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교육의 기본원리 - 6
무엇인가를 배우고 있는 사람은 그의 관심이 그 목적에 집중되어 있을수록, 그리고 그의 열의에 더 많은 자극이 주어질수록 그 교과를 더 완전하게 배우고자하는 노력을 더 많이 하게 된다. 학습자의 목적은 지금까지 생각만으로 알고 있던 것을 실제로 연습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이 실제로 목적에 가까워짐을 알게 될수록, 그에 대한 사랑이 더욱 불타게 되는 것이다. 그 교과에 대한 절망감이 적어지면서 더욱 열심히 공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아무리 훌륭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희망이 없을 때, 그의 사랑은 식어버리기 마련이다.
세상의 모든 언어를 다 알게 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개 자기 나라의 말을 배우는 데만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모국어마저 완전하게 배울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도, 의미를 알 수 없는 어떤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하지 않거나, 알고 싶어지지도 않을 정도로 게으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애쓰는 동안, 그는 분명히,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차 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신이 모르고 있는 어떤 것을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의 마음은 그가 이미 알고 있고 파악하고 있는, 어떤 생각의 영향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 생각이란, 다름아닌, 그가 이미 잘 알고 있어 온 그 말소리로 말하고 듣는 의사소통의 과정을 통해서, 그가 이끌어 내고자 하는 가치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미 알고 있으며 앞으로의 공부에 참고가 될 그 생각을 응시하면서 사랑하고 있음으로 해서, 모르고 있는 어떤 것을 알아내려고 애쓰고 있는 그의 마음 속에 정열의 불꽃이 지펴진다. 앞에서 들었던 예를 다시 든다면, 어떤 사람이 “‘tentum’이 무엇이지?”라고 하면서, “혹시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할 때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를까봐.” 또는, “내가 어디서 그 말을 읽게 되었을 때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곤란해질까봐.”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럴 때, “네가 그런 소리를 듣거나 읽어도 그 뜻을 모를 일 있을까봐 걱정하지 마라.”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의미가 담겨 있는 신호들을 통한 의사소통의 기술의 가치를 인정할 것이다. 누구든지 그런 기술의 잇점을 알고 있고, 그래서 그것을 사랑하며, 그렇기 때문에 모르는 말의 의미를 알기 위해 열심히 애쓰게 된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옛날 사람들은 술을 “tentum”이라고 했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런 말은 사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도, 옛날 사람들이 썼던 책을 읽기 위해 그 말을 알아야 한다고까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그런 책들이 이제는 쓸 데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분명히, 그런 말들은 이제 기억해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응시하고 사랑하고 있는 자신의 그 학학습과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하면, 열망하는 마음의 사랑, 자기가 모르고 있는 어떤 것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의 사랑은, 자기가 모르고 있는 그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이며, 그 사랑 때문에 마음은 자기가 모르고 있는 것들도 알고 싶어하게 되는 것이다. 15)오, 신이여, 저희들의 안식은 당신의 선물이었습니다. 저희가 당신을 향수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식 가운데서이며, 안식이야말로 저희들의 마땅한 자리입니다. 저희들을 사랑으로 승화되게 하시는 곳도, 당신의 선한 영혼이 보잘 것 없는 저희들의 영혼을 어두운 죽음의 문으로부터 끌어올려 주시는 곳도 바로 그 곳입니다. 선한 의지 가운데 저희들의 평화가 있습니다. 물체는 그 무게 때문에, 그에 마땅한 자리로 이동합니다. 물 밑에 기름을 쏟아 넣어도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며, 물은 기름 위에 부어도 기름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무게 때문에 이동해서 자기의 자리를 찾습니다. 자기 자리를 벗어난 물건은 불안정하며, 질서를 되찾고 나야 그것은 안정됩니다. 제 사랑은 바로 저의 무게입니다. 제가 어디로든 가게 되면 그것은 제 무게 때문입니다. 당신이 주신 이 선물로 인해, 저희들의 몸은 가벼워지고 위로 솟아올라 불이 지펴져서, 제 길을 찾게 됩니다. 16)마음은 마치 무게 때문에 이동하는 물체와도 같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사랑에 따라 어디로든 그것에 마땅한 곳으로 간다. 17)우리가 동물이라면, 우리는 육체와 그 감각에 따르는 삶을 살 것이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최선은 이것이 전부일 것이다. 이것만 잘 되어 가고 있는 한, 우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일 나무라면, 우리는 감각의 움직임에 따라 어떤 것을 사랑해 볼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좀더 풍요하게 열매를 맺기 위해 무엇인가 필요한 것들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돌이나 물결, 혹은 바람, 불꽃 같은 것들이라면, 우리에게는 정말 아무런 감각도 생명도 없다. 그헝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마땅한 자리와 자연질서에 맞아들어 가려는, 일정한 성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물체의 무게에 의해 생긴 운동은 무거워서 아래로 움직이든, 가벼워서 위로 움직이든 간에, 사실상 그대로가 그 물체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이 그것이 가진 사랑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물체는 어느 쪽으로든 그 무게가 쏠리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우리는 신의 이미지에 따라 만들어진 인간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신의 모습을 보고, 복음서의 어린 아들처럼, 우리 자신을 향해 움직여서 죄를 저지르고, 우리가 떠났던 신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신 안에서, 우리는 죽음이 없는 삶을, 실수가 없는 지식을, 그리고 부끄러움이 없는 사랑을 가지게 될 것이다. 18)에보디우스 : 나는 모든 善 중에서 자유의지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네. 자유의지는 신이 우리에게 내려준 선물이며, 또한 그것은 온당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네. 그래서, 자네만 괜찮다면, 나는 지금 자네에게, 의지의 운동방향이 영구불변하고 만인이 공유하는 善에서부터 한 개인 자신이나 다른 한 사람의 私的인 善의 방향으로, 혹은 더 저급한 차원의 善의 방향으로 전환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어보고 싶네.
아우구스티누스 : 그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에보 : 만일 의지의 운동방향이 그 자연적인 작용으로서 그렇게 주어져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막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지. 그렇게, 자연의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 우리는 의지에 대해 어떤 비난도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아우 : 자네는 그런 운동을 좋아한단 말인가?
에보 : 아니지.
아우 : 그러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에보 : 그렇지.
아우 : 그러면, 자네는 영혼의 운동이 아무런 비난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지.
에보 : 비난할 것이 없는 영혼의 운동에 잘못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불변하는 선을 버리고, 변하는 선으로 전환되는 데에는,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네.
아우 : 자네는 그러면 자네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네.
에보 : 내가 묻는 말투 때문에 말꼬리는 잡지 말게. 내가, 말로는, 잘못된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고 했지만, 그것은 거기에 분명히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놓으려는 것이었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고 한 것은 물론, 내게는 그렇게도 명백한 사실을, 누가 의심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뜻이라네.
아우 : 자네가 바로 조금 전에 인정했던 것을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게 하는, 그렇게도 명백한 진리가 있다는 걸 좀 생각해 보게나. 만일, 그 운동이 자연적인 것이고, 또한 불가항력적인 것이라면, 그 운동은 확실히 비난할 것이 없어. 그렇지만, 자네는 그것이 비난받을 만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점에 대해 어떤 의심을 품는다는 것이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세. 그렇다면, 자네는 자네가 명백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왜 얼버무리는 듯한 그런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을까?
자네는, “자유의지는, 그 운동은 반드시 자연적이어야 한다는 조건 하에 우리에게 부여된 것이라면, 그런 쪽으로 의지가 전환되는 섯을 막을 수가 없다. 그런데, 자연과 필연성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므로, 의지에 대해 비난할 것이 없다.”고 했네. 그런데도, 자네는 그 운동이 비난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고 하니, 의지는 그런 조건 하에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심치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에보 : 난 그 운동 자체는 비난받아야 한다고 한 것일세. 그래서 나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고, 그렇기 때문에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의심치 않네.
아우 : 자네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하는 그 운동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말이네만, 그건 도대체 누구의 운동인가?
에보 : 그것이 영혼 속에 있는 것이라는 건 알지만, 누구의 운동인지는 나도 모르겠네.
아우 : 자네는 영혼이 그 운동 때문에 움직이게 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지?
에보 : 부정하지 않겠네.
아우 : 자네는 움직이고 있는 돌맹이의 운동은 그 돌맹이의 운동이라는 것을 부정하는가? 물론, 우리가 그것에 힘을 가했을 때나, 그것을 공중에 던졌을 때처럼, 외부에서 가해진 어떤 힘에 의한 그런 운동은 빼고 말일세.
에보 : 자네가 말하는 것처럼, 나는 돌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낮은 자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그 돌 자체의 운동이라는 것은 인정하네. 그렇지만, 그건 자연운동이지. 만일 그런 운동이 영혼이 가진 운동이라고 하면, 영혼도 자연운동을 하겠지. 그래서, 자기 자신의 본성에 의한 운동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가 없을 것 아닌가. 그것이 그 자체의 파멸로 향해 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본성의 필연적인 결과니까 말이지. 그런데, 우리는 그 운동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는 점을 의심치 않으니, 결국, 영혼의 운동은 자연운동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겠네. 그러니까, 그것은 돌이 그 본성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운동이 아니겠는가?
아우 : 지금까지의 토론에서 우리가 결론을 낸 것이 있는 셈인가?
에보 : 분명히 있네.
아우 : 그렇다면, 나는 먼저, 마음은 자기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는 한 결코 어떤 욕망의 노예도 될 수가 없다고 했던 그 전의 우리의 결론을 자네는 기억하리라 생각하네. 우리는 그 때, 어떤 초자연적인, 혹은 마음과 동격인 어떤 자연적인 힘 때문에도, 마음이 그런 굴욕적인 상태로 몰리는 일은 없다고 했어. 마음은 그렇게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 물론, 더 열등한 자연의 힘으로는 더욱, 마음을 이길 수가 없으니당연히 마음에 어떤 강요도 해낼 수가 없겠지.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마음이 그 향유의 대상을 창조주에서 피조물들로 바꾸는 움직임은, 오로지 그 자신의 움직임일 뿐이라는 것이지. 이 움직임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자네는 이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바보로 조롱받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이 확실히 자연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라는 말이네. 그것이 돌이 아래로 떨어진 움직임과 같은 점이 있다면, 그저, 후자도 (돌이) 움직인 것이고 전자도 (영혼이) 움직인 것이라는 점뿐이지.
거기에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네. 즉, 돌은 자신을 아래로 움직이게 한 운동을 스스로 정지시킬 힘이 없는 반면에, 영혼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한 그 방향으로, 즉, 더 높은 것을 버리고 더 낮은 것을 취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래서, 돌의 움직임은 자연적인 것이고 영혼의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것이란 말일세.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만약, 돌이 그 무게 때문에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돌이 잘못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고, 좋게 말해서 머리가 돌보다 더 굳었다고 할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돌아버렸다고 하겠지.
우리는 어떤 영혼이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것을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때, 그 영혼이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지. 그래서, 그 영혼의 의지가 불변하는 善에서 변하기 쉬운 善으로 향하였을 때, 그 운동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어.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이 혼자서 스스로 움직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영혼은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지. 영혼 문제에 관한 모든 교훈들은 다 여기에, 즉 그런 운동을 경멸하고 억제하고, 우리의 의지를 영원한 것에 대한 향수에로 돌리도록, 그리고 찰나적인 것들에 대한 향락에 빠지지 않도록 예방을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 아니겠나.
에보 : 알겠네. 그리고 자네가 한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겠네. 마음을 움직여서 어떤 것을 즐길 수 있게 하는 것보다도 더 강한 것이 어디 있겠나. 나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게 만드는 의지라는 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떤 것을 나의 것이라고 하겠는가? 정말, 아무 것도 그런 것이 있을 것 같지 않네. 내가 어떤 악행을 하기 위해서 나의 의지를 사용한다면, 나 이외의 어떤 사람에게 그 책임이 있겠는가?
신은 선하고, 나를 만들었으며, 나는 또한 나의 의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옳은 일을 해낼 수가 없으니, 신은 바로 그런 목적으로 나에게 의지라는 것을 부여한 것이 분명해. 의지를 어느 한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운동이야말로, 자발적인 것이요, 우리 자신의 통제범위 안에 들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더 높은 곳으로 의지의 방향을 돌리는 사람을 칭송할 이유도 없고, 또한 더 낮은 곳으로 향하는 사람을 비난할 이유도 없겠지. 우리는 후자처럼 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도록, 악한 삶을 피하고 선한 삶을 택하도록 경고 받을 것까지는 없네. 그렇지만, 만약 그런 경고를 받을 하등의 이유가 정말로 우리에게 없다고,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인간 사회로부터 제거되어야 할 걸세. 19)만약 善이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이끌었다면, 나는 그것을 오로지 신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내가 알기로, 덕성에 대해 일반적으로 내려지는 4가지 차원의 정의는 여러 가지 형식의 사랑에 그 바탕을 둔 것이다. 나는 이 4가지 덕성이라는 이름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만큼, 그들의 마음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를 바라고 있다. 우선, 그 덕성들을 정의해 보자. 첫째, 절제란 자기가 사랑하고 있는 것에다가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사랑을 말한다. 인내란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참는 것이며, 정의란 오로지 사랑하는 그것만을 위해 봉사하며, 그러기 위해서 올바른 규칙을 거기에 적용하는 사랑이다. 진중함이란 그 사랑에 도움이 되는 것과 방해가 되는 것을 현명하게 분간할 줄 아는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누구의 사랑도 아닌, 오로지 신의 사랑, 즉, 최고선이자 완전한 지혜, 그리고 조화로움인 신만의 사랑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다시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절제는 신을 위해서 그 자신을 순수하고 온전하게 유지하는 사랑이다. 인내는 신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참는 사랑이다. 정의는 오로지 신을 위해 봉사하고, 또한 그 때문에 인간에게 속하는 모든 다른 것들에 올바른 규칙을 적용하는 사랑이다. 진중함은 신을 향해서 가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과 방해가 되는 것을 정확하게 구별해내는 사랑이다.
15) ■참회록■ xiii, 9 16) ■서간문■ 157 17) ■신의 도시■ ⅺ, 28 18) ■자유의지■ ⅲ, 1-3 19) ■카톨릭 교회의 실제■ 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