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새해를 맞으며
간밤 꿈에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가다 보니 내가 속옷도 안 입은 채로 시 스루를 입고 있는데다가 앞뒤가 뒤집어지고 왼쪽 소매는 끼어져 있지도 않아 가슴이 다 드러날 지경이다. 어느 집으로 들어가 고쳐 입으려는데 방마다 문을 열어 놓은 채 사람들이 자고 있다.혹시 누가 깨어나면 어쩌나, 저 대청마루 안쪽 어느 방에선 갸슴츠레 눈을 뜨고 보고 있지 않을까? 불안하여 자꾸 다른 마땅한 곳을 찾는데 가는 데마다 사람들이 그렇게 누워 있다. 마당일 하는 사람들이 누워 있는 어느 눈에 익은 큰 집, 뒤꼍의 변소로 갔다. 차마 변소 안으로는 무서워서 들어 가지는 못하고 그 옆에 서서 옷을 바로 입는데 벽 틈으로 누가 다가 오는 것이 보인다.
어느 아지매던가, 유명 문인이던가? 낯익은 듯한 여인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김실이라고 부르며 여기서 뭐 하느냐고 묻는다. 아, 내가 金室이지...시어머님이 어서 가자고 재촉하시는 바람에 서둘러 나오느라 옷을 잘못 입었다고 둘러대며, 집에 가서 속옷도 다시 갖춰 입겠다며 팔짱으로 앞을 가리고 뒤돌아서 걷는다. 그러고 보니, 시어머니는 무슨...혼자 아파트 문을 잠그고 나오며 되돌아 보았던 불이 환하게 비쳐 나오던 집안이 생각난다. 집이 좋아 보였는데, 그게 내 집이었던가? 아, 그 (무슨 문학 저널 이름을 대며), 책에서 내 글을 읽었다며 그녀가 다시 말을 건다. 이름을 듣긴 했지만 글을 낸 기억이 없는데도 아, 그러셧어요? 고맙다고 얼른 인사하고 걸어 오는 내 뒷모습을 그녀가 계속 바라 보고 섰다.
예쁘게 보여야지, 그녀를 의식하며 시 스루 옷자락을 한껏 하늘거리며 밝은 햇살이 가득한 넓은 중마당에 아이들이 줄지어 가고 있는 옆으로 지나간다. 반장인 듯한 아이가 나를 보고 싱긋 웃는다. 엄마가 이혼해서 나가 버려 할머니와 살고 있는, 착하고 공부 잘 하지만 늘 기가 죽어 있는 언니의 손자 승환이다.. 대문을 나서기 전, 행랑채 앞 커다란 나무 위에 알록달록 예쁜 옷을 입고 새들처럼 옹기종기 앉아 노는 여자 아이들도 있다. 그 중에 유난히 밝고 환하게 웃는 아이, 아, 바로 그 누이인 승은이다.. 그래, 너희들이 이젠 아주 잘 하고 잇구나...
꿈을 깨니, 방금 본 장면들이 생생하다. 꿈이랄 것도 없는, 자고 난 순간에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보지 않았다면 싹 다 잊어 버렸을 그런 뒤숭숭하고 허접한 꿈이다. 특별히 내게 무슨 의미를 줄 것 같지도 않지만, 기억을 더듬어 낼 수 잇다는 것이 우선 신통하고 또 생각해 보면, 꿈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만, 평소의 내 마음 속을 흐르는 의식의 흐름이랄까, 무의식이랄까가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나 자신을 들여다 보면 참 부끄러운 점이 많고 그것이 남들에게 들킬까 두려워 하고 있고 겉으로는 늘 담담했던 것 같지만 시어머니에 대한 압박감을 가지고 잇었고 아직도 좀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무엇인가, 아, 이 허접한 글 쪼가리들이나마 누군가에게 인정 받기를 바라고 있고 조금 인정 받으면 우쭐대고 싶고 어쩌면 나 자신일지도 모르는 저 아이들, 존재의 어두운 그늘에 밝고 환한 햇살이 비쳐들기를 바라고 있고...
그 첫집은 할아버지 생가, 종조부님댁이고 둘째 집은 뒤꼍의 대나무 숲이 무서워 가기 싫었던 저 변소가 있던 종가댁 증조부님댁이다. 그 두 집은 다 유년시절 세배 가던 가장 큰어른들 댁이어서 무엇인가 늘 경외심을 갖게 하는 분위기가 서려 있던 집들이다. 내 꿈에는 늘, 등장인물은 현재인들이더라도 배경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결혼 전까지 살았던 대구의 우리집이 배경인 경우가 많았고 특히, 밤이면 무서워서 혼자서는 못가던 그 변소가 늘 두려움과 불안의 장소로 등장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어쩌다 그 시골 종조부님댁, 그것도 변소들까지 갔을까?
꿈, 생각, 마음, 의지가 행위와 일치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 다만, 우리는 동시에 많은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있거나 끊임없이 변하는 역동적인 마음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생각 따로 행동 따로, 말하자면 심신이원론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고 많은 경우에 휭위에 대한 변명으로 쓰이고 있지만, 불가피한 강제력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행위에는 그에 동반하는 생각이 마음 속 어딘가에 붙박혀 있다. 그러고 보면, '본의 아닌 행위는 불가능한 것이 존재의 본질인 것이다. 다중인격'이라는 말이 그런 인격을 비하하는 말로 쓰여지고 있지만, 마음의 다중성 자체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마음이란 그렇게 첩첩산중의 무의식계까지, 무시로 드나들 수 있는 우리 영혼의 계곡이 아닌가? 계곡일 뿐인가, 거기에는 바다도 호수도 너른 들판도, 혹간은 웅덩이도 스스로도 무서워 피하고 싶엇던 잊어 버렸던 먼 옛날의 변소도 있는 그런 것이다. 그 전체가 다 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우�는 늘 그 중 한 가지 그럴 듯한 것만 본의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통령 선거를 보며 도덕성이냐, 경제적 능력이냐를 가지고 우리는 마치 그 하나만이 자신의 본의인 것처럼 표방하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지 않앗나 싶다., 온국민이 그 싸움의 어느 한 쪽에 '본의로' 또는 '본의 아니게' 가담하며 몰려 다니다가 기진맥진하여 나자빠진 것이었을까?. 입법 사법 행정을 통틀어 국가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10프로 대, 가히, 무 수준이라는 연구도 있다고 한다. '어느 한 놈'도 믿을 놈이 없다는 불신이 만연한 사회, 무엇이 누구의 본의이고 본의가 아닌지 알 수 없는 혼돈에 빠져 버린 채 허우적거렸던 것이다. 밑바닥에 이르면 이젠 떠오를 길 밖에 없다던가? 이런 시점에 우리가 떠올라 갈 길은 어디인가? 그래, 너도 나도 알고 보면 다 똑같지. 이제는 더 이상, 본의가 무엇이라는 말조차 하지도 말자...그래, 그러니, 우리도 다 그렇게 살아도 되지...?'
'그건 아니고, 정말 아니고...' 한 쪽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온다. '우리 다 그렇게 살아 왔지만 그게 정말 옳지는 않다는 걸 우리 다 알잖아? 이젠 정말 그러지 좀 말자...우리의 진짜 '본의'는 바로 이거란 말이야..." 아닌게 아니라, 진짜 '본의'는 어느 개인이 현재 붙들려 있는 의도가 아닌, 누구든 가지 않으면 안될 길, 당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의미가 아닐까?. 도둑놈도 거짓말쟁이도 마음 밑바닥에는 가지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저 도둑질이나 거짓이 나쁘다는 기본적인 양심...그러고 보면, 선거에세 젊은이들이 예전처럼 후보자의 도덕성의 기준에만 붙들리지 않았다는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렇게 너무 실망하지 않아도 될 지 모른다. 배금주의 출세지향주의, 심지어는 우리가 그렇게도 혐오하던 천민 자본주의가 그들의 본의였다고만 읽엇던 우리는 바로 그런 성찰과 다짐의 본의, 말하자면 더 밑바닥에 있는 저의와도 같은 본의를 읽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부토 여사의 피살과 그에 분노하는 시민들의 폭력 시위와 그 속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이제 저런 시대는 아니겠지 생각한다. 우리도, 한 쪽은 부와 권력의 헤게모니를 쥐고 억압과 거짓과 비리를 자행하고 다른 한 쪽은 목숨을 걸고 항거하는 단순 이분법적 지배계층-피지배 계층이라는 대결구도만으로 존재했던 민주 항쟁의 시절이 있었다. 피억압자들 간에도 이념 노선의 투명성과 색깔의 선명성이 강요되고 그것이 곧장 도덕성의 전부인인 양 극단적인 흑백론리의 어느 한 쪽에 가담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시절...회색분자로 적대시될 것이 두려워 '본의로' 또는 '본의 아니게' 영혼의 한 자락만을 잘라내어 깃발을 만들어 휘날리며, 몰아 내쳐진 계곡의 막다른 절벽에서 끝내 목숨이 바쳐지기도 했던 시절...억압 아래에서는 절망스럽게도 오로지 'All or Nothing'의 사생결단적 본의와 그를 위한 투쟁만이 지성과 패기의 유일한 길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2007년이 가고 새해가 시작되는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고 있다. 서툴엇지만, 그래도 의기왕성햇던 참여정부 덕분에, 그래도 우리는 자유롭고 개방적이고 투명한 민주주의의 참맛을 어느 정도 맛보았다고 생각한다.초기엔 막무가내의 극단적 기치를 흔들어 대었지만 맞대들며 사정없이 더 큰 힘으로 흔들어 대는 사람들이 또한 있었기에, 덕분에 삶의 다양성, 가치와 의미의 다중성과 그 실현과정의 역동성이 선명성, 단순성,일의성보다 더 우위의 아름다움임을 인식하게 되어 간 정부와 여야당과 국민...시끄럽고 험악하여 위태롭기도 하엿지만, 서로 흔들고 흔들리는 와중에 우리 모두, 이도 저도 아니라면,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다는 민주주의의 실체를 맛보게 되었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다양한 대화의 체널을 통하여 젊은이들은 이제 더 이상 단순 이분법만으로 세상을 재단하지 않게 되었다. 의지력이 없거나 나쁜 의지만 있는 존재는 없고 다만 의지의 내용과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고 달라져 가고 있음을 믿는다. 높은 하늘로 솟아 오르거나 추락하는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연하게 선회하며 공중을 공유할 수도 있고 저공비행을 즐길 수도 있다. 아직 그대의 집 안마당에 들어 서지 못하여 진짜 본의, 진의가 서로 만나지지 못하고 있는 동안엔, 그냥, 중마당의 나무가지 위에서 기다리면서 양광에 깃털을 고르며 언젠가 함께 날아 오를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새해를 맞으며, 새 대통령을 맞으며, 우리는 이제 대권자 대신에 진실로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고 나누려는 국민을 섬기는 낮은 자세의 봉사자를 가진, 좀더 성숙하고 역량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기대하고 다짐한다..
나라 걱정도 좋지만, 나는 우선 나라가 나를 섬기기 전에 나 자신부터 섬겨야 한다는 걸 안다. 나는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도록 나를 도와야 한다. 빠른 속도와 정밀한 시간과 넓은 공간, 그리고 선명한 색깔과 높은 위치와 폭넓은 인간관계...이런 것들은 적어도 이제는 더 이상 나다운 삶의 가치도목표도 아니다. 우아하게, 그것들을 이루지 못하였음에 대하여 핑계를 댈 생각도 감추거나 부끄러워 할 이유도 없다. 나는 이제 전보다 두 배로 느린 속도로 보행해야 하며, 세 배로 느린 속도로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얼마 남지 않은시력으로나마 내 몸 하나 담을 수 있는 작고 간결한 공간에서 옷매무새를 잘 매만지며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해내는 작고 낮은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나를 도와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진짜 '본의'를 섬기는 일이자 진실로 내가 나다워지는 일이고, 자유로운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에서 나다운 창조와 행복을 이루는 길이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