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빈집에 내리는 눈

해선녀 2007. 12. 23. 10:33
 

 

 

 

장독대 위에 버려진

줄 끊어진 전화기가

따르릉, 따르릉 벨을 울리고

빈 항아리 속의 침묵이 스멀스멀 올라 와서

참았던 수다를 쏟아 낸다.

어서 와, 빨리 와. 팥죽 다 끓였어.

 

 

동짓날 저물녘

대청마루 끝에 걸터 앉은

동네 꼬마들이 다리를 달랑거리며

팥죽이 잔뜩 묻은 입으로

까르르 까르르 웃어대는 소리에

대문옆 뽕나무 가지에서

새들이 푸드득 날아 오른 후

마당 한가득 함박눈이 쏟아진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난 이제 장미예요.

빈 화분이 나뒹굴고 있는

꽃밭 한 귀퉁이 덤불 위에서

매미 허물 하나가 소리친다.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도

꽃밭 한가득 피어 오르는

백장미들을 꿈결처럼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