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교육의 기본원리 - 4
행복은 지식에 있는 것
7)“불변하는 지혜의 삶이 변하는, 지혜가 아닌 삶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라고 묻는만큼 어처구니없는 질문은 없을 것이다. 그 질문의 근거가 되는 진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불변하게 박혀 있어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모든 생각 속에 항상 드러나고 잇는 그런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태양이 그 눈에 빛을 쏟아 붓고 있어도 그 밝은 빛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맹인과도 같다.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몸을 움츠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육체의 그늘진 곳에만 익숙해져 있는, 정신적 시력이 약한 사람이다. 그들은 그 악습으로 인해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쫓겨나와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더 낫고 더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취하려고는 하면서도 실제로는 더 낮고 더 가치롭지 못한 것을 추구하고 잇다. 8)오, 주여, 당신을 어떻게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당신을 찾고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삶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영혼을 살려내기 위해서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저의 신체는 제 영혼에서부터 그 생명을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까? “이만하면 됐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이전에는 진실로 그런 삶을 산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삶을 찾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그렇게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경우처럼, 그것을 기억해냄으로써 찾아지는 것입니까? 한 번도 알았던 적이 없는 것이거나, 언젠가 알았다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으면서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거나 간에, 제가 지금 현재 모르고 있는 것을 새로 배우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됨으로써 찾아지는 것입니까?
분명한 것은, 행복한 삶은 모든 사람들이 다 바라는 것이며, 그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그것을 바라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는가? 무엇을 보고, 그것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가? 어찌 되었거나, 우리는 행복이라는 것을 누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는 그저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만 가지고도 행복한 사람들도 있다. 그런 행복은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보다는 못하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그래도, 행복한 삶을 실제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살아볼 희망조차 없는 사람들보다는 낫다. 그들은 어떤 것이 행복인지 말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척도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고는,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조차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결국, 그들도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찌 되었건 이러저러한 지식을 통해 그렇게 된 것이다. 나는 그런 지식은 우리의 기억 속의 지식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들 개개인이든 그 옛날 원죄를 저질렀던 그 사람이든 간에, 언젠가 과거에 행복했던 적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우리는 원죄를 저질렀던 그 사람 안에서 우리는 죽었고, 또한 그 사람으로부터 저희들은 모든 비극을 물려받았던 것이다.
나는 지금 그것이 사실이었던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 인간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런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고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다. 우리가 행복이라는 말을 하고 있을 때에는 우리가 행복 그 자체를 추구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기쁨을 주는 것은 행복이라는 말소리가 아니다. 희랍사람들이 라틴어로, “행복”이라고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어봤자, 그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기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그 말을 알아듣기 때문에, 그들이 희랍어로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희랍인, 라틴인, 그리고 모든 다른 언어을 말하는 사람들이 다 행복을 추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행복이라는 것 그 자체는 희랍어도 라틴어도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인식될 수 있다. 행복해지고 싶으냐고 물으면 누구든지 한 목소리로 서슴없이, 행복이야말로 자기들이 원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말한다. 행복이라는 것이 그 이름인, 바로 그것, 그것이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9)아우구스티누스 : 나는 자네에게 지혜 그 자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묻고 싶네. 자네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만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그래서 그것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더 현명하게 될 수 있는, 그런 유일한 지혜가 있는 것인가?
에보디우스10)** : 나는 자네가 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모르겠네. 나는 사람들이 어떤 행위나 말이 현명한 것인가에 대해서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병사들은 각자 자기들이 더 현명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그런가 하면, 군사적 활동을 경멸하면서 농사를 짓는 데 힘과 정열을 쏟는 사람들은, 자기들이야말로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단 말일세. 농사는 자기들이 좋아해서 하는 일인데, 그들은 그것을 지혜에 결부시킨다네. 돈버는 방법과 수단을 생각해내는 데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자기들이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돈이나 그와 같은 종류의 모든 현세적인 것들을 다 내던져 버리고 자기자신과 신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진리탐구에 매진하는 사람들 역시,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지혜의 과업이라고 생각한다네.
그리고, 진리를 탐구하고 논구한답시고 유유자적하는 데에만 자신을 내던져 놓기를 원하지 않고, 인류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열심히 책무를 다하고 正義에 입각하여 인간사를 규울화하고 통치하는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들을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이 두 가지 일을 다하는 사람들, 진리를 생각하는 한편으로 인류에게 빚진 책무를 수행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지혜의 최후의 승리자라고 생각한단 말일세. 자신의 일이 다른 어떤 사람들의 일보다 우월하고 자기들만이 현명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분야를 수없이 댈 수 있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그저 자기가 믿고 있는 정도가 아닌, 자신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네. 그러니, 자신의 확실한 생각과 이유를 가지고서 무엇인가를 믿고 있지 않고서는 지혜의 본질에 대해 대답할 수가 없을 것일세. 아우 : 자네는 분명히, 우리로 하여금 최고선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진리라는 것을 떠나서는, 지혜라는 형상(Form)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네. 자네가 말한 대로, 제각기 다른 이상을 추구하고 있는 온갖 사람들이 다 같이, 자기들은 악을 피하고 선을 추구하고 있다고 하지. 그런데, 그들은 각기 다른 것을 가지고 선이라고 믿기 때문에, 결국 서로 다른 이상을 추구하고 있네. 아무리 선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해도, 인간이 추구해서는 안되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지. 차라리,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사람은 잘못을 범할 수가 없을 것인데 말일세..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은 물론 그렇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면 추구하는 그 만큼, 그 사람은 다른 데로 헤매고 다니지 않아.
그러니까, 행복으로 가는 길만을 곽 붙들고 있지 않는 한, 그가 아무리 자신의 목적이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말로 떠들어도, 그는 그러는 만큼 빗나간 것이 된다는 말일세. 무엇이거나 우리의 목적지로 가는 길이 아닌 것을 따라가고 있는 이상, 우리는 잘못 가고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인생의 길에서 방황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최고선이 지각되고 파악되는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만큼 덜 지혜로운 것이지. 사람은 누구나 최고선을 추구하고 소유함으로써 행복해지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지금까지 결코 적지 않은 사람들의 지적이 있어 왔지.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에 대해 누구나 동감하기 때문에, 또한 우리는 모두 현명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다 동의하는 것일세. 아무도 지혜롭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가 없기 때문이야. 이 말은 최고선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도 행복할 수가 없다는 것인데, 최고선이란, 우리가 지혜라고 부르고 있는 바로 그 진리 안에서만 지각되고 파악되는 것이니까 그렇지.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해지기 이전에 이미 행복함이라는 개념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지. 우리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자신있게, 서슴없이 알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개념 때문일세. 마찬가지로, 우리가 현명해지기 이전에 이미 현명함이라는 개념도 우리 마음에 찍혀 있는 것이지. 이런 연관성 때문에, 우리는 누구든지 현명해지고 싶으냐고 물으면, 서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하지.
우리는 이제 지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합의를 본 것 같네. 자네는 그것을 말로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을지 몰라도, 지혜의 개념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지 않고서는 자네가 그것을 원하는지, 또는 그것을 원해야 하는지를 결코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자네가 이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어. 자, 이제는 자네가 그 지혜라는 것이, 마치 수의 원리나 진리 그 자체처럼,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 명백하게 보일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어쩐지, 그것을 이야기해 주기 바라네. 혹시, 자네는 아직도, 내가 자네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 없고 자네 역시 내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현명한 사람이 많은 그 만큼 지혜도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에보 : 최고선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유일하고 동일한 것이라고 하면, 그것이 지각되고 파악되게 하는 진리, 즉 지혜도 역시 모든 사람에게 공통이어야 하겠네.
아우 : 똑같은 것이라는 데 대해 자네는 의심하고 있군?
에보 :난 사실 의심하고 있네. 사람들은 각자 최고선이라는 것을 찾았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모두 서로 다른 것을 가지고 그러고 있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아 왔으니까.
아우 : 나는 사람들이 최고선의 본질에 대해서는 어떻게 확신하고 있든지 간에, 그것은 인간의 행복에 필요조건이라는 확신만큼만 그것을 확신하고 있다면 정말 좋겠네. 그렇지만, 그 문제는 아무래도 더 오랜 시간 토론을 해보아야 할 복잡한 문제 같으니, 우선 크게 말해서, 지금은 사람들이 최고선이라고 생각하고 추구하는 대상이 많은 그 만큼, 최고선도 많다고 생각하기로 하세. 그렇다고 해서, 지혜 그 자체마저도,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말은 할 수 없음은 분명하네. 사람들이 지혜를 가지고 이해하고, 그에 따라 선택하는 선은 다양하다고 하겠지만 말일세.
그런데도 자네는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네는 태양의 빛이 한 가지뿐이라는 것까지 의심할 수 있다는 걸세. 태양빛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대상들이 여러 가지로 있다는 것 때문에 말이지. 그것들 중에서, 사람은 시각을 통해서 자기가 즐기는 것을 자기 뜻대로 선택할 걸세. 어떤 사람은 높은 산을 보면서 그것을 즐기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편편한 넓은 들판을 좋아한다네. 깊은 계곡에 심취하는 사람도 있고, 푸른 숲 속을, 끝없이 넓은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 어떤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다 좋아하기도 하고, 그 중 몇 가지의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바라보면서 즐거움을 더하는 사람들도 있다네.
그러니까, 내 말은, 태양 아래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즐거움으로 택할 수 있는 대상이야 수없이 많지만, 그것들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빛 자체는 한 가지뿐이라는 것일세. 사람들이 원하고 취할 수 있는 훌륭한 것들은 이 세상에 많고 다양하지, 그러나, 그 선택된 즐거움의 대상을 정당하고 진실된 방법으로, 각자 나름대로의 최고선이라는 것으로 정해 놓기는 하지만, 바로 그러한 대상들을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지혜라는 빛은 모든 현명한 사람에게 다 유일하고 똑같은 것이라네.
7) ■기독교 교육론■ ⅰ, 9 8) ■참회록■ ⅹ, 20 9) ■자유의지■ ⅱ, 25-27 10)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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