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교육의 기본원리 - 1
제2장 교육의 기본원리
이 章에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교육관의 기본요소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끊임없는 욕망의 만족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궁극적으로는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려는 욕망의 만족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식을 증대시키기 위한 이성적인 활동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으려 하며, 따라서. 인간의 행복은 궁극적으로, 지성적 활동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의 고난스러운 노작에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은 바로 그러한 노작의 원동력이다. 인간의 사랑에는 높고 낮은 온갖 목표가 들어 있지만 그것들을 이루어 가고 있는 도중에는 그 만족을 이룰 수 없다. 그러한 목전의 목표들과는 무관한, 근원적인 것에 대한 사랑이 있으니, 그것은 곧 신에 대한 믿음이며, 또한 그것은 근원적인 지식의 선행조건이기도 하다. 신앙이 없는 삶은 맹목이요, 헛된 그림자만 좇는 삶이다.
다음에 발췌된 글들은 인간의 지성적인 활동과 행복의 절대적인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초기 두 작품(「反학문주의」, 「행복한 삶」)의 주제를 이루는 것으로서, 사실상 모든 면에서 그의 사상을 지배해 온 핵심적 주제이다. 그것은 곧, 교사들에게 있어서 교육이란, 학습자로 하여금 지적인 만족에 대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즐거운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은 행복한 삶을 위한 준비과정이 아니라, 행복한 삶 그 자체라는 것이다. 1. 神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最高善 1)당신이 좋아하는 그 어떤 철학자의 논문이나 저서, 또는 어떤 국가의 법이든지 들여다 보라. 거기에는 모든 법률과 예언들이 기대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전제보다 더 큰 전제라고 예수가 말한 바 있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대전제가 들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당신은 온 정성을 다하여, 영혼과 마음을 바쳐,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당신의 이웃을 당신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마태 22 : 37-30)
거기에는 모든 물리학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창조주인 신은 바로 모든 자연계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거기에는 모든 윤리학이 들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선하고 명예로운 삶은 결국 모든 것들, 즉, 신과 인간을 각기 합당한 방법대로 사랑하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논리학도 들어있다. 그것은 신, 오로지 신만이 합리적인 영혼의 진리요 빛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국가의 진정한 안정 역시 거기에서 나온다. 어떠한 국가든지 성실한 신앙과 공고한 연대감이라는 기반이 없다면 그 기틀이 확고하고 튼튼한 국가라고 할 수 없다. 숭고하고 진정한 善인, 신에 대한 사랑이 있을 때, 그리고 신의 뜻 앞에서 서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신을 위해서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한 국가의 안정이 온다. 인간은 그 사랑의 진정한 동기를 신에게만은 숨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2)철학자란, 연구하고 탐구하면서, 그리고 토론하고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다. 철학을 하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나는 철학자들이 이 점에서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일 당신에게, 당신은 왜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하여”라고 정답을 말할 것이다. 행복한 인생을 원하는 것은 어떤 철학자나 기독교인이나 다 마찬가지이며,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나 대답을 하는 사람이나, 삶을 통해서 어떤 보상을 바란다는 것은 다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보상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다를 뿐이다. 나는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 원하는 것, 행복한 삶을 요구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특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모든 철학자나 기독교인이나 행복한 삶을 원하는 것은 다 마찬가지라고 말한 것은 그것을 적게 잡아서 말한 것이다. 사실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행복한 삶에 대한 욕망은 다 마찬가지다라고 했어야 한다. 선한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기 때문에 그것은 선하다. 악한 사람 역시,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행복해질 것을 바라고 믿기 때문에, 악한 일을 저지른다. 선한 사람에 대해서는 문제가 간단하다. 그들은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그 자체로서 선하다. 그러나, 악행을 하는 사람이 과연 그렇게 해서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내가 만일, 악한 사람들만 모아놓고 “당신은 행복해지를 원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면, 그들은 아무도 “아니오”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내가 도둑놈에게 “왜 도둑질을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기 위해서”라고 할 것이다.
어떤 것이 없다는 것 때문에 불행을 느끼는 사람은 그것을 가지게 되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 점에서 무지하고 잘못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악행으로 행복해지를 바라고 있다. 사실, 행복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善이다. 그런데 그는 어떤 점에서 잘못 되었는가? 그것은 善을 추구하려는 그 스스로가 惡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왜 악한 사람의 탐욕이 선한 사람의 보상에까지 손을 내미는가?
행복한 인생은 선한 자가 받을 수 있는 보상이다. 善이란 그 사람들의 과업이자, 행복이요, 그들의 보상이다. 神은 그러한 그들의 작업을 지휘한다. 보상을 내리는 것도 神이다. 신은 “이것을 해라. 그러면 이런 보상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도 악행을 하는 자는 우리에게, “악행을 안하면 행복해질 수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누구든지 “내가 나쁘지 않고는 좋은 것에 도달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선과 악은 서로 반대된다는 것을 당신은 알지 않는가? 선을 추구하면서 어떻게 악을 행한다는 말인가? 당신은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는 언제 당신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3)사랑이란 영혼의 운동이다. 모든 운동은 다 어떤 대상을 향해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일 무엇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향해 움직여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는 것 그 자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런 사랑은 어떤 특정한 무엇에 대한 사랑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사랑 중에는 좀더 낮은 차원의 것을 추구하는 사랑이 있다. 그것은 사실상 욕망이라는 이름에 더 어울리는 것으로서, 그것이야말로 악의 근원이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즐기고 있는 것이지만 누군가가 우리로부터 그것을 가져가 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을 사랑하여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사랑의 대상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한 우리로부터 사라져 버릴 수가 없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곧 그것에 대해 아는 것과 동일한 것, 바로 그런 것이다.
예컨대, 금이나 은, 또는 물리적인 어떤 대상이 있다고 하자. 그런 것은 그것을 소유하는 것과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동일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능히 사랑할 수는 있으나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 중에는 예컨대, 아름다운 육체와 같은,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만 할 대상이 아닌 것도 있고, 행복한 삶과 같은,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대상도 있다. 또한, 우리가 소유할 수는 있으나 아예 사랑할 수는 없는 것, 예컨대, 족쇄 같은 것도 있다.
이제, 우리는 知的으로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면서도 그것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경우가 가능한가를 물어야 한다. 知的으로 그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안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단지 부자가 되기 위해, 혹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수학공부를 하는 아이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수학을 다 배우고 나서도, 그것을 배우고 있을 당시에 그들이 생각했던 대상으로서의 수학의 자리에 수학을 그대로 머물러 있게 둘 뿐이다. 학문을 소유한다는 것은 분명히,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렇게 소유하기만 할 뿐, 사랑하지는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것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완전하게 소유한 것은 아니며, 따라서 진실로 안 것도 아니다.
진실로 향수하지 않는데, 그것이 진실로 훌륭하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사랑이 없으면 향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라도, 사랑하고 있는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그런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행복한 삶은, 우리가 진실로 그것을 알고 있다면 불행할 수가 없는 그런 것이다. 행복한 삶이란 그것을 아는 것과 소유하는 것이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행복한 삶이란 오로지 영원한 것에 대한 앎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 영원한 것이란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아무 것도 빼앗아 오는 것이 없는 그런 것이다.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곧 그것을 아는 것이다. 영원한 것은 세상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부분, 즉 우리의 마음으로서 가능할 뿐이다. 마음으로 소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을 앎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완전하게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고 해도 완전하게 안 것이 아니다. 앎은 마음의 독점물이지만, 사랑은 마음만의 것이 아니다. 사랑은 일종의 기호로서, 우리 영혼의 다른 부분에서도 가능한 것이다. 단지, 그것이 우리의 마음과 이성에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마음은 비로소 영원한 것에 대해 평화롭고 고요한 명상을 할 수 있다.
우리의 영혼은 이 소중한 것, 영원한 것에 대하여, 그 마음 전체를 다해서 사랑해야 한다. 무엇이든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랑을 주고 있는 것과의 사이에 무엇인가 그 자체의 것을 반드시 교류하고 있다. 영원한 것을 사랑한다고 할 때에는, 우리의 영혼이 그 영원한 것 자체의 무엇인가와 교통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행복한 삶은 곧 영원한 삶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의 마음에 영원성을 부여해 주는 그 영원한 것이 神 이외에 다른 무엇일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자비라고 한다. 그러므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 22 : 37)라는 말을 명심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영원한 생명은 한 분밖에 안 계신 참된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삶이니라.”(요한 17 : 3)라고 한, 예수의 말을 따라야 할 것이다.
1) 「서간문」 137, 17 2) 「설교문」 150, 3 3) 「83개의 다양한 질문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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