱받치고 듣지 못하게 했어도 오며가며 다 듣고 기억하지 뭡니까..ㅎㅎ

 

,대구 법원 앞 공평동의 그 적산가옥에, 나중에 이층양옥집으로 고�지만, 친척들이 참 많이도 들락거렸지요. , 우리 형제들도 그 집엘 자주 갓지요. 얼마 전엔 요정이 되엇더니, 지금은 또 어떻게 변해 있을지..'우리집엔 남자들이 많아서 나는  두 여동생을 만나러 작은집에 가기를 좋아햇고 늦동이로 태어난 작은집 남동생은 우리집에 와서 자고 가는 것을 아주 좋아 했지요. 우리집엔 여덟 살이나 위인 언니가 내가 4학년 되던 봄에 시집 가고 나 혼자만 여자인데다가 오빠들때부터 온마당에 탁구대니 평행옹이니 운동기구들이 많아 사촌, 육촌들이 원래 많이 놀러  온 데다가 세 남동생들이 그 또래였으니까요. 내 생모는 내 밑의 동생까지, 3남 2녀를 낳고 내가 일곱 살 때 돌아 가셧고, 나를 키운 엄마는 두 아들을 낳으셔서 내 나는 남동생이 셋이지요.   

 

작은엄마는 참 멋진 우리들의 상담자이기도 했지요. 교직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원래 품이 너르고 박식하지요.우리엄마는 자고 깨면 일만 하시는 분...무슨 대화 꺼리도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한참 사춘기 접어들면서 생모를 잃은 작은오빠는 작은엄마를 나보다 더 좋아 햇고 또래 남자 형제가 없는 그 작은 집과 세 아들만 잇는 종고모님댁엘 자주 놀러 갔지요. 아, 큰집도 물론, 4남 1녀, 납자들이 많으니 서로 왕래가 잦았고...종고모님은 그 옛날, 우리가 용산에 살고  그 아지매는 아현동 사실 때, 용산에서 아현동까지 걸어 다니면서 그 집엘 놀러 가곤 했다지요. 그 때, 아지매는 경희여전에, 아재는 연희전문학교에 계셧다는데 나는 간난쟁이라 전혀 기억이 없지만, 그 때 아재가 이화여전 다니는 여학생들을 집에 데려 오기도 해서 두 분이 자주 싸우시더라네요. 내 기억으로는 내내 샌님처럼 공부만 하신 줄 알앗던 분이...

 

그도 그랫겠지요. 우리 막내 작은 아버지도 이화여대에 한 동안 계셧'는데, 그 때 이문동, 작은집에 나도 일년을 잇엇거든요. 대학 1학년 입학했을 때엿어요. 딸만 넷인 작은 아버지 집에 하나 더 보태어서...ㅎ 그 때, 그 점잖으신 작은엄마도 작은 아버지가 안방에서 여학생들의 전화를 받고 건너 가시면 기분이 안좋아 보였고...지금 나 역시, 저 나뭇군이 여학생들한테 너무 친절하지 않는가 하고 샘이 날 때가 있답니다...안그래 보이죠? 속으로는 나도 그게 아니랍니다요...ㅎㅎ저 막내 늦동이 아들이 나기 전까지, 작은 아버지는 집안의 양자 주고 받는 관습대로 작은 오빠를 양자로 삼기로 하고 대학도 법대를 가게 했지만  많은 오빠는 적성에 맞지 않다며 군대에 가버렸다가 제대 후엔 영문과로 편입해 버렸는데, 그 때 마침 저 동생이 태어났지요...

 

나는 하교 길에 작은집에 가서 우리 집에는 없는 피아노를 치기 좋아 햇지요. 학교 도서관에도 있고 도서반이기가지 해서 매일 책을 빌려 올 수 잇는 데도, 소공녀, 소공자, 알프스의 소녀 등에서부터도 굳이 작은집에서 빌려다 보기를 좋아 햇지요. 그 집에 전질로 잇는 그 책들이 부러워서...우리 아버지는 말로는 늘 너도 피아노 사 줄께 하셧지만, 우리 형편으로는 택도 없었죠. 오빠들이 쓰던 아코디언이나 하모니카, 그 딩딩거리는 기타가고작이었죠...아버지는 우리들이 아무리 밤늦도록 노래를 불러도 한 번도 나무라지 않으셨지요

 

작은엄마와 큰고모님은 서로 시누이이자 올캐랍니다. 작은엄마의 오빠와 큰고모님이 결혼하신 거죠. 겹사돈...그러니, 오죽하겟어요. 두 고모님과 작은엄마는 너무도 친했죠...작은엄마는 박팽년의 후손으로, 아시죠? 사육신들 중에 유일하게 혈육을 남겼다는...늘 저 여동생에게 너네 강씨는 치마양반이고 우리 박씨는 껍데기 양반이니라 하셨다네요. 박팽년의 부인과 여종이 동시에 임신을 했던 그 때,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받으면서 그 여종이 박팽년의 아기와 자신의 아기를 바궈치기해서 도망 나와서 그 핏줄을 이었다는...그러니, 아무리 뿌리 깊은 나무, 좋은 씨았이었다고 해도 종의 치마폭에서 자란 문화이고 반대로, 강씨는 그 부리는 얕지만, 좋은 치마폭에서 배양되어 온 양반이라는 겁니다.

 

무슨 얘기인고 하면, 강씨는 원래 말하자면, 양반이 아니고, "상것', '장사꾼"이엇는데, 진주에서 엄청난 돈을 벌어서 조용하고 경개 좋은 곳을 찾아 와 신동에 뿌리를 내린 것이랍니다. 지금도 보면, 김천, 왜관을 거쳐 대구로 내려 가는 큰 교통망에서 신동은 좀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작은 마을이어서 작은 간이역만 있을 뿐이지요. 많은 전쟁과 사화와 갈등과 비리들을 다 겪은 후에, 이 곳에서 오로지 책을 읽으면서,아주 오랫동안 관가에도 나가지 않고 안분지족, 유유자적하는 삶을 펼치기로 하고 가난하지만 지조있는 집안의 좋은 규수들을 재물을 떼어 주고 데려와서 범절과 양속을 가문의 전통으로 세우기 시작햇다는 겁니다...그래서인가, 강씨들은 거의 다 멋과 낭만은 많은데 현실을 잘 모른다고 작은엄마는 늘 말씀하셧죠...사실, 내가 봐도, 나 자신을 포함해서, 많이들 그래요. 순 헛고집에 겉멋만 들었지...ㅎㅎ

 

댓글 쓰려다가 또 이리 수다가 길어졌는데,  이거 또 어쩌려는지, 그러고 보니  두 고모님들과 작은엄마가 그리도 끝없이 이야기 나누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 데도, 작은엄마 돌아 가신 지도 십 수년이고, 자식을 아홉이나 낳아 하나도 빠짐없이 다 키우시고 마지막엔 우리집 마당 한 켠에 방 두 개짜리 작은집을 짓고 몇 년 사시면서 우리엄마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큰고모님도 자식들 다라 미국으로 가신 지 삼십년은 족히 되엇네요...정,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저 막내 깨워 내보내고, 두 고모님들께 안부,전화라도 드려야겟습니다. 두 고모님들은 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셨던 작은엄마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엇고, 두 분 다 기독교인 남편들과 시시면서 자식들도 모두 기독교인으로 키운, 누구못지 않은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되었지요. 저 고지식하신 생가 할배가 아무리 펄펄 뛰셧어도 결국 세 시누 올캐들의 지극한 우애로 다 버텨 내고, 강씨 가문에서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